그것도 아주 쎈 놈으로
스스로 배에 이런저런 음식을 넣어가며 임상실험을 했다. 그렇게 수년간의 임상실험을 거쳐 알아낸 것 중 가장 기쁜 일은 바로 ‘술’이었다. 역설되게도 과민성 대장증후군 퇴치를 위한 자가 임상실험을 거치는 사이, 난 술맛을 알아버렸다.
원래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위장 건강을 생각해 웬만하면 술 약속도 기피했다. 하지만 술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있었다. 회식 혹은 꼭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일 때. 이럴 때면 ‘오늘 난 그냥 안주나 먹어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하고선 내 옆에서 술에 거나하게 적셔지는 이들을 보며 홀린 듯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어?’ 배가 안 아팠다. 한 잔을 마셨다. ‘어? 오늘은 장이 좀 괜찮은가 본데? 그냥 마셔!’ 하고 취기가 돌 때까지 마셨다. 술을 좀 마셔서 취기가 돌면, 위장도 취해버리는 건지, 복통이 덜 느껴졌다. 술은 혀와 몸, 정신뿐 아니라 통각까지 둔하게 만드나 보다. 술을 마실 땐 당장의 통증이 크지 않으니, 후폭풍 걱정은 제쳐두고 원하는 만큼 술을 마셨다. 회식 전날 속이 아파 죽을 먹고도, 회식 당일엔 술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남았다. 속도 안 좋으면서.. 미쳤지.
그래도 술을 먹기 전엔 나름의 준비 운동쯤은 해두었다. 짜거나 달거나 맵거나 기름진 음식은 최소 삼 일간 냄새도 맡지 않았다. 부드럽고 하얀 것들로 위장 벽에 미리 코팅을 해두었다. 탄산도 우유도 카페인이 많이 들어간 차도 마시지 않았다. 아, 찬물도 마시지 않았다. 찬물을 먹고도 탈이 날 수 있다.
이렇게 준비를 마쳤다고, 아무 술이나 혀에 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맥주나 막걸리 같은 발효주는 한 모금만 마셔도, 식도를 따라 내려간 술이 위장에 닿자마자 아랫배에서 보글보글 국 끓이는 소리가 났다. 배가 요동을 쳤다. 곧바로 배에 가스가 차 배가 빵빵해졌다. 소주는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위가 쓰렸다. 와인도 삼키자마자 속이 쓰리긴 했으나 소주보단 덜했다. 그러나 두세 시간 정도 후면 배가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술을 그냥 안 먹으면 될 터인데···. 기어이 난 이미 고장 난 위장에 여러 술을 부어가며 술로도 임상실험을 했다. 내게도 즐기면서 마실 수 있는 술이 필요했다.
어느 명절날, 형부가 서천에서만 살 수 있다는 ‘한산소곡주’를 공수해왔다. ‘서천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이 꼭 리미티드 에디션처럼 느껴져서 맛 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입에 소곡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속이 많이 쓰리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렇게 인공적이지 않은 단맛이 나는 술은 처음이었다. ‘술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너무 맛있다.’ 비록 두 잔밖에 마시지 못했지만, 다음날 복통도 심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친구들과 술집에 갔다. ‘소주는 속 쓰리고, 막걸리는 절대 안 돼.’ 하며 고민하는 찰나, 메뉴판 위에 하이볼(위스키에 탄산을 섞은 술)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하이볼은 너무 달고 탄산이 들어간 술이라 즐기지 않았는데, 내가 임상실험을 해볼 만해 보였다. 한 입 털어 넣었다. 탄산 때문에 목이 따갑고 속이 더부룩하긴 하지만, 속이 쓰리거나 위가 붓진 않았다. 무엇보다 알코올 특유의 실험실 냄새가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증류주는 위장에 자극이 덜 하다는 걸 몸소 알게 된 후로, 난 자연스레 술맛을 알아갔다. 20도에서 40도까지 나가는 위스키까지. 증류주는 다른 술에 비해 양이 적고 비싸지만, 센 도수 덕분에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기가 도니, 배부르지 않고 단 시간에 술맛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술이었다. 가끔이지만 이렇게 센 술을 마시다 보니 주량도 늘어났다.
친구들과 등산을 마치고 찾아간 산 아래의 주막에서도, 반주로 막걸리와 맥주를 들이켜던 친구들 옆에서 난 마른 밥알만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었다. 달큰하게 취해 흥이 돋은 친구들을 보며 참 부러웠다. 친구들은 내 나약한 위장을 생각해 내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이젠 술 임상실험을 거친 나는, 종종 위장 컨디션이 좋을 때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말한다.
“술 먹자! 하이볼 파는 데로 가자!”
“올~ 오늘은 배가 좀 괜찮은가 봐?”
“응! 나 술 먹고 싶어서 요즘 건강한 것들만 먹었어. 배 안 아파!”
“웬일이래~ 그럼 당장 가야지.”
자고로 하이볼이란 도수가 낮으면서 탄산의 청량감이 가득한 게 매력인 술이지만, 얼음이 있으면 탄산기가 더 세지니 내 위장엔 좋지 않다. 그래서 조금 진상이지만, 얼음을 모조리 빼고 마신다. 이젠 얼음 뺀 하이볼에 샷을 추가해 마시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작은 위스키 병을 사 모으는 게 취미가 되었다. 아직은 3병뿐이라 취미라고 하기엔 좀 궁색하지만, 아무튼. 위스키들은 주로 이럴 때 쓰인다. 복통이 심해서 밥도 잘 못 먹는데, 술이 너무너무 마시고 싶을 때, 책상에 전시해 둔 위스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는다. ‘음~하~~ 술 냄새~ 좋다~’ 콧구멍을 열심히 벌려가며 냄새에 집중한다.
오늘도 위스키 병 입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혀 끝에 살짝만 대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안돼’ 얼른 뚜껑을 닫아 책상에 내려 두고 이불속으로 들어와 누웠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37일 차 _ 어쩌지, 술맛을 알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