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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Apr 06. 2021

어쩌지, 술맛을 알아버렸다

그것도 아주 쎈 놈으로

스스로 배에 이런저런 음식을 넣어가며 임상실험을 했다. 그렇게 수년간의 임상실험을 거쳐 알아낸   가장 기쁜 일은 바로 ‘이었다. 역설되게도 과민성 대장증후군 퇴치를 위한 자가 임상실험을 거치는 사이,  술맛을 알아버렸다.




원래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위장 건강을 생각해 웬만하면 술 약속도 기피했다. 하지만 술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있었다. 회식 혹은 꼭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일 때. 이럴 때면 ‘오늘 난 그냥 안주나 먹어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하고선 내 옆에서 술에 거나하게 적셔지는 이들을 보며 홀린 듯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어?’ 배가 안 아팠다. 한 잔을 마셨다. ‘어? 오늘은 장이 좀 괜찮은가 본데? 그냥 마셔!’ 하고 취기가 돌 때까지 마셨다. 술을 좀 마셔서 취기가 돌면, 위장도 취해버리는 건지, 복통이 덜 느껴졌다. 술은 혀와 몸, 정신뿐 아니라 통각까지 둔하게 만드나 보다. 술을 마실 땐 당장의 통증이 크지 않으니, 후폭풍 걱정은 제쳐두고 원하는 만큼 술을 마셨다. 회식 전날 속이 아파 죽을 먹고도, 회식 당일엔 술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남았다. 속도 안 좋으면서.. 미쳤지.


그래도 술을 먹기 전엔 나름의 준비 운동쯤은 해두었다. 짜거나 달거나 맵거나 기름진 음식은 최소 삼 일간 냄새도 맡지 않았다. 부드럽고 하얀 것들로 위장 벽에 미리 코팅을 해두었다. 탄산도 우유도 카페인이 많이 들어간 차도 마시지 않았다. 아, 찬물도 마시지 않았다. 찬물을 먹고도 탈이 날 수 있다.


이렇게 준비를 마쳤다고, 아무 술이나 혀에 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맥주나 막걸리 같은 발효주는 한 모금만 마셔도, 식도를 따라 내려간 술이 위장에 닿자마자 아랫배에서 보글보글 국 끓이는 소리가 났다. 배가 요동을 쳤다. 곧바로 배에 가스가 차 배가 빵빵해졌다. 소주는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위가 쓰렸다. 와인도 삼키자마자 속이 쓰리긴 했으나 소주보단 덜했다. 그러나 두세 시간 정도 후면 배가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술을 그냥 안 먹으면 될 터인데···. 기어이 난 이미 고장 난 위장에 여러 술을 부어가며 술로도 임상실험을 했다. 내게도 즐기면서 마실 수 있는 술이 필요했다.


어느 명절날, 형부가 서천에서만 살 수 있다는 ‘한산소곡주’를 공수해왔다. ‘서천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이 꼭 리미티드 에디션처럼 느껴져서 맛 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입에 소곡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속이 많이 쓰리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렇게 인공적이지 않은 단맛이 나는 술은 처음이었다. ‘술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너무 맛있다.’ 비록 두 잔밖에 마시지 못했지만, 다음날 복통도 심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친구들과 술집에 갔다. ‘소주는 속 쓰리고, 막걸리는 절대 안 돼.’ 하며 고민하는 찰나, 메뉴판 위에 하이볼(위스키에 탄산을 섞은 술)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하이볼은 너무 달고 탄산이 들어간 술이라 즐기지 않았는데, 내가 임상실험을 해볼 만해 보였다. 한 입 털어 넣었다. 탄산 때문에 목이 따갑고 속이 더부룩하긴 하지만, 속이 쓰리거나 위가 붓진 않았다. 무엇보다 알코올 특유의 실험실 냄새가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증류주는 위장에 자극이 덜 하다는 걸 몸소 알게 된 후로, 난 자연스레 술맛을 알아갔다. 20도에서 40도까지 나가는 위스키까지. 증류주는 다른 술에 비해 양이 적고 비싸지만, 센 도수 덕분에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기가 도니, 배부르지 않고 단 시간에 술맛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술이었다. 가끔이지만 이렇게 센 술을 마시다 보니 주량도 늘어났다.


친구들과 등산을 마치고 찾아간 산 아래의 주막에서도, 반주로 막걸리와 맥주를 들이켜던 친구들 옆에서 난 마른 밥알만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었다. 달큰하게 취해 흥이 돋은 친구들을 보며 참 부러웠다. 친구들은 내 나약한 위장을 생각해 내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이젠 술 임상실험을 거친 나는, 종종 위장 컨디션이 좋을 때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말한다.



“술 먹자! 하이볼 파는 데로 가자!”


“올~ 오늘은 배가 좀 괜찮은가 봐?”


“응! 나 술 먹고 싶어서 요즘 건강한 것들만 먹었어. 배 안 아파!”


“웬일이래~ 그럼 당장 가야지.”



자고로 하이볼이란 도수가 낮으면서 탄산의 청량감이 가득한 게 매력인 술이지만, 얼음이 있으면 탄산기가 더 세지니 내 위장엔 좋지 않다. 그래서 조금 진상이지만, 얼음을 모조리 빼고 마신다. 이젠 얼음 뺀 하이볼에 샷을 추가해 마시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작은 위스키 병을 사 모으는 게 취미가 되었다. 아직은 3병뿐이라 취미라고 하기엔 좀 궁색하지만, 아무튼. 위스키들은 주로 이럴 때 쓰인다. 복통이 심해서 밥도 잘 못 먹는데, 술이 너무너무 마시고 싶을 때, 책상에 전시해 둔 위스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는다. ‘음~하~~ 술 냄새~ 좋다~’ 콧구멍을 열심히 벌려가며 냄새에 집중한다.


오늘도 위스키 병 입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혀 끝에 살짝만 대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안돼’ 얼른 뚜껑을 닫아 책상에 내려 두고 이불속으로 들어와 누웠다.


소중한 내 친구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37일 차 _ 어쩌지, 술맛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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