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그리고 찻잔
환자분은 우유를 먹으면 안 돼요.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몸에 없는 사람이에요. 유제품은 아예 먹지 마세요.
또 어느 날, 우유 먹고 탈이 났다는 내 말에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술 마시면 안 되고 우유는 절대 마시면 안 된다. 그럼 난 물만 마셔야 하는 건가?
난 액체류를 정말 좋아한다. 씹는 것은 종종 귀찮아하지만 마시는 것만큼은 사랑한다. 배가 아프기 전에는 집밥을 먹을 때도 물 대신 우유나 탄산을 마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우유나 음료수 게다가 찬물을 마시면 탈이 나고, 생수도 많이 마시면 과식이 되는 것인지 물을 먹고도 복부 팽만감이 느껴졌다. 식사에 제약이 생긴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식수까지 제약이 생기니 참으로 억울했다. 그렇지만 내게도 ‘맛’을 느끼며 마실 수 있는 액체류가 필요했다.
그러다 차맛을 알게 됐다. 아직 직접 다도나 블랜딩을 하는 건 아니고 시중에서 판매되는 차를 티팟에 우려 마시는 정도. 회사에서도 늘 아아메를 달고 사는 동료들 틈에서 난 핫 민트 티, 핫 캐모마일 티를 읊었다. 얼죽아가 있다면 난 되도록이면 더워 죽어도 뜨거운 걸 찾았다. 내가 생수 말곤 마실 수 있는 게 차뿐이어서 늘 차를 택한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 취향처럼 자리 잡았나 보다. 퇴사 선물로 동료들에게 민트 티 세트를, 친구들에게도 종종 오설록 티 세트를 선물 받았다.
그 덕에 내게 맞는 차, 차마다 다른 맛도 알아갔다. 차에서도 각각 단맛, 청량한 맛, 깊은 맛이 났다. 차갑게 마셔야 맛있는 차도 따로 있었다. 차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취미와 취향도 생겼다. 집 근처에 좋아하는 찻집이 몇 군데 생겼고, 여행을 갈 때도 꼭 그 지역에서 오래되거나 분위기 좋은 찻집을 찾아본다. 소품샵에 갈 때면 나도 모르게 빈티지 찻잔 코너로 몸이 기울어진다. 내게 딱 어울리는 찻잔을 발견한 날은 갖고 싶은 물건을 엄마에게 한 달을 졸라 마침내 손에 쥐게 된 어린아이처럼 퐁퐁 뛰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모든 차가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속이 좋지 않은 날엔 소화 촉진, 복부 팽만감 완화 등의 효과가 있는 레몬밤, 민트 티 등을 주로 먹는다.
아무리 ‘더워 죽어도 뜨거운 거’ 라도, 한여름이나 갈증이 심한 날엔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스 음료를 주문하면서도 종종 이렇게 요청한다. “마테 레몬그라스 아이스, 얼음은 아주 조금만 넣어주실 수 있나요?” 그럼 카페 직원은 대게 이런 반응이다. “예? 그럼 음료 양이 많이 줄어드는데 괜찮으세요?” 혹은 “아주 찬 건 싫으신 거죠? 그럼 물 많이, 얼음은 조금 넣어볼게요.” 난 아무렴 좋다고 답한다. 이런 까탈스러운 주문도 이젠 미안해서 외출 시엔 직접 음료를 준비한다. 차를 미리 생수에 우려 스탠리 텀블러에 담고, 텀블러를 냉장실에 30분 정도 넣어둔다. 그걸 가지고 외출하면 딱 적당히 시원한 온도의 차를 마실 수 있다. 요즘은 동백꽃 티에 꽂혀있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57일 차 _ 과민성 대장증후군 덕분에 생긴 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