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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Nov 12. 2015

누군가 뒤에서 안아 줬으면 좋겠다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후 한 달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처방받은 약을 하루에 두  번씩 먹은 지 꼭 한 달이 됐다. 아침에 먹는 약과 취침 전에 먹는 약이 따로 있고 '필요시 복용'이라고 적힌 약을 몇 봉 받았는데 아직까지 그 약이 '필요한' 경우는 없었다. 정신과 의사와 세 번째 만났을 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술을 마셔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지난 한 달간 마신 술은 딱 두 잔이다. 그간 잘 참아왔던 술이 최근 며칠 너무 고팠다. 나는 술을 참는 대가로 일 년 반 동안 끊었던 담배를 두 개비 피웠다. 들이 마신 담배 연기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고 예전 같은 맛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이 쏟아졌다.

약을 먹기 시작한 첫 일주일은 밤잠이 달콤했다. 예전에는 잠이 들면 중간에  두세 번은 깼고 새벽 대여섯 시면 일어나서 조간신문을 들춰 보는 일이 오랜 습관이었다. 주말에도 늦잠이나 낮잠을 자는 일은 없었다. '취침 전 복용'이라 쓰인 약을 두 알만 삼키면 밤 10  시부터 잠이 들어서 아침 7 시 넘어서 까지 한 번도 깨는 일 없이 잠을 잤다. 아침에 깼다가 다시 깜빡 잠이 들면 9시나 10시가 돼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약효는 조금씩 몸에 다르게 반응했는데, 다시 밤에 잠을 한 번씩 깨게 되는 대신에 낮에 잠이 쏟아졌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앞에 두고 책상에 앉아 잠이 들기도했다.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잠이 오면 휴게소에서 10 분만 자고 나면 개운해져서 다시 멀쩡한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데, 얼마 전 서울에서 내려올 때는 한 시간 잠이 들었고 대구에서 올라올 때는 두 시간 동안 차 안에서 잠을 잤다.

문득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 플라시보 효과를 의도한 가짜 약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 봤다. 약을 먹으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어떤 일에 흥분하는 경우는 약 먹는 것을 깜빡했을 때였다. 어쩌면 약 먹는 시간을 놓쳤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불안 증세가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공황장애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증세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때때로 엄습했다. 약을 먹었을 때의 느낌이 차분함인지 우울함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난 표정이 없어졌고 말수가 줄었으며 웃음 또한 적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리웠다. 어떤 이는 자신도 비슷한 증세가 있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날 다치지 않게 위로하려 세심한 말을 건넸으며, 어떤 이는 부러 무심하게 평소처럼 대하면서 별일 아니니 걱정 말라는 뜻을 전했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 위로해 주기도 했으며,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던 친구가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난 어떤 위로의 말보다 누구든 나를 따뜻하게 안아 줬으면 싶었다. 그게 누구든 나를 안고 등을 토닥토닥 해 주는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한 달 전 진단을 받고 병원을  나오자마자 호찌민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내 병세를 들은 아내의 말은 "그거 참 안타깝네"였다. 당황해서 나온 말인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야말로 안타까웠던 건지 모르지만 '안타깝다'는 말은 정말 안타깝게도 내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두어 시간쯤 지난 뒤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갈까?" 두 시간 전에는 꼭 듣고 싶었던 말이지만 그때부터 난 조금씩 삐뚤어졌던 것 같다. 당장은 말고 조금 더 있다가 와 달라고 말했다. 그 후로도 아내는 내게로 오겠다는 얘기를 몇 번 했지만, 가고  싶다기보다는 가기 싫지만 꼭 원한다면 갈 수도 있다는 정도의 얘기로 들렸다. 예를 들면 '12월 20일이면 방학이 시작되니 티켓팅을 할 예정인데 그래도 갈까?'라던가 '주말에 아들이 토플시험을 보는데 데려다 줘야 해서'라던가 '요즘 날씨에 한국에 가면 패딩을 입어도 되나? 마땅한 옷이 없어서...'라는 식의 얘기가 그렇게 들렸다.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나는 전화 목소리 역시 가라앉기 마련이었는데 아내는 '목소리가 왜 힘이 없어?'라며 생기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원하는  듯했다.

내게 필요한 건 의사가 처방한 약이 아니라, 너무나 달콤했던 한 잔 술이 아니라, 일 년 반만에 들이 마신 담배연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었고, 체온을 전달해 줄 상대로는 아내가 가장 적당했다. 드디어 아내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전화가 왔다.

"이번 주 목요일 밤 비행기로 가려고 하는데 일요일에  돌아오는 비행기에 자리가 없네"  

목요일 밤 비행기로 오면 금요일 오후에 구미에 도착할 테고, 일요일 밤 비행기로 간다면 여기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만 이틀이 될까 말까 하는 시간이다. 일요일 비행기가 없으면 월요일에 가면 될 테고 월요일이 아니라면 화요일에 가면 되는 일이 아닌가. 고등학교 2 학년인 아들이 그 며칠을 혼자서 지내지 못할까 하는 걱정일까. 난 참았던 못된 성질이 터지고 말았다. 치사하게도 십 수년 전의 일까지 끄집어 내서 서운함을 말했고, 의무감에 찾아 오려면 오지도 말고 당분간 전화도 하지 말라고 내 뱉고 말았다.

어쩌다가 내가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 걸 알게 된 회사의 감사님이 위로랍시고 내게 건네는 말 역시 위로가 되지 못했다. 자신이 수십 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와, 후배들과 동업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지만 돈보다는 이 회사를 선택했다는 애기와, 전국 주류협회장에 오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도대체 지금의 내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아무튼 어쨌든 뭐랬든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최고'라는 식의 얘기를 한 시간 정도 들어 준 후에야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예민해져 있는 걸까. 스스로를 과잉해석하고 있는건 아닐까.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다. 주말엔 여행을 떠나야겠다. 스무 살 무렵 이후 혼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인 듯 싶다. 배를 타고 낯선 섬으로 가서 물비늘을 염색하는 노을과 펄떡이며 솟아나는 아침해를 보아야겠다. 섬과 바다의 가을에 안겨야겠다. 그 안에 침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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