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 Sep 20. 2017

홍콩의 G 층

일상같은 여행

지하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디뎠다. 속도감을 못 이긴 채 나도 모르게 휘청한다. 홍콩의 에스컬레이터는 서울의 그것보다 1.5 배는 빠르다. 밀집된 공간에서 일시에 쏟아져 들고 나는 승객들을 소화하려면 속도를 높여야 했으려니 짐작한다. 나를 제외한 홍콩의 승객들은 속도에 익숙한 듯 유연하게 타고 내린다. 홍콩의 혼잡도는 시내 어디를 가나 서울의 명동 수준이다. 앞뒤의 행인과 속도를 맞춰 걷지 않으면 이내 부딪힐 듯하다. 좌우측 통행이 구획되지 않은 도로에서는 마주 오는 행인의 동선에도 신경이 쓰인다. 손에 쥔 스마트폰의 구글맵에 의지해 방향을 잡아 본다. 역시 홍콩이 초행길인 모자(母子)는 '이 길이 맞는 거야?'라는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반신반의 내 뒤를 좇는다. 백팩을 멘 등과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른다. 삼십 도를 훌쩍 넘는 공기는 지척에 있는 바다의 습기와 섞여 체감온도와 불쾌지수를 동반 상승시킨다. 하지만 수년간 거주했던 호찌민시를 떠올리면 홍콩은 평온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곳에서는 사람 대신 오토바이가 가득한 도로에 갇힌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일이 일상다반사 아니었던가.



홍콩의 지형은 부산과 같아서 바다를 낀 해변에는 약간의 평지가 있지만 그 뒤로는 곧 가파른 언덕이 시작된다. 거주나 통행이 가능한 땅에는 모조리 높은 빌딩을 세워 놓았는데, 마치 좁은 화기에 담긴 플로랄폼에 길고 뾰족한 식물만을 골라 빈틈없이 정밀하게 꽂아놓은 꽃꽂이 화분과도 같은 형상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 좁은 통로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우리가 탄 곳은 G 층(그라운드 층)이며 내린 곳은 3 층이다. 목적하는 건물은 아직도 먼 산등성에 위치했다. 3 층에서 내리니 그 뒤를 다시 높은 빌딩이 막아선다. 아래쪽 건물의 3 층은 바로 뒤편 위쪽 건물의 G 층이다. 다시 그 위의 건물은 아래쪽 빌딩의 3 층 또는 4 층, 이런 식으로 구역 내의 모든 빌딩이 연결돼 있다. 이런 루트를 모른 채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을 도보로 찾는다면 가파른 홍콩 생활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홍콩은 도로 또한 중첩되어 있다. 지상의 도로 밑으로 지하차도가 지나며, 다시 머리 위로 고가도로가 지난다. 고가도로 사이로는 건물과 건물을 잇는 육교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예의 밀집된 인파가 이동한다. 그도 모자라서 승객을 가득 태운 2 층 버스와 2 층 트램이 도로 위를 교차한다. 홍콩은 만랩을 찍은 심시티의 초고수가 이룩한 가상도시를 실제로 재현한 현실 버전 도시다.


구글어스로 본 홍콩섬 일부


보통은 2박 3일이면 다 둘러본다는 홍콩에 일주일 넘게 머물면서도 유명 관광지나 맛집은 거의 찾지 않았다.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빈둥거리기만 한 건, 게으름인지 나이 탓인지 아니면 때마침 불어닥친 초강력 태풍 때문인지 모르겠다. 여행의 목적이 관광이 아닌 아들의 입학과 기숙사 입주를 돕기 위한 것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서울이나 호찌민에서 처럼 대형 마트에서 샴푸와 세제를 샀고, 카트에 컵라면과 간식을 담았다. 이케아를 찾아 기숙사에서 사용할 토퍼와 빨래 건조대 등을 샀다. 빵빵한 에어컨으로 인해 실내온도가 너무 낮아 긴팔 옷이 필요했으므로 유니클로에서 남방을 사 입었다. 공산품은 이제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브랜드의 상품을 비슷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여벌 옷이 부족해지자 호텔 뒷골목의 빨래방을 찾아냈고, 빨래와 건조가 되는 동안 근처 KFC에서 치킨패밀리팩을 먹으며 기다렸다. 심카드를 사서 로칼 폰처럼 썼으며, 교통카드로 지하철과 트램 그리고 홍콩 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배를 탔다. 홍콩에 머무는 내내 같은 호텔에서 묵었으므로 여행의 말미에는 포트리스 힐역에서 내려 호텔로 가는 길목이 마치 퇴근길처럼 익숙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인 곳은 난리안 가든(Nan Lian Garden)이다. 밀집된 아파트 숲 사이에 재현해 놓은 당나라 정원.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야말로 도심 속의 오아시스다. 나란히 어깨를 맞댄 기와지붕, 넒고 맑은 연못과 굵은 잉어들, 반듯하게 손질된 수목이 심어진 정갈한 마당.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당나라 정원이라기보다는 교토에서 찾았던 은각사와 비슷한 느낌이다. 가든 내의 빈 공간을 여유롭게 걷다가 조용한 찻집에서 다리를 쉬며 차를 마셨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프랑스인 룸메이트와 어색하게 함께 쓰는 기숙사 25 층의 자기 방을 나와 스키장 레드코스 정도의 경사를 걸어 내려온 후 지하철과 에스컬레이터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타고 내리며 G 층에서 또다른 G 층을 거쳐 학교 어딘가를 향하고 있을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홍콩에서 맞은 태풍 '하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