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들어 날이 가장 춥던 날 향적봉에 올랐다.
눈꽃이 보고 싶어서 작년에도 덕유를 향했지만 눈 없는 황량한 산에서 바람만 맞았을 뿐이었다.
올해는 작년과는 달리 운이 좋았던지 마음에 그리던 설경을 만났다.
멀리서 본 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에 눈을 하얗게 이고 앉았고,
그 산에 오르니 나뭇가지에 솜을 뭉쳐 놓은 듯 가지마다 두툼하게 눈 이불을 덮었다.
수은주는 영하 20도 체감온도는 영하 30도의 날씨지만 눈과 마음은 뜨거웠다.
순백의 가지 사이로 눈물 나게 시린 파란 하늘이 배경으로 펼쳐지니 그리던 설경의 완성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