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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Dec 13. 2017

소설가의 일과 독자의 일

김연수 산문 <소설가의 일>을 읽고

독토 후기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으니 독후감 정도라고 해야 몇 자라도 쓸 수 있겠군요. 하긴, 후기라고 한대도 남의 얘기는 잘 기억하기 어렵고 내가 했던 말만 머리에 남으니 별 다를 것도 없네요. 사람은 이기적이며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가 그걸 입증하는구요.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소설 작법에 관한 얘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적절한 유머를 가미했으며 작가의 자기 자랑을 은근슬쩍 끼워 넣은 산문입니다.


김연수 작가가 나와 연배여서인지 몰라도 그의 유머 코드는 나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 유머란 게 아재 개그인지 아닌지는 여러분이 판단하겠지요. 가령 책에는 다작의 작가를 소개하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전략)... 그보다 더 감동적인 일화는 에드거 월러스다. 서른 살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해 이십칠 년간 170권이 넘는 장편소설을 남긴 소설가다. 월러스의 비서가 그를 찾는 장거리전화를 받고 한창 집필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말했다. "그럼 그 소설을 탈고할 때까지 기다리겠소." (13쪽)


자기 자랑 또한 요소요소에 넣었죠. 물론 읽다 보면 재수가 없어집니다. 가령 김연수 작가가 대학입시에 합격하거나 문학상에 당선된 느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어떻게 되나 한번 해본 건데, 이렇게 덜컥 (합격/당선)될 줄이야, 이거 어떡하지? (87쪽)

남들은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 결과를 놓고 대충 한번 해보니 되더라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약 오르는 일이죠. 그 밖에도 우연히 영문학과에 들어갔는데 고교 시절 내내 영문학과를 목표로 공부한 친구들보다 성적이 더 좋더라며 자랑질입니다. 이쯤 되니 '우리 애들은 공부도 안 하고 잠만 잤는데 명문대 합격해서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어요'라며 깨알 자랑을 하고 다닌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지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유년기를 보낸 작가라서 그런지 그 당시의 구호 '하면 된다'처럼 '쓰면 된다'를 시종일관 주장합니다.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핑계일 뿐, '열정'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하죠. 작가는 아래와 같은 문장과 같이 노력이나 열정을 재삼 강조합니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군가 고민할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98쪽)
뇌과학에는 반복된 경험이 뇌의 구조를 바꾼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신경가소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반복하면 할수록 뇌의 구조가 바뀌기 때문에 어떤 일을 계속 연습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20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과학적으로 확인됐다. (118쪽)

물론 '재능'으로 대학도 가고 작가가 된 김연수 씨가 하는 말인지라 신뢰감이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작가는 할리우드의 이야기. 즉, 소설이란 아래와 같은 공식으로 반복해서 표현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독토에 참여했던 재윤이 형과 인경 언니는 위 공식에서 '나누기' 대신 '곱하기'가 들어가야 맞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글쎄요. 수포자인 저로서는 나누기인지 곱하기인지 헷갈리지만, 작가의 의도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원하는 걸 얻는지 얻지 않는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다. 인생 역시 이야기라면 마찬가지리라.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군요. 또 다른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건 없어요. 마치 우리가 인생을 겪듯이 소설이라는 것도 '겪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겪어나가면서 알게 되죠.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연애하는 동안 이 연애의 의미는 뭘까, 저 오빠는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보지만 사실은 별 의미가 없어요.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나 많은 조건에 좌우되죠. 저는 연애라는 것도 두 남녀가 겪는 여러 개의 현실 혹은 환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인물들에게 시달리면서 어떤 작품을 완성해 놓으면, 독자는 각자의 가상현실인 소설을 겪는 거죠. 그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게 될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어요. 메시지는 없어요. 일종의 '인셉션'이죠.

네. 숨겨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아내는 일도 좋겠지만, 작가가 자기 소설의 결말을 모른 채 써 나가 듯, 독자는 소설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함께 겪어 나가는 독법도 나쁘지 않겠지요.


김연수 작가는 책의 후반부에 '소설가의 일'에 대해 비교적 명료하게 정의합니다.

자신이 잘 몰랐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흥미롭고, 미처 몰랐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뜻밖의 기쁨이다. 날마다 이 재미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 그게 바로 소설가의 일이다. (232 쪽)


그리고 '독자의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조언하죠.

그래서 소설을 읽는 일은 소설 속 캐릭터의 감각을 대신 맛보는 일이기도 하다.


'감각하다'는 원고를 쓸 때 사용하고, '생각하다'는 교정할 때 사용한답니다. 감각에 의해 초고를 쓰고 나서 읽어 보면, 토할 것 같아서 초고를 '토고'라고 한다죠. 소설을 쓴다는 건 이 초고가 배설해 놓은 토사물을 '생각하며' 치우는 일이고, 자기가 쓴 것을 조금 더 좋게 고치는 일. 즉, 'rewrite' 다시 쓰는 일이야 말로 소설을 쓰는 행위라고 합니다.


저는 물론 작가가 아닐뿐더러 이상과 같이 대충 쓴 초고를 고치거나 다시 쓰는 일 없이 여기 올려놓습니다. 재능과 열정도 없을 뿐 아니라 게으르기 때문이지요. 부디 읽는 분들의 뱃속이 편안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참, 독토 하던 날 내가 여유 있게 한 시간 전쯤에 도착했는데 이미 두 분이 먼저 도착해 있더군요. 교회를 개조한 카페는 넓고 쾌적했는데 재윤이 형과 인경 언니는 하필이면 화장실 입구 테이블에 앉아서 빵을 맛있게 먹고 계시더군요. 두 분은 비위가 강한 걸로 봐서 내 글을 읽고도 토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듯하니 다행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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