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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May 23. 2018

봉암사에서

부처님 오신 날, 희양산 봉암사

일 년에 단 하루만 허용된 만남, 바로 오늘이다. 희양산 절경 아래 숨겨진 절, 천 년의 고찰, 신라의 대표 지성 최치원이 남긴 바위의 글씨 등으로 봉암사는 매우 독특하다. 봉암사는 스님들의 공부방이다. 종단은 1982 년에 봉암사를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고 성역화했다. 그 지독한 폐쇄성으로 인한 신비감이 대중의 관음증을 자극한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는 연중 하루, 사월초파일에만 일반인들에게 문을 연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숨겨진 절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휴일 새벽잠을 반납했다. 커피를 그라인더에 갈아 필터에 걸러 커피물을 내렸다. 드립커피를 보온병 두 개에 나눠 담아 차에 올랐다. 낙동강과 나란히 한 25번 국도를 따라 새벽길을 달린다. 큰 강에서 내뿜는 수증기가 강변을 짙은 안개로 덮는다. 상주에서 3번 국도를 만나 갈아타고 문경에서 922번 지방도로, 총 두어 시간을 달려 가은초등학교 희양 분교에 차를 세웠다. 연중 단 하루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 좁은 학교 운동장은 주차된 차들로 빼곡하다. 


여기서부터 절 입구까지는 절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로 이동한다. 차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평탄한 산길을 걷는다. 걷다 보면 크고 흰 바위로 이뤄진 높이 천 미터의 희양산이 언뜻언뜻 보였다가 사라진다. 채 걷히지 않은 새벽안개 탓이다. 잠깐 스친 바위산은 모나지 않고 둥글어서 유려하며 평온하다. 돌다리를 지나 계곡을 건너자, 초록의 숲에서 농축된 피톤치드 향이 안개에 섞여 사찰 일대를 부유한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신선하고 개운하며 짙고 투명한 향기가 코와 뇌를 자극한다. 그 향기만으로도 새벽을 달려온 수고로움을 보상받는 듯하다.

 

봉암사의 가장 안쪽에는 선원이 널찍하게 자리 잡았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금색전 등의 건축물이 산재했으며, 탑과 비각 그리고 남훈루와 여럿의 요사채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배치됐다. 생각보다 큰 절의 규모에 다소 놀란다. 대웅전 앞마당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낮게 내걸린 연등은 모두 흰색으로 통일돼있다. 울긋불긋한 다른 절의 연등과 비교되어, 단색으로 깔린 봉암사의 연등은 우아하고 단아하다. 절에서 의도한 것일까? 연등은 사람의 키보다 낮은 높이로 달아 놓아서 허리를 숙여야만 지날 수 있었다. 


절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좁은 숲길을 따라 오른다. 오르다가 물소리가 요란하다 싶으면 백운대가 나타난다. 빼곡한 숲 가운데 널따란 바위가 여유롭게 자리를 잡았다. 바위 위로 물길이 지나고, 흐르던 물이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킨다. 백운대의 북벽에는 마애보살이 높고 크게 양각돼 있다. 표정이 뚜렷하며 옷 주름이 선명해서 고려말의 조각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먼길을 달려온 불자들이 마애보살을 향해 딱딱한 바위 위에 무릎을 꿇어 삼배를 올린다. 마애보살이 들고 있는 연꽃 가지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다.


백운대를 찾은 탐방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여유를 즐긴다. 숲과 바위와 물 그리고 천 년의 예술품 앞에서 자기를 놓는다. 차디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거나 그늘 아래 걸터앉아 주변을 관조한다. 무량억겁의 시간이 찰나에 스친다. 마애보살 앞의 바위를 주먹만 한 돌로 두드리니 큰 목탁 소리가 나며, 공깃돌만 한 돌멩이로 두드리니 작은 목탁 소리가 청명하게 들린다. 어떤 이치로 바위에서 목탁 소리가 나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한 차례씩 바위를 두드렸다. 집채만 한 바위가 구르다 멈춘 듯 두 개의 바위가 기대 섰다. 바위 틈새는 출입문 역할을 해서, 그곳을 지나면 또 다른 숲이 펼쳐진다. 이채로움의 연속이다.


다시 봉암사로 내려가 자원봉사자에게 화장실을 물었다. 자원봉사자가 설명을 제대로 못하자 옆에 서 계시던 스님이 거드신다. 한 번에 알아채지 못한 내가 다시 위치를 묻자 스님께서 답하신다. "저 위 길을 따라 한참 가면 스님들 쓰시는 화장실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지 말고 근처에 대충 일을 보시구려" 예상치 못한 스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나치게 격식과 형식을 따지는 중생들에 대한 가르침일까. 속세의 번뇌에서 해탈한 스님의 깨달음일까. 알 듯 모를 듯한 여운을 남긴 채 절을 나섰다. 구름 걷힌 희양산은 더욱 반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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