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바알크하이르!” 세이프 하우스를 나설 때 경비원이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아랍어와 비슷한 현지어에 가래 끓는 듯 발음해야 하는 자음이 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독일어도 그랬지.
때로는 “아사라무 알레이꿈!”(당신에게 평화를)이라고 이슬람권 공통 인사를 한다.
만날 때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이렇게 평화를 바라며 인사를 건네는데 이 나라는 왜 이리 평화와 거리가 먼 걸까. 짠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따금 우리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다. 카불에 올 때 우리 음식을 좀 챙겨오긴 했지만, 얼마 안 가서 동이 났다.
카불에 있는 우리 대사관 직원들의 따뜻한 배려는 큰 위안이었다. 그들은 종종 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집밥처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살벌하고 척박한 오지 생활 속에서 마주한 그 소박하고 진심 어린 환대는 정말로 큰 선물이었다.
대사관 한편에는 흙으로 된 테니스 코트가 있다. 이는 인접 세이프 하우스에 살던 미군들도 보고 부러워했다.
휴일이면 테니스를 치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곤 했는데,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이 시간이 파병 생활에서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었는지 모른다.
유영방 대사님과 박종한 참사관님, 강후원 영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가끔은 바그람에 있는 우리 파병부대를 방문해 정보를 공유하고 식사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그람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신중해야 했다.
같은 부서의 바그람행 배차 계획을 미리 확인하고, 최소 네 명이 한 팀을 이루어 두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이동했다.
미국인은 넓은 땅에서 살아서 그런지 자동차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덕분에 나는 운전하지 않고 편하게 그 길을 오갈 수 있었다.
바그람으로 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2월의 아프가니스탄, 멀리 보이는 산에는 여전히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토록 눈부신 곳에서 사람들은 왜 끝없이 싸우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폭발로 까맣게 그을린 길바닥에 차량 일부로 짐작되나 어느 부분인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터지고 구겨진 채로 나둥그러져 있는 부서진 차체.
빨강, 노랑, 파랑, 흰색의 여러 가닥 전기배선과 찢긴 옷으로 엉켜져 재와 피범벅이 된 검붉은 몸뚱어리. 바로 옆에 마치 마네킹 팔처럼 떨어져 나간 테러범의 팔이, 끊어져 너덜너덜한 혈관과 힘줄과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폭파 버튼인지 어떤 조그만 물체를 아직 꼭 쥐고 있어 더 지독해 보인다. 주변에는 무수한 조각과 파편이 잔혹하게 널브러져 있다.
며칠 전 캠프로 복귀하던 도로에서 내가 지난 지 얼마 후에 자살 폭탄 차량이 터져 사상자 여러 명이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끔찍한 당시 현장 사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살았는데 이런 행운이 오다니,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잊고 있던 급조폭발물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다시 자리했다. 달리는 도로 어느 곳, 어디쯤 매설되어 있을지 모르니….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말 '인샬라', 신의 뜻대로다.
한편, 우리 반장 엔디컷 해병 중령은 종종 내가 바그람에 가서 재충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곤 했다. 멜 깁슨을 닮은 잘생긴 그는 외모만 멋진 게 아니라 마음도 넉넉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건 큰 복이었다. 그의 호의 덕에 전쟁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미군과 함께 일하면서 느낀 점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문화였다.
우리 군에서는 동료나 부하를 챙기고 위하는 '정'이 강조된다면, 미군은 공적인 선을 지키면서도 필요한 언행 위주로 하고, 해야 할 일 외에 불필요한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문화 차이 덕택에 서로의 업무 스타일을 존중하며 협력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한국에 있을 때 그런 성향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조직 관리하고 통솔할 때 잊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