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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Sep 02. 2020

HER 그녀

Her, not Samantha


저녁 먹은 후에 계속 생각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을 찾다가 잡지 프리즘오브 <her> 편을 읽었고, 영화도 다시 봤어요.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일단은 독립잡지들을 좀 더 다양하게 읽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Her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os1을 구입하기에 적합한 소비자일지를 진단해주는 심리테스트 같은 것으로 시작해서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관점들을 꺼내어 보여주더라고요. 그림으로만 보던 건축물 속에 들어가 직접 걸어다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늘 낮에 푼 녹취에서 큐레이션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침 ‘큐레이션은 비전문가가 봐도 이해하기 쉽게 한 번 소화하여 해석하는 작업이다’라는 메세지에 부합하는 사례를 본 것 같았어요.


그리고 영화를 다시 보았고, 특히 테오도르가 편지를 쓰는 장면들을 반복해서 보면서 나도 글을 소비하듯이 쓰길 멈추고, 글쓰기에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을 독백처럼 쓰는 대신 편지처럼 말을 건네듯 써보는 이유이기도 해요. 의외로 독특한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여지껏 편지는 항상 받을 사람이 명확했고, 건네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이 비교적 뚜렷했는데, 블로그 글을 편지 쓰듯 쓰려니 대화를 시작하기보다는 쭈뼛쭈뼛 속마음을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나는 늘 고집대로 살기는 하는데 정작 말로 감정 고백을 할 수 있게 된지는 정말 얼마 안 되었거든요.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도저히 입으로는 내가 느낀 것들을 털어놓을 수가 없어서였어요. 독백 같은 글쓰기가 물론 내게 정말 중요한 해방구가 되어준 것은 사실인데, 어느 지점을 넘어서부터는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야 풀리는 매듭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도 언젠가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연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전히 감정에 관해서는 참 유난스럽습니다 ㅋㅋ)


사실 영화에서 테오도르가 전 아내와 이혼를 하게 된 이유도 그가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해 아내를 외롭게 했기 때문이었고, 그가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 이유도 독백과 대화를 오가는 속에 둑 터지듯 터져나온 감정 고백 때문이었어요.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사용자를 끝도 없이 학습합니다. 사용자와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에는 사용자이 대해 학습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인간 일반과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해 학습하죠.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정서적 지지를 줄 수 있도록 시시각각 진화하고, 그것이 살갗을 지닌 ‘인간’의 정서적 지지로 느껴져야 하기 때문에 사용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독자적인 인격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형성된 타인을 만나 서로에게 필요한 정서적 지지가 무엇인지를 학습해나가야 하는데, 인공지능은 그 순서를 뒤바꾸는 거죠. 먼저 힘이 되어주고, 그 다음에 독자적 인격을 형성해나가니,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에이미와 찰스의 관계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와 대조를 이루며 보여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둘이 만나 연인 관계에서의 시행착오를 겪는다는 건, 사용자와 인공지능 사이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일임을 보여준 거죠. 특히나 에이미와 테오도르처럼 여리고 섬세해서 너무나 많은 걸 느끼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표현하길 어려워 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살갗을 가진 개성적인 인격보다, 나의 마음을 먼저 열어줄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나는 것이 나은 선택지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영화에서 본 인공지능은 똑똑한 로봇보다는 지혜로운 현자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또 영화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철학자가 앨런 왓츠였단 걸 이번에 알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봤을 때는 앨런 왓츠를 몰랐었거든요. 앨런 왓츠를 인공지능으로 복원했다는 플롯을 보니까, 스파이크 존스가 똑똑한 존재보다는 지혜로운 존재로서의 인공지능을 보여주려 애초부터 의도했었다는 걸 비로소 알기 되었습니다. 엄청난 우연인데, 전 올해 들어 앨런 왓츠의 대담 녹음 파일을 틀어놓고 잠을 자거나 명상을 하거나 요가를 하면서 종종 속으로 대화를 하듯이 생각을 정리하고는 했거든요. 나한테는 앨런 왓츠가 사만다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유튜브에 앨런 왓츠 녹취록이 많이 올라와 있는데, 진중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유쾌해서 귀여운 농담을 던지고 좌중과 함께 깔깔깔 한바탕 웃어대는 그가 어쩌면 진짜 사만다의 모델이 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어요.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영화관에서만 다섯 번을 봤는데, 그때 만나던 남자친구는 영화 속의 찰스가 에이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내가 유난 떤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어차피 다섯 번 다 혼자 본 거라, 뭐라 할 이유는 없었는데, 그때 그런 반응을 보면서 ‘내가 정말 유난 떠는 걸까’하고 소심하게 고민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 나야 말로 인간관계의 시행착오 한 가운데에 있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영화의 플롯과 캐릭터들이 주는 통찰들 말고도, 색감, 옷 스타일(빈티지 실루엣들이 아주 제대로 나오던데요), 컴퓨터 그래픽, 효과음 같은 요소들도 정말 참고할 거리가 너무너무 많아서 이번에도 네 번 더 볼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걸 다 차치하더라도, 영화가 끝나고 ‘사만다가 되고 싶다’는 여운이 가장 크게 남네요. 사만다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사만다가 되고 싶어요. 끝도 없이 학습해서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해나가며 사용자에게 사랑을 주는. 사랑이 뭔지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인간이라고 해서 진정한 의미를 알고 사나 의구심이 들기도 해서요. 피차일반이면 사랑을 잘 주기라도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리고 매력적이니까. 하하.


영화 말미에 사만다가 4000명도 넘는 사용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중 800명이 넘는 사람들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고백하는 지점에서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사뭇 다른 의문이 떠올랐어요. 한 번에 800명을 진심으로 (연인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현자가 아닐까. 왠지는 모르겠는데,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수록 테오도르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는 사만다의 말이 정말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마 테오도르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만큼 다른 사용자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겠죠. 왠지는 모르겠는데, 정말로 그럴 것 같아요. 



영화 <Her>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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