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된 인간과 사람이 된 인간, 그리고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인간
홀로 완성된 인간은 없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신이거나 또는 괴물이다.
-Aristotle-
재규어는 동굴 속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석회암을 느끼면서.
어디선가 떨어진 물방울이 얼굴을 적시고 흘러갔다. 차가웠다. 그렇지만 재규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물방울이 얼굴의 털을 적시면서 볼을 어루만지며 떨어져 내려갔다. 그렇지만 재규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재규어는 또렷하게 맺힌 동굴 속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동굴 밖에는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굴 입구에서 박쥐들이 나래를 치는 소리가 채 멎지 않았다. 날개와 날개가 부딪치는 사이에서 메아리는 웅성거리고 법석였다. 어디선가 또 다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재규어는 동굴 속에 가득한 이 어둠이 박쥐의 날개를 따라 바깥세상을 흠뻑 적시는 환각을 보았다.
어둠이 흘러 나간다.
그렇지만 동굴 안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하다. 깊고 깊은 어둠의 샘.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어둠의 샘. 박쥐 나래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왕왕 동굴을 울리고 사라졌다. 어디선가 조르륵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의 몸 곳곳을 흐르는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또 다시 물방울이 재규어 위로 떨어졌다. 재규어는 자리를 옮겼다.
쑥 타는 냄새가 났다.
재규어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송곳니가 전달하는 위턱의 무게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미처 무리와 함께 빠져나가지 못하고 떠도는 박쥐들의 날갯소리가 메아리쳐 동굴 벽을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렇지만 동굴에 정적이란 없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흐르는 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재규어의 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절리 사이에서 흐르는 물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동굴 벽 안에 갇혀 흐르는 물소리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물소리는 환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규어는 물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텅 빈 뱃속을 공명장치 삼아 몸은 목청껏 허기를 노래하고 있었다.
위가 혀를 내두르는 소리. 내장이 뱃가죽을 차고, 쭈르륵거리면서, 무언가를 쥐어짜고 싶어서 소리를 지르는 소리. 미쳐버린 혓바닥이 목구멍으로 무언가를 넘기는 소리. 뻔히, 혓바닥의 거짓시늉인 걸 알면서도 목구멍이 애처롭게 움직이는 소리. 먹을 것을 바라는 소리. 온 몸이 먹을 것을 향해 내지르는 소리.
재규어는 코를 킁킁 거렸다. 쑥 타는 냄새가 났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기를. 재규어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동굴의 바닥은 자꾸만 꺼지고 다시 솟아났다. 몇 번이고 재규어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냄새가 나는 쪽으로 몸을 옮겼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몸이 절규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쑥 타는 냄새가 났다. 재규어의 뇌 주름 깊숙이 쑥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재규어 몸속을 가로지르는 혈관 혈관 마다 쑥 타는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재규어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재규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재규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연 불빛이 보였다. 저기에 곰이 있다. 재규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귀를 기울였다. 물이 흐르고 재규어의 몸이 먹을 것을 바라는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물어뜯는 소리. 베어내는 소리. 씹는 소리. 삼키는 소리.
재규어의 몸이 꿈틀거렸다. 재규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란 재규어가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재규어는 균형을 잃고 말았다. 재규어가 재빨리 다시 일어났을 때, 동굴 속은 다시 물 흐르는 소리와, 재규어의 심장 뛰는 소리,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소리밖에 없었다.
부연 불빛이 꿈틀거렸다.
“재규어······?”
늦었다. 재규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빛을 향해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곰은 동굴 벽에 기댄 채 불빛 아래 앉아있었다. 애써 앞에 흩어져 있는 날고기를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토끼의 내장 냄새가 재규어의 코를 자극했다. 곰은 이리로 오라는 듯, 재규어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규어의 왼쪽 반신이 온전히 불빛에 드러나 있었다.
-1-
재규어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했다. 재규어의 광대뼈 아래 모닥불에 드리운 그늘이 까불까불 춤을 추고 있었다. 곰이 재규어에게 날고기를 내밀었다. 아마 넓적다리일 것이다, 생각보다 눈이 먼저 알아차리고는 온 몸에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온 몸이 들뛴다. 여태 먹어왔고 알고 있던 넓적다리 고기 맛을 온 몸이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규어는 고기를 받지 않았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렸다.
그 것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큰 진동이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거나 또는 침을 삼키는 소리. 그것도 아니라면 온몸의 혈관이 미친 듯이 먹을 것을 갈망하는 소리. 살과 고기로 이루어진 내 몸이 내 몸 바깥의 고기를 원하는 소리. 온 몸을 울리고 뒤흔드는 소리.
목구멍에서 쉴 새 없이 침이 솟았다. 입 안 양 쪽의 석회동굴에서 끊임없이 텁텁하고 묽은 침이 흘러나왔다.
몸이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재규어는 그러나 고기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홉뜬 눈으로 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곰의 얼굴은 모닥불에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곰의 얼굴도 예전에 비해 수척해보였다.
북소리.
둥. 둥. 둥.
두둥. 둥. 둥. 두둥. 둥. 둥. 두둥. 두둥. 두둥. 둥둥둥두둥둥둥두둥두둥두둥.
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
몸을 뒤흔드는 소리.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내 몸이 내 몸 바깥의 피를 원하는 소리. 온 몸을 울리고 뒤흔드는 소리. 온 몸을 파랗게 칠한 재규어가 앙칼진 고함을 내질렀다. 목구멍을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정글 사이를 헤집으며 흩어진다.
어디선가 바람 가르는 소리가 뺨을 울렸다. 재규어는 몸을 숙였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는 순간이었다. 느낌으로 재규어는 그것이 누군가가 파이프로 날려 보낸 뼘창이겠거니 짐작했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뼘창의 끝에는 독개구리의 그것이 발라져 있을 것이다. 살거죽을 뚫을 힘만 있으면 뼘창에 묻은 독은 장정 너덧도 너끈히 쓰러뜨릴 수 있다.
북소리는 점점 커졌다.
재규어는 숲을 가득 채운 사내들의 숨소리와 땀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정글과 함께 호흡하고, 다시 정글은 그들과 함께 호흡했다.
엎드려있는 재규어 앞에서 세차게 와랑와랑 나뭇잎이 흔들렸다. 손에 든 곤봉을 고쳐 쥐며 재규어는 몸을 날렸다. 재규어의 몸과, 곤봉이 호를 그리며 나뭇잎 사이의 한 점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 두개골이 바수어지는 소리와 함께 재규어의 얼굴에 피와 골이 튀었다. 비명소리조차 없었다.
적들은 정글의 북쪽에서 내려왔다. 오래된 전설 속에서 누군가 말하길 적들은 물이 없는 땅과 높은 땅을 지나 비로소 물이 떨어지는 이 곳에 도달했다고 한다. 말라붙은 적들의 땅이 여자의 입술처럼 촉촉한 이 땅을 즈려밟는 순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적과 싸워왔다. 적들도 끊임없이 우리와 싸워왔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흑요석으로 만든 칼과 뼈를 깨뜨려 만든 칼이 부딪쳤다. 대나무를 이어 만든 갑옷 위로 둥근 돌을 엮어 만든 곤봉이 떨어졌다. 피와 골이 섞여 뭉개지는 정글의 육박전 속에서 사내들은 정글 그 자체와 다름없었다.
정글의 한복판에서 재규어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오늘 다섯 번째로 잘라낸 엄지손가락을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 넣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엮여있는 주머니는 인간의 머리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재규어는 방금 자신이 쓰러뜨린 놈이 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곰.
곰은 적 부족의 유명한 전사였다. 자신이 토템 재규어의 가호를 받는 것처럼 곰 역시 토템의 가호를 받는 전사였다. 실제 동물 곰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처럼, 재규어는 아직 단 한 번도 곰이라는 그 전사 역시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곰도 마찬가지였다. 곰을 보았던 부족의 전사들은 언제나 곰의 어마어마한 덩치에 대해 허풍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들에 따르면 곰은 맥보다도 큰 덩치를 가졌다. 비단구렁이의 허리 같은 팔뚝을 가졌다. 그 팔뚝에는 어마어마한 발자국의 문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지금 재규어가 쓰러뜨린 사내의 팔뚝에는 깃털문신만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문신의 농담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아마 이 문신도 적을 쓰러뜨릴 때마다 그린 문신임에 분명했다.
재규어 역시 문신으로 몸을 수놓고 있었다. 재규어라는 이름을 받은 이후로 그는 한 사람의 적을 죽일 때마다 자신의 몸에 꽃을 닮은 재규어의 가죽 무늬를 수놓았다. 다섯 번의 겨울이 지나고 이제 그의 등에는 더 이상 디딜 곳도 없이 흐드러진 꽃들이 살가죽을 뒤덮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사내를 타고 앉아 재규어는 다시 곰을 생각했다.
곰의 이마는 낮다. 곰의 코도 낮다. 곰의 콧구멍은 어른의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 그래서 곰은 냄새를 잘 맡는다. 아무리 진흙을 두텁게 바르고 있어도 곰은 눈치 챈다. 곰은 길게 기른 머리에 기름을 잘 발라넘기고 있다. 그 말을 믿는다면, 곰의 머리가죽은 좋은 손가락 주머니가 될 것이다.
곰의 턱은 두텁다. 곰의 입술 역시 두툼하다. 굵은 곰의 목을 따라 내려가면 떡 벌어진 어깨가 나타난다. 어깨의 양 옆에는 비단구렁이의 허리 같은, 굵고 유연한 팔뚝이 언제든지 적의 머리를 바술 준비를 하고 있다. 곰의 손은 크다.
곰의 손. 곰의 손가락을 생각하며 재규어는 방금 고함을 지르며 나무 옆을 밟고 날아든 적을 향해 곤봉을 맞휘둘렀다. 적의 곤봉은 재규어의 위로 빗겨지나갔다. 재규어는 남들보다 키가 작다. 그래서 항상 적의 무기를 머리 위로 피한다. 그러나 재규어의 곤봉은 적의 턱을 바로 맞췄다. 적의 턱이 바수어진다. 피와 이빨이 줄줄 흐른다. 재규어는 연이어 곤봉을 휘두른다. 적이 곤봉을 떨어뜨린다. 적이 넘어가기 전에 왼쪽 허리춤에 단 뼈칼을 집어 들었다. 여섯 번째 손가락을 얻을 차례,
라고 재규어가 생각한 순간이었다. 재규어는 숲을 가로지르는 흰 빛을 보았다. 재규어는 그것이 환상인줄로만 믿었다. 여전히 북소리가 숲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러나 흰 빛은 빠르게 숲 속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재규어는 눈을 홉떴다. 흰 빛의 앞에서 풀과 가지들이 앙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흰 빛 뒤로 잘린 식물들의 잔해가 무성하게 남아있었다. 누군가가 흰 빛의 앞을 가로막았다. 적의 전사인지, 아니면 우리 전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흰 빛 앞에서 그 역시 무성한 잔해로 변해버렸다. 목이 날아간 그 자리는 어떤 흑요석 날이 베어낸 자리보다도 깨끗했다. 또 다른 전사가 달려들었다. 흰 빛이 움직이자 전사의 팔이 시든 풀가지처럼 잘려나가 정글 한 구석에 떨어졌다. 한 전사가 흑요석 칼을 휘둘렀다. 흰 빛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빛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든 전사들이 그러나 믿기지 않는 다음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빛이 움직였다. 흑요석 칼을 든 전사의 손목이 날아갔다. 전사는 비명을 질렀다. 전사의 칼은 빛의 몸을 채 꿰뚫지도 못했다. 빛이 다시 움직였다. 전사의 다른 쪽 손목이 날아갔다. 양 팔목에서 피를 뿜으며 전사는 허둥지둥 정글 속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흰 빛이 움직였다.
전사가 살아있는 채로 토막토막 나뉘는 것을 보며 재규어는 몸을 떨었다.
누군가가 고함을 지른다. 고함에는 질퍽한 두려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앞서의 고함이 전쟁을 알렸다면 이번의 고함은 전쟁을 끝내는 고함이었다. 재규어 역시 목구멍까지 가득 찬 고함을 뱉을 뻔 했다. 그러나 온 몸에 새겨진 재규어의 무늬가 그 고함을 겨우 내리눌렀다.
전사들이 앞 다투어 정글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때 흰 빛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2-
여기가 어디인가.
너희는 사람인가.
이 곳이 사람이 사는 곳이요, 그리고 만일 너희가 사람이 맞다면 나는 너희의 왕이 될 것이다. 나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노란 하늘이다.
나는 바람과 구름을 다룬다. 나는 천지의 조화를 깨친 인물이다.
나는 부정한 교합으로 태어나지 않았노라. 나는 처녀가 낳은 알에서 깨어났다.
너희는 나를 왕으로 맞으라. 무기를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라. 노래 부르며 흙을 던져 무덤을 만들어라. 그 무덤은 너희가 여태까지 지녀왔던 야만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비로소 사람이 될 준비를 마치리라.
-3-
전사들과 아낙들은 머리를 조아린 채 떨었다. 두 부족이 쌓아올린 흙무덤 위에 흰 빛의 남자는 우뚝 서 있었다. 남자의 몸은 그리 크지도 그리 작지도 않았다. 남자의 몸을 감싼 흰 빛은 남자가 입은 갑옷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햇빛이 그 갑옷에 부딪치면 갑옷은 빛을 뿜었다. 그러나 그늘에 가리면 갑옷은 시커먼 그늘 빛으로 물들어버렸다.
아마도 흰 빛의 남자가 흙무덤 위에 올라 선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규어는 자신을 비롯해 머리를 조아린 채 떨고 있는 전사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흰빛이 죽이지 않았다면 곰 역시 이 무리에 섞여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재규어는 이내 거대한 덩치의 사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곰은 다른 전사들처럼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그러나 재규어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곰의 덩치는 과연 다른 전사들이 칭송할 만 했다. 재규어는 온 몸으로 곰이 강한 전사라는 것을 뿌듯이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재규어는 문득 앞을 바라보았다. 흰 빛의 사내가 재규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규어는 사내의 눈에서 빛이 섞인 큰 불이 쏟아져 나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내의 눈은 작고 맑았다. 하마터면 재규어는 사내에게 입을 열 뻔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내가 먼저 재규어의 얼굴을 걷어찼다.
-4-
믿는 너희는 사람이 될 준비를 할 것이다.
너희는 그믐밤까지 너희의 대표를 뽑으라.
나는 너희의 대표에게 쑥과 마늘을 주겠노라.
빛이 없는 동굴에서 그들은 삼칠일, 달이 다시 그믐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 빛이 없던 너희의 동굴 속에서 너희는 너희의 야만을 모두 벗을 지어다.
그리고 너희는 사람이 되리라.
-5-
재규어는 사내에게 걷어차인 턱을 어루만졌다. 두런두런하는 목소리와 함께 전사들이 다가왔다.
“재규어, 우리는 구덩이에 든 꿩과 같소. 통발에 든 메기와 같소. 사납게 턱을 벌린 비단구렁이의 입 안에 든 사향쥐와 같소.”
입을 연 황새는 불안한 눈빛으로 재규어의 턱을 바라보았다. 마치 흰 빛의 마법에 씌워 곧 재규어의 턱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달아나야 하오.”
재규어는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달아난단 말이오? 새끼를 두고 달아나는 물돼지처럼?”
마치 다른 전사들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겠냐는 듯, 황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재규어는 태연했다.
“구덩이에 든 꿩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지. 통발에 든 메기가 해야 할 것. 비단구렁이의 입 안에 든 사향쥐가 해야 할 것.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 빠져나가는 일.”
“어디로 달아난단 말이오? 호수의 표면에 떠오른 물고기를 물수리가 놓치는 법이 없는 것처럼, 흰 빛은 우리를 따라올 것이오.”
“정글은 그늘이오. 빛이 찾아들지 못하는 곳은 물새의 깃털처럼 많소.”
재규어는 순간 흰 빛이 자신의 턱을 걷어차기 전 보았던 빛의 눈을 떠올렸다.
“흰 빛은 아무 것도 아니오.”
황새가 재규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곰 족에서는 당연 곰이 나올 것이오. 가장 긴 호저의 가시가 먼저 적을 찌르는 것처럼, 곰의 발은 가장 먼저 동굴에 닿을 것이오. 그리고 곰이 사람이 되어 이 동굴을 나왔을 때, 어머니 정글은 저들의 땅이 될 것이오.”
재규어는 조용히 황새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황새는 재규어의 양 팔을 움켜쥐었다.
“이 정글에는 우리 조상들의 뼈가 묻혀 있소. 우리 조상들의 조상들 뼈가 이 곳에 묻혀 있소. 이 곳은 우리의 뼈가 묻힐 곳이오. 우리의 후손들의 뼈가 묻힐 곳이오. 우리 후손들의 후손들이 다시 묻힐 곳이오.”
재규어는 어쩐지 입가에 웃음이 도는 것을 느꼈다.
“동굴에 들어가겠소. 다만 황새여.”
놀란 눈으로 황새는 재규어를 바라보았다. 재규어는 황새의 어깨를 맞붙들었다.
“우리의 예언자여.”
잠시 재규어는 숨을 골랐다. 황새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의 말은 맞소. 아마 우리는 이 정글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오.”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재규어의 눈은 맑았다.
-6-
하늘은 밤을 맞았노라. 다시없는 어둠에 쌓였노라.
나는 너희에게 빛을 내리노라. 흰 빛의 광명을 주노라.
다시 이 동굴을 나오는 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닌 모든 어둠을 이 동굴에 내려놓아야 한다. 쑥과 마늘을 먹으며 너희는 동굴 속에서 다시 어미의 배로 들어간 태아가 되리라. 삼칠일이 지나 다시 그믐밤이 오면 너희는 너희를 묶고 있던 야만의 탯줄을 끊고 동굴을 나오라. 동굴을 나오는 이는 오직 하나요,
그 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동물이 사람이 되는 날. 우리는 동물로 축제를 열리라.
-7-
별조차 없었다. 구름이 낀 탓이다.
재규어는 뿌듯이 이를 갈았다. 턱은 멀쩡했지만 흰 빛을 보는 순간 공연히 턱 어딘가에서 비틀린 통증이 가로세로 이뿌리를 치고 지나갔다.
재규어는 다시금 곰을 바라보았다. 강하다. 재규어는 지금 제 옆에 선 곰이,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해 온 곰과 별반 다르지 않아 더욱 놀랐다. 덩치를 견준다면 자신은 곰의 절반도 되지 않아보였다.
흰 빛은 주문을 외고 있었다. 흙무덤 사방을 두른 모닥불 빛을 받아 흰 빛은 더욱 지세 높은 모양이었다. 빛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들에게 부라리기라도 하듯 힘껏 빛을 되쏘고 있었다.
흰 빛의 말에 따르면 동굴에 들어가는 사람은 오로지 걸칠 옷 한 가지만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곰과 재규어는 태어난 그대로의 알몸, 시뻘건 벌거숭이로 밤공기를 맡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가릴 옷가지에 흰 빛이 정화의 연기를 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재규어는 재규어의 가죽을 가지고 왔다. 상처 하나 없는 가죽이었다. 뼘창으로 잡은 덕분이다. 토템인 재규어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부족의 가장 뛰어난 전사이자 주술사인 재규어뿐이었다. 그런 재규어조차 일생에 단 한 마리밖에 죽이지 않았다. 이 재규어를 죽임으로 해서 재규어는 사람의 허물을 벗고 재규어로 태어날 수 있었다.
다시 사람이 되러 동굴을 들어간다,
재규어는 혀끝에 고이는 씁쓰레한 침을 삼켰다.
곰이 가져온 것도 어느 짐승의 가죽이었다. 저것 또한 토템의 가죽이겠거니, 재규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재규어는 곰이란 짐승을 살아서 본 적이 없다. 마을의 눈먼 늙은이가 말하기를 곰이 사는 곳은 이 곳에서 삼 대를 거쳐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 가죽을 가지고 있는 곰은 필시 강한 주술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쑥과 마늘은 동굴 안에 있다. 동굴은 이 정글을 품고 있는 산의 몸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짐승의 안처럼 종잡을 수 없이 구불구불한 동굴에는 마치 창 마냥 바깥으로 뚫린 구멍이 곳곳에 있었다. 초생달이 쥐사슴의 털 오라기마냥 오그라든 밤, 부족사람들은 그 구멍에다 쑥과 마늘을 잔뜩 던져놓았다. 곰의 부족사람들 역시 다른 구멍에다가 동굴에다 쑥과 마늘을 던져두었을 것이다.
쑥은 말리면 불을 붙일 땔감이 된다. 연기만 조심한다면 괜찮을 것이다. 흰 빛이 바라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삼칠일을 버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족민들이 구멍에다가 쑥과 마늘 수십 단을 던졌다. 희끄무레한 묶음들이 끝없는 동굴의 아가리 속으로 힘없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마도 마늘일 것이 분명한, 바위에 무언가 딱딱한 게 부딪쳐 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재규어는 다른 것들을 던져두어도 좀 좋은가하는 생각을 했다.
다만 속에 걸리는 것은, 누군가 보고 듣기를 곰 부족에서 아껴두던 돼지를 두 마리나 잡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곰 부족이 돼지가 두 마리나 드는 잔치를 벌였다는 말은 정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그 고기를 어디에다 쓰고자 하는가.
그러나 황새는 오로지 쑥과 마늘이 적다는 것에만 안달했다. 그런 황새 앞에서 재규어는 묽은 침을 뱉었다.
꺼지지 않을 것처럼 우쭐거리던 흰 빛의 주문이 점차 짙은 연기처럼 사그라지고 있었다. 재규어는 연기가 흠뻑 밴 둘둘 말린 재규어 가죽을 노려보았다.
슬쩍 곰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쫄쫄 굶기는커녕 곰은 삼칠일동안 저 안에서 고기로 잔치를 열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재규어 옆에 선 곰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싱둥스럽게 흰 빛이 떨어대는 유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빛은 필시 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곰도, 재규어가 무얼 숨기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심지어 재규어의 부족민들도, 황새조차도 모른다. 재규어는 슬깃 피어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흰 빛이 입을 열었다.
-8-
인간이 되고자 하는 딸들아.
사람이 되고자 하는 아들들아.
인간은 무엇이냐, 사람은 무엇인고.
삼칠일 동안 금기를 지킨 이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을지니.
-9-
가끔씩 동굴 안에는 바깥 공기가 들어오는 소리가 우렁우렁하게 울리곤 했다.
바람 소리도 아닌 짐승 소리도 아닌, 그야말로 텅 빈 허공 같은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재규어는 사흘을 떨었다. 쑥이 잘 마르지 않은 탓이다. 생각보다 동굴 안은 더욱 습기 찬 곳이었다. 안개처럼 뿌옇게 덮쳐오는 물방울들을 피해 마른 돌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손이 잔뜩 젖는 탓이었다.
마른 쑥 위에서 꼬실꼬실 연기가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재규어는 또 다시 허기를 느꼈다. 배에서 신호가 올 때마다 재규어는 쓰디쓴 쑥 줄기를 씹는 것으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허기는 이전의 허기와는 달랐다. 맹렬하게 위장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순간 어둠 속에서 한 번 본 적도 없는 고기 조각이 재규어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재규어는 재빨리 손을 뻗어보았다. 그렇지만 이내 고기 조각은 사라졌다. 엄청나게 큰 입이 나타나 그 고기조각을 집어삼켰다. 이빨이 아주 많은 입이었다. 큰 입이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어치우고 혀를 휘두르는 모습을 재규어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을 떴다. 어두운 동굴 벽에는 고기조각을 먹는 입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벽에는 그을음이 섞인 물방울들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는 동안 불이 꺼진 모양이었다. 눈에 어둠이 익을 동안 재규어는 잠자코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어둠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이내 손을 더듬어 모닥불을 찾던 재규어는 잠자코 더듬던 손을 멈추고 한참 숨을 가라앉혀야 했다.
자신이 불을 피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불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굴 입구에서 곰과 헤어진 이후 재규어는 깨달았다. 재규어의 동굴 쪽은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어디를 가나 동굴 한 구석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쑥과 마늘이 있어야 할 곳에 더듬더듬 다다랐을 때 재규어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기로 동굴 안을 비춰보았다. 쑥과 마늘은 곰팡이로 잔뜩 어지럽혀 있었다.
공기의 농담을 통해 재규어는 사흘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재규어가 먹은 거라곤 어쩌다 손에 닿은 박쥐 한 마리뿐이었다. 방금 자신이 보았던 것, 마른 쑥 덤불 사이로 꼬실꼬실 올라오던 연기와 고기 조각, 그리고 거대한 입까지, 그 모든 것들이 굶주림 속에 찾아든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것을 알고 나자 대뜸 재규어는 허리춤에 두른 가죽으로 손을 뻗었다. 가죽 사이를 더듬던 재규어의 앙상마른 손이 곧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단단한 덩어리를 찾아내었다. 빠드러지게 손 한 가득 쥐어드는 그 둥근 차돌의 무게가 익숙해질 때까지 재규어는 그 돌을 한참 들었다 놓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재규어가 가죽 속에 숨겨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차돌을 쑥 줄기에 묶어 곤봉을 만든다. 수없이 적의 두개골을 내리쳤던 바로 그 차돌이다. 차돌을 매만지며 재규어는 자신이 이 동굴에 차돌을 가지고 온 까닭, 곰을 죽이고 고기를 빼앗을 생각이었던, 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나 이어 자신이 곧바로 곰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 역시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인간은 무엇인가.
흰 빛의 말이었다.
흰 빛의 허튼 소리를 들을 작정은 없었다. 차돌로 곰을 쳐 죽이고, 창을 들고 삼칠일이 지날 때까지 동굴 앞을 막고 있을 흰 빛의 부하들 역시 두개골을 아스러뜨리면 그 뿐이다. 그러나 산의 큰 틈 속에서 사흘 이상을 보낸 탓인지 재규어의 안에도 이상스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람은 무엇인가.
재규어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곱씹었다.
흰 빛은 어떻게 부족들을 일컬어 인간이 아니노라 단언 지을 수 있었을까. 흰 빛은 분명 우리와 다르다. 흰 빛이 휘두르는 무기와 엇비슷한 것조차 재규어는 일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부족은 겁쟁이가 아니다. 비록 잠깐은 놀라 달아났을지언정, 차라리 모두가 덤불처럼 죽고 말지언정 전사로서 죽을 것이지 비참하게 흙을 쌓는 노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흰 빛은 말했다.
자신은 하늘이 내린 ‘인간’이고 너희는 짐승이노라. 그리고 나는 너희를 인간으로 만들 권능을 가졌다.
부족에 입이 가벼운 자들은 흰 빛이 불사의 몸을 가졌다고 떠들어댈 때마다 재규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재규어는 흰 빛의 눈을 보았다. 그 어린 눈동자와, 흰 빛의 껍데기, 풍뎅이의 반질반질한 껍데기 같은 그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흰 빛의 어린 볼을 보았다. 흰 빛도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흰 빛을 우리와 다르게 만들었을까.
곤봉의 매듭을 지으며 재규어는 주술사로서 알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정글에 숨쉬는 다른 것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야기 속에서 토끼는 신령의 주문을 받아 재규어를 나무등걸에 묶어 죽이고 뱀의 꼬리를 자른다. 도마뱀은 악어를 속이고 악어는 진흙 속에서 도마뱀이 은혜를 갚아올 날만을 기다린다. 별을 사랑하던 재규어는 하나하나 별을 몸에 박아 무늬를 삼는다. 앵무새는 처녀를 사랑하여 노래를 만들고 휘파람새는 자신이 사랑한 꿩을 위해 그 노래를 훔친다. 노래하는 나비를 질투한 까닭에 신령은 나비에게서 노래를 빼앗는다.
신령은 말했다.
아아, 그럼에도 나비들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재규어는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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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재규어는 다시 눈을 떴다. 신화 속의 마물들이 일체 재규어를 노려보았다. 날개가 달린 비단구렁이, 비늘에 덮인 재규어, 인간의 몸을 한 물돼지, 머리가 일곱 달린 카이만, 그리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괴물들이 눈을 뜬 재규어를 덮쳐들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나 놀랍게도 재규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른팔에 묶은 곤봉을 휘둘렀다.
차돌이 매섭게 동굴을 후려쳤다.
벽에서 불꽃이 튀었다. 온갖 저주의 말을 남기며 괴물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재규어는 새삼 어둠 속에 홀로 남아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쑥줄기를 동여 맨 팔목이 얼얼했다.
그리고 재규어는 깨달았다.
이 동굴을 달아나는 것은 곰이 아닌 재규어 자신이다.
그리고 배가 휘청하도록 간절하던 냄새, 어디선가 동굴을 타고 흘러들어온 그을린 냄새를 재규어는 놓치지 않았다. 재규어는 침을 삼켰다.
눈앞에 흔들리고 있는 불똥이 환상인지 또는 실제인지 아무런 의심도 않은 채 재규어는 불똥을 향해 조금씩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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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은 재규어의 혼령이 다가온 줄로만 알았다.
곰은 재규어를 보는 순간 겁을 먹은 것을 들키면 혼령에게 몸을 빼앗긴다는 주술사의 말을 떠올렸다. 비록 자신은 혼령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지만 저처럼 살아있는 모습과 닮았을 줄은 몰랐다고, 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곰이 건네는 고기를 마다하며 재규어는 모닥불 곁에 앉았다.
무섭도록 앙상푸르게 마른 재규어의 몸을 바라보며 곰은 실깃 몸을 떨었다. 불에 보이는 재규어의 왼쪽 반신은 해골에 가까웠다. 그리고 괴이하게도 그 해골과 닮은 몸에서는 여태 자신이 겪어온 그 어떤 주술사도 범접할 수 없는 신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규어의 혼령이 강한 신이 되었구나. 곰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재규어의 혼령이 찾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곰을 원망한 탓에 곰에게 저주를 씌우기 위해서, 아니면 곰에게 놀라운 지혜 또는 마법을 주기 위해서. 곰은 설령 그 어느 일이라도 동요를 보이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럼에도 재규어가 입을 열었을 때 곰이 소스라치게 놀란 까닭은 혼령의 그것을 닮은 재규어의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났지?”
재규어의 달뜬 눈이 곰을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곰은 자신도 모르게 얼른 날짜를 되뇌어 보았다.
“삼칠일이 나흘 남았네.”
“나흘?”
재규어는 한참 속으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곰은 숨을 죽였다.
“보름동안.”
재규어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곰은 놓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보름동안 악마랑 싸웠구나.”
곰은 순간 온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에서 느껴지는 소름이었다. 어린 독사가 발가락을 간질이는 것처럼, 독을 품은 전갈이 발 등위를 타고 온 것처럼, 재규어의 한 마디는 곰의 온 몸을 더듬고 올라왔다.
곰의 몸이 먼저 알았다. 그래서 곰은 재규어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박쥐가 달꽃을 찾듯, 신뱀이 불덩이를 찾듯 내게 깃드는 까닭이 무엇이오, 재규어의 혼령이여.”
곰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새삼 감출 생각도 없었다.
“곰이여, 아둔패기야.”
재규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이 무엇인가.”
곰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은 무엇인고.”
곰의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내가 말해주겠노라, 이리 가까이오라. 곰의 아들이여.”
바람이 불었다. 불길이 일렁였다. 순간 동굴의 어둠이 재규어를 슬몃 핥고 지나갔다. 곰은 자신도 모르게, 재규어를 향해 몸을 뻗었다. 가까이에서 본 재규어는 더욱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재규어는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곰은 재규어의 입에서 나올 모든 한 마디가 새삼 살아있는 지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곰이 재규어의 입으로 귀를 가져다대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살모사처럼 박차고 나온 재규어의 오른쪽 반신, 그 팔 끝에 매달린 곤봉이 있는 힘껏 곰의 골통을 내리쳤다.
-12-
골에서 솟아나오는 피를 훔치며 곰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도 휘청였을 뿐 곰은 다시 손을 더듬어 쓰러지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재규어에게 육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곰은 오히려 이 일격이 통쾌하기까지 했다.
‘내가 속았구나.’
곰은 아찔한 머리를 들어 재규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재규어는 오른팔에 축 늘어뜨린 곤봉을 흔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치지 않는가.”
다행히 골은 깨지지 않은 듯 했다. 곰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왼쪽 눈이 피에 스며들기 전에 곰은 재규어의 얼굴에서 흰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웃고 있구나.’
곰은 통렬하게 울부짖었다. 동굴이 그의 목소리를 와랑 되받았다.
“나를 조롱하는가!”
이어 곰은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재규어의 곤봉이 날아들기를 기다렸다.
“말해주겠노라,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
무언가가 곰의 감긴 눈에 와 닿았다. 재규어의 손이었다.
“인간은······.”
곰의 눈 주위를 닦아주며 입술을 달싹이던 재규어의 무릎이 꺾인 것은 순간이었다. 엉겁결에 곰은 축 처진 재규어의 몸을 안아들었다. 앙상한 몸 그대로의 무게였다. 곰은 문득 이 것이 인간의 무게인가, 생각했다.
남는 것이다.
남아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인간이다. 잊혀서 스러지지 않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다. 동물이라 할지라도 이야기 속의 동물들은 이야기 속에 남아 인간이 된다. 말을 하고 사랑을 하고 고민을 하고 서로 속이고 서로 울부짖는다. 인간에 남는 순간 그것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이 말은 반대로 인간이 아닌 것은 사라진다. 네 허리에 두른 가죽을 보아라. 그것이 살아 무엇이건 그것은 결국 가죽이다. 그것이 가죽의 이야기가 된다면 그것은 이야기 속에 남은 어떤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라 할지라도 죽어 먹혀 사라진다면 인간이 아니다. 손에 움켜쥐면 뭉치는 검은 흙에 지나지 않다.
재규어는 안간힘을 다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먹먹한 동굴의 어둠 같은 것이 재규어의 눈꺼풀 아래를 덮어 들어갔다. 재규어가 올려다보던 세상이 갑자기 벌겋게 물든 까닭은 곰의 눈꺼풀에서 떨어져 내린 피 때문이리라.
-13-
원숭이가 지독하게도 우짖는 밤이었다. 그믐밤이 찾아들었다. 시끌벅적한 모닥불들이 동굴 입구에 모여들었다. 부족들은 동굴 앞에 선연한 흰 빛 앞에 모여들었다. 부족들을 등지고 흰 빛은 동굴을 바라보았다.
원숭이가 더욱 서글프게 울음을 토해냈다. 아마 새끼원숭이가 재규어에게 잡아먹힌 모양이라고 둘러앉은 부족들 사이에서 두런두런 말이 돌았다. 흰 빛의 졸개 중 하나가 눈을 부라렸다. 부족 사이에서 다시 침묵이 돌았다.
오히려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동굴에서 그림자가 나왔을 때, 부족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흰 빛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흰 빛이 곰에게 물었다. 삼칠일을 동굴에서 보냈지만 곰의 체구는 여전했다. 다만 곰의 이마에 상처는 웬일인지 모르겠다고 곰의 부족 쪽에서는 수군수군 말이 돌았다. 저 체구가 한 줌 빛없는 동굴에 들어갔으니, 이마를 받은 게 아니겠냐는 말이 돌았다.
재규어의 부족은 말을 잃었다. 흰 빛의 부하들이 몰아놓은 짐승을 둘러싸듯 재규어의 부족을 빙 둘러쌌다.
“사람은 무엇인고.”
흰 빛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곰은 불쑥 흰 빛이 서 있는 흙무덤 위로 올라왔다.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굳게 닫힌 입에서는 한 줄기 공기조차 샐 틈이 없어보였다.
“말하라, 인간은 무엇인가. 곰의 아들이여.”
흰 빛이 곰을 재촉했다. 흰 빛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흰 빛의 부하 몇 명이 슬그머니 곰의 부족 쪽으로 향했다. 흰 빛에 둘러싸인 채 두 부족은 옹송그레 떨고 있었다.
곰이 채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곰의 손이 호를 그리며 흰 빛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힘으로 내려친다면 바위라 할지라도 성치 않을 터였다. 게다가 곰의 손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차돌까지 뿌듯이 쥐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경악스럽게도 흰 빛의 머리는 멀쩡했다. 그러나 곰의 손이 거듭 흰 빛의 머리를 내려치자 그 껍데기가 깨어지면서 누런 골이 새어나왔다.
흰 빛은 허무한 빛을 뿜으며 모닥불로 굴러 떨어졌다. 자글자글 골이 타는 냄새가 휙 풍겼다. 흰 빛의 졸개들이 죽는 방법은 제각기 다양했다. 도망가던 이들은 곧 부족 장정들의 건장한 갈색 근육에 붙들렸다. 저항하던 이들도 있었다. 곰은 담담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희한한 것은 처음에는 불빛을 먹어 영롱하게 그들을 감싸던 그 빛이 그들의 머리가 깨어지고 그들의 몸을 싸고 있던 껍데기가 휘면서 사라져갔다는 것이다.
“살아남았구나.”
피와 골이 묻은 차돌을 내던지며 곰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사람이다.”
-14-
원숭이 우짖는 소리가 정글을 메우는 밤, 흰 빛과 그의 졸개들의 시체들을 놓고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재규어는 어찌되었소.”
황새가 물었다.
“그는 달아났소.”
곰이 답하였다.
“채 삼칠일을 버티지 못하고.”
-15-
동굴을 나온 곰이 사람이 된 이야기는 강 상류의 부족들 사이에서 유명한 전설이다. 이 전설들의 상세한 내용은 각기 다르나 대부분의 내용에서는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들 퉁구스 계열의 부족들은 해안가 쪽에서 유입된 청동기 문화를 거부하고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부족의 상당수가 아직도 자신의 선조를 곰으로 보고 있다.
-M. Harri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