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글이 우리를 대신한다면

by 엽서시

펠릭시아 드폰 세뷔엥 자작 부인께


안녕하십니까.

달빛은 지붕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질기고도 촘촘한 빛은 마치 애인의 방에 오르기 위해 남자가 준비한 그물 사다리처럼 온 도시의 밤을 엮습니다. 가지마다 꽃이 자욱해질수록 농염해지는 밤의 향기에 자작나무마저 외로운 가지를 흔들며 별빛을 꾀고 있습니다. 신께서 엮으신 지상 만물이 저마다의 짝에 입을 맞추는 이 사랑스러운 밤, 어찌하여 저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귀여운 숙녀들의 살굿빛 볼에 입을 맞추는 대신 골방에 촛불 하나로 달빛을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부인, 세뷔엥 자작이 주최한 무도회에서 저는 부인을 처음 뵈었습니다. 부인께서는 부인의 아름다움을 마치 공작이 제 깃털을 대하듯 당연히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 오만할 정도의 아찔함에 저 역시 넋을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부인을 보고서야 이 지상 천지에 나고 자란 창조물 중에 신의 숨결이 가장 축복스레 닿은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날 뒤쫓아 벌판을 달리던 무지개의 끝이, 그 색색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곳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뷔엥 자작께서 부인께 저 자신을 소개할 영광을 주셨을 때, 부인. 제 심장은 그제야 제 목적을 찾은 것처럼 다시 뛰었습니다. 그러나 아, 부인.

제가 제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만 부인께서는 타조깃털부채로 그 분홍빛 입을 살짝 가리셨습니다.

그러나 부인,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인께서 제 이름을 비웃으신 것에 대해 그 어떠한 편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신이 저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여자를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음을 깨닫던 그 순간부터 제가 겪고 나가야 할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 부인께 제 이름의 연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제 펜을 들겠습니다. 부인께서도 이제 그만 저 하늘의 끈끈한 달빛도 밤의 짙은 향기도 잊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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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은 1873년 11월 23일 뉘멘베르크의 담화를 통해 전장에 나간 조국의 아들들에게 전장의 상황을 각 가정에 보낼 것을 지침 했다. 총통은 각 군은 전장의 승리를 가정에서 기도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직접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쓰라. 그대가 느낀 것을 그대로 쓰라. 그대가 느낀 우리 힌델 제국의 승리와 미래를 그대로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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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돌 드폰 카르티앙 중위는 펜촉을 놓았다. 가상의 주소가 쓰인 편지지에는 두서없이 써 갈겨댄 괴상한 문장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쓰라’고? 어차피 다 검열할 거면서 무슨 소리야? 난 이놈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단 한 통이라도 인장이 뜯기지 않은 편지를 받는다면 내 월급 전부를 자네, 페리 드 안쵸브 중위에게 줄 것을 맹세하네. 자. 여기 내 조약이 있어. 어서 받게. 페리. 이 내기의 공증인으로는 페리 중위를 세우도록 하고 세 명의 보증인으로는 내 부관인 페리 중위와 내 사관학교 동기인 페리 중위, 그리고 1소대장인 페리 중위를 세우도록 하지.”

렌돌이 흥분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총통의 지침이 떨어지자 대대장은 소대장 이상의 장교들은 지침에 따라 일주일에 적어도 가정에 전장의 상황과 자신의 안녕을 알리는 편지를 보낼 것을 지시했다. 심지어 우편병에게 우편물 목록을 자신의 상황실 앞에 붙여 놓을 것까지 지시했다. 대대장 상황실 앞의 그 목록을 보고 좌절한 것은 렌돌 중위뿐만이 아니었다. 장교들 대부분이 우편병을 협박해 발신 목록만 대충 끄적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딱 한 사람 페리 드 안쵸브 중위만 제외한다면.

“가끔 난 이렇게까지 내가 대대장 비위를 맞춰야 하는지 의문이 들곤 하네. 어차피 난 장교로서의 의무복무기간인 9년만 메우면 되는데 말야. 그것도 이제 5년이 지나갔고. 물론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게 전쟁터긴 하지만 이제 제대할 날도 머지않았단 말이지. 매일매일 파티에 갈 걸세. 방금 전장에서 돌아온 테세우스의 무공담을 기다리는 여성들이 즐비한 파티장 말일세. 주도 대넬리앙 도로에서 조금만 꺾어 들어가면 우리 힌델 제국의 온갖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무도회장들이 즐비해 있지. 내가 우리 백작님(렌돌 중위는 늘 그의 아버지를 ‘백작님’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오늘 밤도 아마 그 곳에서 보내고 있을 텐데. 자네처럼 일찍 결혼한 사람들은 모르는 재미야. 물론 자네가 원한다면 그곳에 같이 데려가 줄 용의는 충분하네만.”

페리 역시 연신 잉크를 찍어 편지지에 글을 적어내려가기에 바빴다. 렌돌의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동기이자 상사인 랜돌이 페리의 막사까지 찾아와 불평을 해대는 일은 한 두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랜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페리는 편지지를 들어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듯이 편지지를 다시 훑어보던 페리는 편지지를 렌돌에게 건넸다.

“어디 한번 읽어보게.”

“그럼. 세상에. 이 한 쪽을 쓰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단 말인가? 어디보자. 페리. 오, 나의 가장 충실한 전우이자 사랑하는 동기, 페리 드 안쵸브. 여자들은 이런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이런 문장은 보고서에나 어울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어디 틀린 문장은 없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라니.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됐네.”

렌돌이 건네주는 편지지를 받아 페리는 조심스럽게 봉투에 집어넣었다. 렌돌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뭐, 이제 나도 어서 내 편지를 끝내야겠지. 이 편지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있으니 말일세. 물론 내가 쓴 주소에 배꽃처럼 수줍고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있는지, 다 썩어버린 늙은 오이같이 추한 노파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아니, 어쩌면 이 주소에 사람이 사는 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편지는 반송되지 않더군. 편지 안의 내용만 긍정적이라면 군 우편국 놈들은 어디라도 보내주는 모양이야. 물론 편지야 꾸준히 반송되겠지만 그게 내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렇지만 난 굴복하지 않는다, 이 악당놈들아. 난 끊임없이 반송시키고 반송시켜서 내 편지속에 네 놈들이 질식하게 만들 것이란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편지 내용은 말야······.”



부인, 잘 지내고 있소? 그대의 염려대로 나는 잘 지내고 있소.

포연으로 인해 전장은 황토 빛으로 물들어 있소. 그렇지만 총통의 지침에 따라 우리 병사들은 열심히 싸우고 있소. 아무런 반격도 없으리라곤 예상되지 않지만 이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소.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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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위를 느낄 때마다 고향의 농장을 생각하오. 부인이 담그는 능금주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꿈속에서 그리오. 그러나 이 곳에서는 달콤한 기억에 젖어 있을 틈이 없소. 장교로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 낼 제국의 미래에 젖어있을 뿐이오. 열심히 싸우겠소. 부인도 열심히 농장을 경영하길 바라오. 그럼 이만 편지를 줄이리다. 총통이 허락하신 승리를 가지고 고향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싣는 그날까지 안녕하길 바라오. 페리 드 안쵸브 보냄. 세상에나, 부인······.”

엘렌 드 퓌비에, 피비라고도 불리는 밤색 머리의 처녀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가 읽어주는 편지를 읽고 있던 ‘부인’, 방 연희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뜨개질을 하는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마치 신의 말이 있고 세상이 태어난 이래 꾸준히 해온 듯이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그러니 피비가 편지를 읽는 동안 부인의 손이 멈추어 있었다는 걸 눈치챈 것은 어항 속의 작은 금붕어 밖에는 없었다. 부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금붕어도 우아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다시 어항 속을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부인, 어쩜 이렇게 용맹할 수가 있을까요. 정말, 정말이지 용맹한 사람이에요. ‘고향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싣는 그날까지’······. 세상에나.”

한 번 읽은 것으로도 편지를 외우기라도 한 것처럼 피비는 눈을 감은 채 편지를 낭송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페리’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피비가 그렇게 ‘페리’를 흉내 낼 때면 부인의 손도 잠시 멎곤 했다.

부인이 이웃의 피비에게 산처럼 쌓아 둔 편지를 가지고 온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부인은 글을 읽지는 못했지만, 편지에 쓰인 자신의 이름과 남편 페리의 이름은 알 수 있었다. 부인이 편지를 받아온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그 편지를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기까지는 큰 용기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피비라는 처녀는 앞서 말했듯 밤색 머리와 밤색 눈을 가진 상냥한 처녀였다. 항상 붉게 달아올라있는 뺨을 가진 이 처녀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영지를 가진 작은 귀족 집안의 영애였다. 피비의 어머니는 피비가 어렸을 적, 폐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아내를 잃고 나서부터 자유주의자적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한 기욤 드 페뷔에 자작은 자신의 외동딸에게 수가 그림, 신학 등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녀가 자유분방하게 자라나는 것을 원했다.

페뷔에 자작이 자신의 교육방식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것은 피비가 과년한 처녀가 되어 버린 후였다. 그러나 피비는 그러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전혀 혼담이 들어오지 않아도 그녀는 항상 자신만의 기사를 꿈꾸고 있었으며, 페뷔에 자작이 로맨스 소설을 금지한 이후로는 매주 목요일(목요일은 도시에서 레빙 읍내로 마차가 들어오는 날이었다.)마다 읍내에 내려가 서점에서 책을 빌려보곤 했다.

그런고로 피비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평가는 ‘패뷔에 자작님의 골칫덩이’, ‘철모르는 한심한 아가씨’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피비를 꼭 한심한 애 취급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 여인들 역시 피비와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혹시나 귀족인 피비에게 천한 물이 들까 염려한 것이다. 총통제가 수립되고 영지의 대부분이 국영지로 몰수되면서 비록 이전처럼 자작이 마을에 갖던 권위는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자작은 엄연한 마을의 지도자요, 피비는 그의 딸이었다.

어쩌면 수줍은 많은 부인이 이 마을의 골칫덩이 피비 아가씨에게 편지를 부탁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이웃이기도 할뿐더러, 마을의 다른 여인네들과 달리 친구가 없는 피비는 편지를 읽고 소문을 내거나 할 염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참, 아마 부인의 이름을 보고 궁금증이 생긴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몰락한 귀족이라지만 감히 자작의 이웃집에 뻔히 상인의 이름을 달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부인의 아버지인 전 연희는 상인이었다. 그는 주로 밀과 같은 곡식을 다룰 뿐 아니라 레빙 읍내에 작은 제분공장을 두서너 개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그 정도의 재산으로 지금의 그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는 놀랍게도 뛰어난 행운아였다.

한마디로, 시대에 잘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

전 세희는 총독이 일개 연대장에 지나지 않던 시절 그가 주도했던 첫 번째 쿠데타, 일명 ‘맥주집 봉기’로도 불리는 나이덴 봉기를 지지하고 총독에게 투자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비록 총독이 쿠데타에 실패하여 뤼센 섬으로 쫓겨나면서 그의 사업도 대부분을 잃었지만, 총독이 다시 복권하면서 그의 재산은 그의 선대들이 밀가루를 나르면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지금 그는 레빙 읍내 뿐 아니라 알사스 지방의 밀 대부분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며, 밀 뿐만 아니라 철이 풍부한 알사스 지방의 광산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즉 페뷔에 자작의 집과 전 세희의 집이 나란히 이웃해 있는 것은 레빙 읍의 전 세도가와 현 세도가가 나란히 이웃해있는, 굉장히 아이러니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묘한 관계는 이들의 딸들에게까지는 이어지지 않은 모양인지, 그녀들은 서로 페리 중위의 편지를 통해 돈독한 우정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피비는 부인에게 편지를 읽어주는 것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인, 부인의 편지를 써주는 일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부인에게 있어 남편의 소식을 듣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인 셈이다.

“‘저는 잘 있어요. 당신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에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합니다.’까지 썼어요.”

“어머나, 제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너무 직접적인 것 같아서, 전 그저······.”

“에이, 요즘에는 다 이렇게들 써요. 자 그 다음은요?”



저는 잘 있어요. 당신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에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합니다. 당신이 편지에 썼듯이 이곳 알사스의 날씨는 무척이나 덥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올해 밀의 풍작을 예견하셨어요. 알사스의 밀이 보급품으로 쓰인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당신이 드시는 건빵에 이 곳 알사스의 햇빛과 바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래요···(중략)···

···(중략)···당신이 보내주는 편지는 옆집의 엘렌 드 피뷔에 아가씨가 읽어주었어요. 지금 이 편지도 그녀가 대신하여 써 주었습니다. 비록 다른 이의 손을 빌어 종이에 옮겼지만 이 편지에 담긴 제 마음은 물 한 방울 타지 않은 꼬냑보다도 진하다는 걸 믿어주세요.

어서 당신이 마차에 내려 이 곳 알사스의 햇빛 아래 설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승리하십시오.

방 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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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고 난 페리는 눈을 감았다. 이제 눈을 감아도 부인의 얼굴이 선뜻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오히려 절규하는 적의 표정, 부상당한 부하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전장을 잊기 위해 눈을 감았건만, 오히려 전장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페리는 눈을 떴다.

“제기랄. 벌써 편지를 쓸 시간인가.”

텐트의 입구를 걷으며 렌돌이 들어와 페리의 책상에 놓인 편지를 보고 중얼거렸다.

“또 거짓말을 주구장창 늘어놔야겠지. 검열국에서 보고 만족할 내용을 말야. 차라리 다음부터는 검열국에다가 편지를 쓰는 건 어떨까? 물론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 여성 장교가 있을지 누가 알겠어?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희롱 죄로 군 법정에 서겠지. 그러니 난 계속 아무도 없는 주소에 거짓말로 편지를 써야하고 말이야. 오오, 신이시여. 이 렌돌은 군에 있기 전에는 여자에게밖에 거짓말을 하지 않은 정직한 이였으나, 이제는 거짓말밖에 남지 않았나이다.”

연극배우처럼 허공을 노려보며 외치던 렌돌은 편지지를 들고 와 그의 책상에 앉았다. 동시에 페리의 책상에 놓인 편지를 낚아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려주게.”

“금방 읽고 ‘돌려주겠네’. 페리.”

렌돌은 페리의 말투를 흉내 내더니 빠른 속도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세상에. 아니 무슨 편지가 이래. 페리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혹시 자네 부인이 둘이었나? 마치 꼭 편지를 두 사람이 쓴 것 같구먼. 묘사와 꾸밈이 화려한 겉멋이 든 문장과 마치 농부들이나 쓰는 말투 같은 문장이 같이 있어. 특히 마지막 부분도 그렇고, 아, 역시 그랬구만. 누군가가 대필해 준 거였어. 오. 자네 혹시 이 엘렌이란 아가씨 잘 아나?”

“아니.”

렌돌이 페리에게 편지를 건네자 페리는 서둘러 렌돌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으며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지. 혹시 이 세상에서 자네가 알고 있는 여자 얼굴은 ‘방 연희’, 페리 부인 밖에는 없는 건가?”

“아니.”

페리는 잠깐 고민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음. 나의 어머니도 있고, 장모님도 계시지. 그리고 총통의 부인인 하인뒤벨베리아 부인도 알고 있고. 음······. 내 생각엔 자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여자 수도 꽤 될 것 같은데?”

“역시. 페리. 난 자네를 알아 온지 5년이 넘어가지만 자네는 아직도 유머란 걸 모르는구만.”

렌돌은 두 손을 머리 뒤쪽에 얹으며 중얼거렸다. 페리는 조용히 펜을 꺼냈다. 잠시 잉크가 종이에 배길 때까지 종이에 펜을 누르고 있던 페리가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부인, 잘 지내고 있소? 나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소.

전장은 여전히 뿌연 연기로 가득하오. 그러나 전황은 좋소. 안개가 걷힌 도로처럼. 어제는 보급마차가 신선한 빵을 잔뜩 들여왔소. 병사들이 아주 좋아했지. 다들 이전에 있던 건빵을 집어던지고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빵을 먹었다오. 그러나 나는 장교였기 때문에 따로 빵을 받았소.···(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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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곳의 빵이 신선하다 한들 부인이 구워주는 빵에 비할 수 없구려. 특히 레빙 밀로 갓 구워낸 빵은 다른 어떤 먹을 것도 사치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기침 소리가 엘렌의 목소리를 끊었다. 그러자 엘렌은 읽던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걱정스럽다는 듯이 부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거웠다. 얼른 옆에 있는 물수건을 들어 부인의 이마에 얹었다. 물수건에서 한 줄기 물이 누워있는 부인의 얼굴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엘렌은 조심스럽게 흰 손으로 그 물줄기를 닦아주었다. 부인이 조용히 그 손을 잡았다. 부인의 손은 병자의 손에 걸맞게 달아올라있었다.

“엘렌느.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물수건이 아니랍니다.”

부인은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미소대신 터져나온 것은 기침이었다.

“엘렌느. 제발, 제발 계속 편지를 읽어줘요.”

엘렌느는 다시 편지로 눈을 돌렸다.



···(중략)···이처럼 나는 잘 지내고 있다오. 부인.

부인이 그립소. 떠들썩한 레빙 마을의 읍내가 그립소. 나는 이 곳의 분위기를 전해줄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부인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소? 다음 편지에서는 더욱 큰 부인의 웃음소리를 읽을 수 있길 바라오.

페리 드 안쵸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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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자네 「군 규정과 방침」있나? 아니, 자네는 있을 거 같아서.”

렌돌이 막사를 들어서며 외쳤다. 그러나 막사는 텅 비어있었다. 군법 책과 페리는 꼭 찾으면 없지. 랜돌은 투덜거리면서 페리의 책상으로 향했다. 역시나 페리의 책상에는 손때가 묻은 군법 책이 일렬로 꽂혀 있었다. 아마 중위 이상의 계급 중에 군법 책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가지고 다니는 건 페리 밖에는 없을 거야. 군법 책을 펼친 랜돌은 다시 한 번 페리에게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정독하기도 힘들 정도로 조악한 군법 책의 지면 공백에는 빽빽하게 페리의 손으로 군법 사례 등이 적혀있었다. 이러니 사관학교 차석 졸업생이 아니겠어. 랜돌은 혀를 찼다. 그때 누군가가 막사로 들어섰다.

규격화된 발소리, 페리였다. 랜돌은 군법책을 손에 든 채 뒤돌아 페리를 맞았다.

“이게 누구신가, 우리 사관학교의 자랑, 페리 아닌가.”

“랜돌.”

랜돌의 이름을 말하며 페리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랜돌은 페리의 그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페리는 단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랜돌은 페리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군법 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군법 책을 빌리러 왔을 뿐이야. 알다시피 자네밖에 없는 책이지.”

“그래. 사관학교에서부터 지겹도록 봐온 책이야.”

오늘 무슨 일이 있는게로구만. 페리. 랜돌은 군법 책을 내려놓았다. 순간 랜돌의 미간이 구겨졌다. 오. 제기랄.

“페리. 설마, 오. 페리. 설마.”

괴성을 내지르며 랜돌은 페리의 어깨를 쥐었다. 랜돌의 손가락이 군복을 파고들어 페리의 어깨를 아프게 짓눌렀지만 페리는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처럼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애완동물 공동묘지 작전」에 지원한 게야. 자네, 정말. 정말 그건.”

랜돌은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미친 짓이네.”

“그렇지 않아. 연대장 지시 하에 대대장이 다시 작전을 수정했네.”

“대대장이! 전공에 미친 그 미친 늙은이가!”

랜돌은 고함을 질렀다. 막사 밖으로 들려나가서는 안되는 소리다. 페리가 조용히 검지를 입에 갔다댔지만 랜돌은 그 손가락마저 뿌리쳐 버렸다.

“닥쳐! 그 미친 늙은이가, 윗대가리들에게 잘 보이는 것에만 혈안이 된 그 미친 늙은이가! 그 작전은 자살 행위야, 페리. 자네도 잘 알고 있어. 아니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겠지. 네놈은 잘난 차석 졸업생이니까. 이 따위!”

랜돌은 페리의 책상에 놓인 군법 책을 집어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 따위 군법을 잘 알아서 어디에 써. 오, 페리. 내 친구. 살아남아야 해. 이 전쟁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전공을 세우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뿐이야. 좋은 군인은 전쟁에서 살아남는 군인이야. 좋은 소대장은 부하를 많이 살리는 소대장이고. 할 수 만 있다면 자기도 살아있으면 더욱 좋은 거고. 그런데 지금 자네는.”

랜돌이 다시 페리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자네는 지금 죽으려하고 있어. 그 미친 작전은 살아남는 데에도,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도 아무 쓸모없는 작전이야.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대대장도 취소했을 그런 작전이라고.”

페리가 조용히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는 랜돌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군법책을 집어 들었다.

“자네도 내 책은 보았겠지.”

“그래. 페리. 그 책은······.”

“4년 동안. 사관학교에 있는 4년 동안.”

“······.”

“끊임없이 그 책을 보았지. 휴일이면 자네들이 사관학교 담을 넘고 바깥에 나가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는 동안. 나는 홀로 기숙사에서 그 책을 보고 있었어. 자네가 본 것처럼 밑줄을 치고 사례를 찾아 옆에 주석을 달았네.”

“페리·····.”

“결국 차석 졸업을 했어. 비록 수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족하네. 그렇지만······.”

페리는 몸을 떨고 있었다. 랜돌은 그런 페리를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당황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자네를 결코 무시하는 건 아냐. 그렇지만 차석졸업이니 뭐니 해도 결국 나 역시 자네와 같은 야전 부대에 이렇게 흙먼지를 맡으며 서 있네. 게다가 자네 동기임에도, 그리고 자네보다 훈장도 더 받았지만 계급도 낮지. 이건······. 이 것도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일세. 달리기나 철봉 같은 것처럼.”

“알고 있네······. 페리 그렇지만······.”

페리가 차갑게 랜돌의 말을 끊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어쩌면 속으로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네만. 내 장인은 상인이야. 귀족도 아닐 뿐더러 어쩌다 운이 좋아 벼락부자가 된 인물이지. 물론 지금 여기에서 내 장인을 욕할 생각은 없네만. 그리고 충분히 장인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장인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그나마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그래서 그의 딸에게 매주 편지를 쓰고. 충실한 남편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자네는 모르네. 이름 사이에 ‘드폰’이 있는 남작은 모르네. 임관하고 4년 만에 중대장을 단 자네는 모르네. 나는 전공이 필요해. 자네보다 훨씬 많이. 이런 미친 작전이라도, 아니 오히려 이런 미친 작전이니까 지원한거네.”

페리는 오랜만에 아주 말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겠지만. 페리는 마치 취한 것처럼 보였다. 랜돌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다시 입을 열고 무언가 말하려던 페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페리는 막사를 박차고 나갔다.

랜돌은 그 페리의 입 모양이,

‘미안하네’

를 말하려 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랜돌은 다시 페리의 책상에 손을 얹었다. 군법 책을 집어든 후 외투 안에 손을 넣었다. 랜돌이 페리의 막사를 찾아온 또 다른 이유를 떠올리기까지는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랜돌은 외투에서 봉인이 뜯어져 있는 편지봉투를 꺼냈다. 검열국의 도장이 찍혀있었다. 페리의 부인에게서 온 그 편지를 페리의 책상에 올려놓고 랜돌은 막사를 나섰다.



잘 지내고 있으신가요? 저는 여느 때처럼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요사이 읍내를 중심으로 지독한 폐렴이 돌고 있긴 하지만 제 걱정은 마세요. 혹 병이 옮을까 읍내로 내려가지를 못하니 집 안에 먹을 것이라곤 갓 구운 빵 밖에는 없네요. 재미있게도 당신께서 빵 이야기를 해주셔서 하는 말이니 신경 쓰지는 마세요. 엘렌도 요새 읍내에 내려가지 못해 많이 심심한 모양입니다.

···(중략)···

그럼 잘 지내시길 기도할게요. 이번 편지에는 당신께서 바라셨듯 제 웃음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리길 바라겠습니다.

방 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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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돌은 눈을 감았다. 그게 페리의 마지막 모습인 줄 알았더라면. 그때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아니,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했을 텐데. 차라리 페리의 뺨이라도 쳤다면. 서로 쥐고 뜯고 싸웠더라면. 아니, 싸웠어야 했다. 그렇게 싸워서 군사 재판에 오른다면 페리는 그 작전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텅 빈 페리의 막사에 혼자 앉아있는 일은 없었겠지. 그렇게 페리를 보냈다니. 처음보는 페리의 모습이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천하의 랜돌 답지 않게.

랜돌은 다시 한 번 페리의 책상에 손가락을 얹었다.

톡. 톡. 톡톡. 톡톡.

손가락으로 페리의 책상을 건드리던 랜돌의 시선이 책상 한 구석에서 멎었다.

봉인이 뜯긴 편지 세 통. 봉투 위에는 검열국의 편지가 찍혀있지 않았다. 랜돌은 떨리는 손으로 그 봉투 안의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절규했다.

페리의 전사 통보서. 모두 자신이 서명한 페리의 전사 통보서였다.

“개자식들!”

랜돌은 헐떡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들! 이게 무슨 짓이야! 페리는, 페리는 죽었어. 페리는······.”

검열국이 도장을 찍지 않았다. 아마 페리의 부인은 지금도 페리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 대신 도착했어야 할 페리의 전사통보서는.

“페리는 뒈졌단 말야!”

지금 페리의 책상에 있었다. 전사를 통보하는 것, 그것도 장교의 죽음을 통보한다는 것이 지금 전장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이겠지? 빌어먹을 총통나리가 생각하신 건가? 아니면 잘난 검열국 나리들이 혼자서 생각해내신 건가? 장교는 매주 편지를 써야 한다고? 편지라니. 매주 병사들의 전사통보서를 쓰기에도 지치는데.

가족에게 쓰는 편지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병사의 전사통보서를 닮아가는 것을 랜달은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 전사통보서들이 정말 병사들의 가정에 도착하는 지도 알 수 없었지만. 더욱 역겨운 것은 각 가정에서 검열국의 도장을 받고 도착한 편지들 역시,

전사통보서를 닮았다는 점이다.

말도 안 되는 안부. 날씨에 대한 이야기. 조국에 대한 신념. 충실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

미친 편지들. 랜돌은 세 통의 편지를 갈가리 찢었다. 그리고 페리의 책상에 놓인 다른 한 통의 편지를 쥐었다. 두 손으로 그 편지를 마저 찢으려는 순간 랜돌은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봉투 안의 편지를 꺼냈다.

아.

페리 부인이 보낸 편지. 엘렌이라는 그 처녀가 대필한 편지.

페리를 놀리기 위해 매 번 뺐었지만 정작 제대로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 그 편지.

그리고.

이 편지를 대필해 보낸 페리 부인은 지금 페리의 집에서 페리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페리는 매주 편지를 한 통, 아니 두 통 씩 보냈으니까. 이 번 주에는 어째서 편지가 오지 않았을까.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지.

랜돌은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눈을 뜬 랜돌은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페리는 언제나 그곳에 깃털 펜과 편지지를 두었다. 랜돌은 역시나 서랍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깃털 펜을 들었다. 그리고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미친 듯이 랜돌의 깃털 펜이 편지지를 훑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략)···

부인. 심장을 뜯는 격통이 나를 휘감고 있소. 미친 듯이 고동치는 이 가슴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매 순간 그대를 떠올리오. 모든 일과가 오로지 그대를 만나고자 하는 이 가슴으로 두근거리는 와중에 흘러가오.

무심한 흙먼지가 흘러갈 때마다. 어딘가에서 외로운 총 소리가 고독한 공기를 찢을 때 마다. 전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포로가 처형될 때마다. 진작 죽은 줄 알았던 부상병이 끝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작전 명령서가 내려올 때마다.

적의 총탄보다도 무서운 이 고통에 나는 항상 몸부림치고 있다오.

오로지 그대를 내 곁에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대가 느끼는 공기과 그대가 느끼는 공간을 내가 함께 나누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 한 모금 숨결조차 그대의 것이거늘.

내 주인이여. 여왕이여. 지배자여.

눈을 감겠소. 차라리 눈을 감겠소. 그대가 없는 공간을 보느니 차라리···(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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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은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훅 하고 흐느낌이 몰아쳤다. 2주 만에 도착한 페리의 편지. 그렇지만 더 이상 이 편지를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되었다. 방 세희. 페리 드 안쵸브 중위의 부인이

폐병으로 죽어 세희 집안의 묘지에 묻힌 지 벌써 열흘이 다 되 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부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페리의 편지가 꼬박꼬박 왔다는 것이다. 부인이 죽고 나서 정말 거짓말처럼, 2주라는 시간동안 편지가 오지 않았다. 처음에 엘렌은 우체국의 사소한 배려인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엘렌은 매일 죽은 부인의 집 앞에서 편지를 기다렸다.

편지를 읽어야 했다.

언제나처럼 페리는 무뚝뚝하게 자신의 안부를 적고, 부인의 안부를 묻고, 작전의 성공을 다짐하겠지. 항상 똑같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인은 한숨을 쉬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며.

그래. 그랬었지.

그렇지만 이 편지는.

마치 부인이 죽은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엘렌은 이토록 살아 날뛰는 편지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들뛰는 야생마를 겨우 고삐로 잡아 진정시킨 것처럼, 감정이 살아 들뛰고 있는 편지였다. 페리는, 그 분은 무언가 느끼신 거야. 분명히.

어쩌면 악몽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전해주었을지도 몰라.

엘렌은 눈을 꾹 감아 눈에 고인 눈물을 흘려보냈다. 엘렌은 한숨을 쉬며 부인의 테이블을 뒤졌다. 그리고 잉크통과 편지지를 떨리는 손으로 찾아 쥐었다. 편지 귀퉁이가 구겨졌지만 엘렌은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눈물이 나왔다. 울고 있었다.

부인이 죽었다는 걸 알면 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맨스 소설에서조차, 그런 통속 소설에서조차 귀부인을 잃은 기사들이 목숨을 끊는데.

하물며 총알과 포탄이 터지는 전장에서야.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난······. 난······.

엘렌이 펜을 꼭 쥐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쓰는지도 모르는 채, 엘렌은 하염없이 울며 펜을 휘둘렀다.



나는 건강해요. 내 사랑도 건강합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살아있고 숨쉬고 있고 당신과 내가 서로 사랑하던 그 집에 있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오. 당신의 절규. 당신은 당신의 눈물이 가득 젖어 있던 편지를 당신의 한숨으로 말려서 내게 보내셨네요. 당신께서는 어쩜 이리 인색하셨는지요. 단 한 방울의 잉크도 쓰지 않으셨으니. 당신께서 당신의 눈물로 편지를 쓰신 것은 제게는 당신이 내 눈물을 바라고 있다는 것처럼 보여요. 그 멀리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제 가슴을 찢어 놓을 수 있는 건지. 당신은 내가 당신의 편지를 보고 놀라 쓰러지기를 바라고 계시는 군요.

당신이 원한다면 전 쓰러질 수 밖에요.

당신을 사랑하는 죄로.

당신의 마음을 절절히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죄로.

저도 당신이 쓰러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썼어요. 총알은 용맹한 당신의 심장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더욱 안심하고 당신이 쓰러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편지에 담긴 제 눈물과 제 한숨과 제 절규가 당신에게 들리기를.···(중략)···

그럼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방 연희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랜돌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 주 내내 랜돌은 지난번 감정에 취해 죽은 페리의 부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빌어먹을 검열국 새끼들이 전사통보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면 그냥 편지도 보내서는 안됐다. 전장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검열국 새끼들이 전사통보를 일괄적으로 보낼 테고. 아무튼 그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그게 페리의 부인에게도 옳은 일이었을 텐데.

아무튼 이 편지는 도통.

알 수가 없는 내용이다. 떨리는 글씨체와 여기저기 번져있는 글자 때문만이 아니었다. ‘날뛰는 암말의 심장을 꺼낸 것처럼’ 편지 안은 거칠게 쿵쾅이는 부인의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엘렌. 이 여자야. 도대체 어떻게 받아적었기에 이런 편지를 적은거야. 아니, 그럴리는 없지만 이 편지만 읽어보면 꼭 당신이 이 편지를 쓴 것 같잖아.

랜돌은 망설였다.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주저하며 페리의 책상에 앉았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답장하자. 이렇게 위험한 상태의 여자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 랜돌. 그게, 그게 기사도라고.



그대의 편지를 잘 보았소. 그대가 내 편지를 보고 놀랐다는 것에 나는 다시 놀랐소. 그대는 내가 예전과 다른 말투로 말하는 것에, 내 사랑을 묘사하는 것에 마치 불에 댄 아이처럼 놀란 것 같았소.

그러나 그대여. 사랑을 말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오직 한 가지라오. 숭어의 비늘이 햇살 아래서는 무지개 빛으로 빛나고 물 안에서는 푸른 은 빛으로 빛나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은 하나를 말하는 다른 방식에 불과하오.

그러나 오직 한 가지로 이야기해야한다면.

그래야 그대가 놀라지 않겠다면.

그럼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소.

사랑하오. 사랑하오. 사랑하오. 사랑하오.

나는 지금 내 가슴에서 쏟아지는 단어들을 묶을 힘조차 없소. 그저 터져 나오는 이 감정들을 늘어놓는 것에도 맥이 빠지오. 겨우 무릎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서 이렇게 당신에게 고백하는 것이오.

장미꽃을 바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그러나 나의 공주여, 비록 장미는 시드는 법이지만 편지에 마른 잉크는 시들지 않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주길 감히 바라겠소.···(중략)···



엘렌은 뛰는 가슴을 내리 앉히기 위해 무단히도 노력해야 했다.

페리는 죽은 내 친구의 남편이야.

하지만······.

어쩜 이토록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을까.

엘렌은 죽은 부인의 거실에 있는 페리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모든 사진들은 부인의 시신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 딱 남아 있는 한 장의 사진.

검은 머리에 흰 피부. 콧등과 볼을 살짝 덮고 있는 주근깨. 가느다란 눈썹. 옅은 회색 눈동자. 얇은 입술과 수염.

엘렌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제도 당신의 사진을 바라보았습니다.

사진으로밖에 당신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어제도 당신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마치 당신이 한 번도 내게 실재하지 않았고, 당신이 이 편지로만 존재했던 것처럼.

그 전쟁터에서, 악마들이 뛰어다니는 전쟁터에서 당신이 잃지 않은 것들이 이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느낍니다. 당신의 사진을 볼 때마다, 당신이 직접 쓴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릴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당신이 적은 것은 글이 아닙니다. 당신이 적은 것은 내 얼굴 위에 흘러내리는 눈물임을 아시는지요. 당신에게서 온 편지가 바로 내 자신의 전부임을 느낍니다.

내 사랑.

내 영혼.

부디 항상 건강하세요.

당신의 편지를 영원히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방 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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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병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부상당한 병사들이 내는 끓는 듯한 신음소리가 피와 고름처럼 막사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렌돌은 부상병들이 누워있는 침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막사라고는 이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는 야전병원 밖에 없었다. 적의 포격이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방으로부터 지원이 거의 끊기고 있는 요즘, 이 야전병원은 부상병들을 치료하기보다는 그저 부상병들이 전사자로 바뀌기 전 잠시 머물다가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무리한 적 방어선 돌파작전이었던 자살 작전, 「애완동물 공동묘지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적은 태도를 완강한 공세로 바꾸었다. 아군의 무리한 작전으로 적들은 아군의 상황을 눈치 챈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아군은 전선을 지켜야했다.

적은 탱크와 포로 사정없이 아군의 방어선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참호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탱크가 뚫는 것을 막기 위해 아군은 열악한 무기로 탱크와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다.

역겨운 썩은 살 냄새가 물씬 풍겼다. 죽은 병사들은 재빨리 군번줄을 회수한 뒤, 막사 뒤의 구덩이에 파묻혔다. 그러나 랜돌은 지금 부상병들 틈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랜돌은 지금 레빙 읍내를 지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해바라기가 무성하게 피어있는 언덕. 그 언덕 위에 있는 방 연희의 집.

마치 페리가 된 것처럼, 랜돌은 눈을 감았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적들의 대공세가 있기 만 하루 전이었다.



이 편지가 그대의 손에 들어갈 수 있기만을 진정 바라오. 적의 대공세가 다가오고 있소. 운명을 향해 걸어오는 거인의 발자국처럼 전장을 두들기는 포의 소리가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참호까지 흔들어 놓고 있소.

나는 거인에 맞서는 양치기의 마음으로 이 편지에 펜촉을 올리고 있소.

내 손에 쥔 돌팔매가 거인의 급소로 향하기를 바라면서.

그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그것은 거의 꿈과 같은 일이지만.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오. 아니,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오.

우리는 지금까지 잘 버텨왔소. 내가 강하기 때문도 아니고, 적이 약하기 때문도 아니오. 오로지 레빙 마을의 향기가 나를 지금까지 일으켜 세우고 있소. 그대의 편지에서 풍기는 레빙 마을의 공기가. 그 공기에 서린 그대의 모습이 나를 지켜주고 있소.

당신이 보고 싶소.

마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

나는 허둥거리며 이 펜촉을 놀리고 있다오. 그대가 내 모습을 본다면 필경 웃겠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전투가 임박한 전장에서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이 우스워 보이오.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군인의 마음, 바로 그 마음으로 그대에게 말하고 있다오.

사랑하오. 나의 심장이여.

그대가 살아있는 한 난 어느 전장에서도 죽지 않을 것을 맹세하오.

사랑하오. 나의 반쪽이여.

그대가 내 아내인 이상 난 어느 전장에서도 승리자임을 잊지 않겠소.

세상에서 가장 큰 입맞춤을 담아 보내오. 미처 봉투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염려하지 않겠소. 검열국이 미리 봉투를 열어놓을 것이니. 그러니 그대도 마음 놓고 답장에 포옹을 실어 보내시오. 내 가슴이 터질지언정, 그 포옹을 놓치지 않으리다.

페리 드 안쵸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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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님,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중대장님,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중대장님,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중대장님······.”

무전병이 미친 듯이 외치고 있었다. 랜돌은 아까부터 같은 말만 반복해서 외쳐대는 무전병의 투구를 권총 손잡이로 내리쳤다. 억, 하고 투구를 잡고 쓰러진 무전병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친 놈.

하고 외치고 싶었다. 무전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적은 탱크가 있다. 105mm 포가 지원하고 있다. 앞에서 조용하면 뒤에 후방에서는 무전을 받아야 할 거 아냐. 그러나 무전은 잠잠하다. 시끄러운 것은 미쳐버린 무전병뿐이다. 랜돌은 차라리 이 참호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참호 위를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참호를 뒤흔들었다. 아군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후방은? 지원은?

탱크는 어떻게 된 거야?

기관총이 긁어대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랜돌은 다행히도 그 기관총이 아군의 기관총 소리라는 것을 식별해낼 수 있었다. 랜돌은 다시 무전병의 투구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주먹으로.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거야!”

“중대장님, 여긴 너무 위험합······.”

귀가 아찔했다. 랜돌이 무어라 외치려는 순간, 온몸을 찢는 진동이 랜돌을 내리쳤다. 무전병이 참호 벽에 내동댕이쳐지는 것과 동시에 랜돌의 몸도 참호 안으로 내리 굴렀다. 흙과 바위가 굴러 내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탱크? 아니면 포?

알 수 없다. 아군의 오사격인지도 모른다.

랜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몸이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 손이 움직였다. 미친 듯이 손이 떨리고 있었다.

포연이 거치면서 적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니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랜돌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랜돌은 주섬주섬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달려오는 적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랜돌은 아무런 반동도 느끼지 못했다.

적들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왼팔의 옷 솔기가 터지더니 랜돌의 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총에 맞았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오른손만으로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총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반동은 느낄 수 없었다.

입을 쩍 벌린 적들이 계속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옆에서 소총으로 응사하고 있던 무전병이 나동그라졌다. 머리가 반쪽이 날아가 있었다.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죽었구나.

이렇게 죽는다는 게.

정말 죽는구나. 이 지옥 같은 전쟁이, 나 까지 잡아 삼켜버리는 구나.

그건 두려움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전쟁터에서 유일하게 떨려오는 느낌이었다. 랜돌은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다시 대포가 터졌다. 어마어마한 떨림과 어마어마한 흙과 어마어마한 바위가 쏟아졌다.

랜돌은 기도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난다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난다면.

한 번도 보지 못한 페리의 부인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따뜻한 기운이 랜돌의 안쪽 어디선가에서 몰려왔다. 무전병의 소총을 집어들어 마구 내갈기면서 랜돌은 생각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난다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난다면.

페리의 부인을 사랑하겠노라. 그녀가 누구든. 그녀가 호박 같은 추녀건. 그녀가 말의 목소리를 가졌건. 그녀가 잠자리에서 더럽게 크게, 기관총처럼 코를 고는 소리를 낸다고 하든. 그녀가 턱수염을 기르고 있든. 그녀가 상인의 딸이라 한들. 아니, 그녀가 페리의 부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전쟁은 랜돌의 귀에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모든 소리와 고통이 돌아오고 있었다. 랜돌도 고함을 질렀다.



살아남았소. 부인.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달려가겠소. 달려가는 것이 느리다면 마차를 타겠소. 마차를 타는 것이 느리다면 기차를 타겠소. 기차를 타는 것이 느리다면 마차를 타겠소. 마차를 타는 것도 느리다면 다시 달려가겠소.

심장이 멎을 때까지 달려가겠소. 한 번도 걸은 적이 없는 길을 걷는 것처럼 이 심장을 몰아 그대에게 달려가겠소. 그대가 기다리고 있는 집. 이 저주받은 전쟁터에서 수없이 편지 봉투 위에 적었던 그 집으로 달려가겠소.

아마 내가 달려가는 것보다 내 심장이 더 먼저 그대에게 달려갈지 모르오

놀라지 않기를 바라겠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이 전쟁도 결국 끝난 것처럼. 그러나 제 기다림은 이 전쟁의 시작보다는 조금 앞에 있고, 이 전쟁의 끝보다는 조금 더 뒤에까지 덮여 있군요. 그렇지만 마음을 졸이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거실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아마 어설픈 뜨개질이 될 거예요. 아마 당신이 본다면 웃으실 정도로 서투른 것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뜨개질은 그만 두겠습니다. 그렇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당신에게 달려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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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5월 23일.

랜돌이 참가했던 뒤센부르그 전투가 끝나고, 8개월 후 유럽을 뒤흔들었던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나고도 삼 일 후.

엘렌은 방 연희, 페리 드 안쵸브 부인의 거실에 앉아있었다. 어딘가 혼이 나간 것처럼 엘렌은 자꾸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엘렌은 달려나갔다.

문을 열자,

밝은 갈색의 피부. 검은 곱슬머리와 밤색의 눈동자를 가진 군인이 서 있었다. 군인의 왼쪽 가슴에는 제대 군인의 훈장이 달려 있었다. 군인의 오른쪽 가슴에는 명찰이 있었지만 엘렌은 미처 그 명찰을 볼 틈도 없이,

군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총통은 1879년 5월 20일 뉘멘베르크에서 담화를 통해 전장의 승리를 자축하였다. 총통은 전장에 나갔던 조국의 아들들에게 조국의 우선적인 배려가 있을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순차적으로 고향에 돌아갈 것이며, 전장에 훌륭한 공을 세운 이들은 우선적으로 제대할 것이다. 또한 미처 공이 부족한 이들은 전후의 처리를 통해 마저 공을 세울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총통은 3년 후 대대적인 혁명, 일명 프랜시아 대혁명으로 불리는 혁명으로 실각했다. 이 혁명을 이끈 세력은 다름 아닌 제대군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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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이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십니까? 오해가 풀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이 둘 사이에 사랑이 싹터버렸지요. 사실 이들이 사랑했던 것은 페리 그 안쵸브 또는 방 세희라는 이름이 아니라 서로에게 편지를 썼던 바로 그, 그리고 그녀였습니다.

엘렌 드 퓌비에는 페리의 검은 머리와 흰 피부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칠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랜돌의 솔직함, 그의 우정, 그의 사랑이었습니다.

랜돌도 마찬가지였지요. 그가 사랑한 것은 방 연희의 재산과 그 가옥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걱정하는 엘렌, 전장을 마치고 돌아갈 유일한 그늘인 엘렌이었습니다.

둘은 혁명 중에 서로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페리와 방이 그랬던 것처럼 이 둘도 한날에 죽는 그 날까지 사랑하기로 맹세했습니다. 혁명이 끝나고 랜돌은 잠깐 정계에도 진출했습니다. 제 입이 아니더라도 부인께서 이미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시민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일했습니다. 명예 백작 칭호를 받기도 했지요. 아이가 태어나자 그 둘은 대넬리앙 도로 근처에서 뤼벵 읍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총통이 실각한 이후 사업 규모를 축소했던 전 세희에게 바로 그 집, 페리와 방이 살았던 그 집으로 말입니다.

부인. 이게 제 이름의 사연입니다.

제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두 사람, 렌돌 드폰 카르티앙 백작과 엘렌 드 퓌비에 백작 부인, 그러니까 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신들의 첫 자식이 아들이건 딸이건 간에 이 이름을 붙이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지나치게 이상한 이름을 설명하는 지나치게 긴 편지가 되었습니다.

부인의 시간을 뺏은 것을 사과드립니다.

다음에 만나 뵐 때는 보다 더 풍성한 만남이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방 페리 드폰 카르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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