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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를 위하여

이성과 행복의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by 엽서시

#파일 1

이 녹취록은 일명 「사피엔스」와 ‘앤드류’ 사이의 녹취 파일이다. 구어체 일부는 원활한 내용 전달을 위해 양측의 동의하에 수정하였다,

앤드류(이하 A로 표기): 오랜만입니다.

사피엔스(이하 S로 표기): 네. 1년 정도 지났나요.

A: S씨는 지난 한 해 가장 주목받는 사회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S씨는 ‘사피엔스(지혜)의 부활’이라는 주제로 많은 이슈를 불러왔습니다. ‘사피엔스 부활 운동’은 일견 극단적으로 수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운동과 차별을 두고 있죠. 특히 일각에서는 진화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냐, 는.

S: 엄밀하게 말해서 그 것은 진화가 아니라….

A: 진화죠.

S: 설령 그것이 진화라고 한들, 모든 진화가 항상 더 뛰어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퇴화 역시 진화의 역방향이 아니라 진화의 한 방향이듯 말입니다.

A: 어쨌거나 결국 인류의 진화를 긍정하시는 거군요.

S: 그러니까..

A: 신석기 혁명은 . 우리가 구인류라고 정의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으로 소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대부분이 정말 개인과 인류 공동의 발전에 유익한 생각이었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 대부분이 생각 그 자체로 소비되곤 했죠. 대부분이 의미 없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일어나기 싫다는 생각, 오늘 아침을 무엇일까 하는 생각. 아침에 씻으면서 오늘 어떻게 회사에 갈지에 대한 생각. 사실 정보화 혁명 이전에는 유의미했을지 몰라도 정보화 혁명을 통해 인류 모두가 공동지성을 소유하게 된 이상 이러한 생각은 무의미한 소비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뇌를 이런 생각으로 소비했죠. 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의 지성체인 인류가 자신의 지성을 그런 한시적인 생각에 소비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에 투자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자신의 뇌를 낭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혁신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S: 합리적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것이 합리적인지는 누가 판단한다는 거죠?

A: ‘인류’입니다.

S: 인류라고 말하지만 사실….

A: ‘모든 정보를 모든 인류에게’라는 슬로건 하에 이루어진 정보혁명은. 이는 공동지성의 탄생이었으며, 이는 인류에게 있어 감히 ‘진화’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발전이었습니다. 일부 아시아 국가는 이러한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치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정보는 소수 권력계층 및 엘리트 계층이 독점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결과 이루어진 ‘아시아의 봄’은 진화의 승리를 인정하고 오히려 널리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일부 내전 중에서 진화를 받아들인 소수의 시민군이 공동지성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고, 그 결과 다수의 정부군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뇌파 분석 결과, 광쩌우 성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사로잡힌 정부군 지휘관이 작전에 대한 ‘판단’이 아닌, 그날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웃음거리가 되었죠.

S: 사실 일종의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일종의 의도적인 왜곡이죠. 지휘관이 저녁 식단을 생각했기 때문에 진 것이 아니라, 이미 질만한 전투였기에 진 것인데….

A: 자, 진화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진화한 소수 시민군들을 막기 위해 군에 진화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진화한 군인들은, 부패한 권력과 군부를 위해 싸우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반군화’된 군에 의해 다른 시민들도 진화되었습니다. 아시아 국가의 높은 진화율을 본 다른 국가들도 서서히 자국 국민들의 진화율을 높이기 시작했죠. 그 결과는 우리가 ‘시민의 시대’라고 부르는 역사의 새 장을 가져왔습니다.

S: 저는 ‘시민의 시대’가 아니라 ‘개인이 없는 공동지성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A: 그 이유를 들어볼까요.

S: 생각이 인간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신인류를 Homo rationalis, 합리적인 인간, 즉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지칭하는 데 이성은 생각에서 비롯하는 겁니다. ‘이성’이라는 개념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는, 르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전능한 악마’ 개념을 통해 설명했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악마가 만들어낸 장난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불변의 진리라고. 앤드류씨는,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쓸데없는 낭비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은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에요. 그리고 사실, 아침에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근길이 막혀서 조금 돌아갈 수는 있지요. 그렇지만 그 덕분에 꽃집 앞을 지나가면서 향기를 맡을 수도 있어요.

A: 구시대의 사상은 구시대의 인물들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든 사상가에게 수명이 있듯이 모든 사상에도 수명이 있습니다. 칸트는 여성은 선천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없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에 이성이 없다고 주장했죠. 사피엔스씨도 그 말이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시나요?

S: 그건.

A: 또한 전제부터 잘못됐어요. 개인이 공동지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지성이 개인을 위한 것이지요. 개인과 개인의 내장에 서식하는 대장균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한 개체로 봐도 무방하죠. 다른 개체가 한 개체의 기능을 돕는 것뿐입니다. 공동지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상 공동지성은 인류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뇌에 불과한 것입니다.

S: 그렇습니다. 공동지성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SF 드라마처럼 그것들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다만, 공동지성은 공동지성일 뿐이죠. 업데이트를 하고 발전을 시킨다한들 그것은 결코 사람일 수 없습니다. 공동지성이 내린 판단 역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없어요. 우리는 그저 공동지성이 내린 판단을 합리적인 판단이라 믿고 있을 뿐입니다. 공동지성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게 더 나은 생각이라는 법은 없죠.

A: 인간의 생각이 더 훌륭하다는 것입니까?

S: 인간의 생각이 더 훌륭하다고 믿습니다.

A: 인간에게 생각이 필수라고 생각하십니까?

S: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죠.

A: 그렇다면 그 생각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S: 잠자리 유충의 목표는 성충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어요. 더 완성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A: 그렇다면?

S: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살 뿐입니다.

#2.

눈을 감는다.

무궁한 하늘이 펼쳐져 있다. 하늘에 아로새겨진 수백, 또는 수천 년 전의 빛들은 빼곡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바람이 습하기 그지없다. 이런 날 동굴은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앉아있던 혈거인(穴居人)이 발밑에 흙을 뿌린다. 새로 매운 구덩이 위에 벌겋게 드러나 있던 흙이 말라가며 천천히 색을 바꾸고 있다. 더 흐리고 슬픈 빛이다. 그가 흙을 뿌리는 것을 멈춘다.

잎사귀들이 비늘처럼 겹겹이 싸고 있는 검은 수풀 사이로 일렁이는 빛들이 보인다. 혈거인이 입 안에 갇혀있던 미개한 숨을 뱉는다.

움집에 사는 자들이다. 어느 날 저들은 메뚜기들처럼 나타났다. 여름의 잎사귀처럼 무성하던 혈거인들은 저들이 쏘아대는 날창과 화살 앞에서 가랑잎처럼 사라졌다. 혈거인들은 저들에 쫓겨 산과 수풀로 달아났다. 그러나 저들은 여전히 혈거인들을 좆았다.

그는 마지막 사냥을 생각한다.

목이 부러진 사슴의 눈동자와 이빨에 닿던 고기의 즙을 생각한다. 그리고 무수히 날아오던 날창들을 생각한다. 그의 어미와 젖먹이 동생이 그날 죽었다. 그는 혈족으로서 그 시체를 거두어 매장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수풀에 숨어 팔꿈치의 상처를 핥으며 그는 움집에 사는 자들이 어미와 동생의 시체를 보고 고함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나무의 그늘 속에서 그는 그들의 고함이 승리의 고함인지 경멸의 고함인지 생각했다.

움집에 사는 자들은 어미와 동생의 시체를 불에 구워 먹었다. 그는 그들이 살을 발라낸 어미와 동생의 뼈를 주워 동굴 앞에 묻었다. 깨진 뼛조각이 손바닥을 찔러 핏방울이 번져나왔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골수까지 말라붙은 어미의 뼛조각을 주워 모으며 그는 이 어미의 뼛조각에서 자신과 동생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혈거인들은 밤을 동굴에서 보내고 해가 뜨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믿었다. 어머니 땅의 몸속으로 들어가 밤을 피하고 다시 나와 어머니의 살 위에서 뛰어다니며 사슴과 토끼와 온갖 털붙이 짐승들을 잡았다. 그루터기에 섞여있는 벌레들을 모았고, 나뭇가지에 알알이 매달린 나무딸기와 작은 열매들을 모았다. 때로는 강가와 계곡에서 작은 조개들을 줍기도 했다.

때로 남자들은 큰 돌을 부쉈다. 절벽에서 던지기도 했고, 다른 큰 돌에 돌을 부딪치기도 했다. 남자들은 돌을 부수며 노래를 불렀다, 산산이 부서지는 돌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그리고 부서진 조각돌들이 쓰임이 많은 모양새가 되기를 노래했다.

날카로운 조각돌들은 우리의 이빨이 되었고, 더욱 강한 주먹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동물들의 뼈를 부수기도 했고, 그들의 이빨을 쓰기도 했다. 죽은 늑대의 이빨이 살아있는 사슴의 동맥을 가르는 것을 보며 우리는 다시 늑대와 사슴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동굴 속에 우리가 죽인 털붙이 동물들을 그리며 그들을 애도했다. 그들도 이 동굴 속에서 다시 태어나 우리와 함께 어머니의 살 위를 뛰어다닐 것을 믿고 노래했다.

영원히 잠이 든 이들의 시체는 다시 어머니의 땅으로 보내야 했다. 그들을 묻고 그 위를 뛰어다니며 노래했다. 우리는 꽃과 같이 한 철을 피면 다른 한 철에 질 것이지만, 다른 한 철이 오면 다시 피어날 것을 믿었다.

그러나 움집에 사는 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굴에 살지 않는다. 그들은 시체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돌로 돌을 깬다. 자연스럽게 조각난 돌에 다시 힘을 더한다. 그렇게 그들은 더욱 많은 날붙이를 구한다. 수없이 많은 날창이 하늘을 가른다. 수없이 많은 털붙이 짐승들이 쓰러진다.

혈거인과 움집에 사는 자들은 같은 어머니에서 나온 자식들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메뚜기처럼 나타난 그들 앞에서 우리는 가랑잎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몇몇 여자들을 살려두기도 했다. 우리가 늑대를 길들였듯, 그녀들을 길들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렁이는 빛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불빛들이 자신을 둘러싼다. 그는 일어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날창이 날아오지만 그는 피하지 않는다. 그는 더욱 단단히 주먹도끼를 틀어쥔다. 움집에 사는 자들이 하나 둘 달려든다. 그들의 키는 그의 가슴팍에도 채 닿지 않는다.

어린아이 같구나. 아직 다 크지 못하고 떼를 쓰는 철부지 아이들.

그가 주먹을 휘두른다. 부서지는 살과 뼈 사이에서 그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창이 허벅다리를 꿰뚫었다. 주먹도끼를 놓치는 대신 그는 옆에 있는 이의 머리를 손아귀로 단단히 감아쥔다. 손가락이 얼굴에 있는 구멍으로 파고든다. 죽어가는 이가 지르는 비명에 질세라 그는 더욱 노래를 크게 부른다.

창이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다. 이크, 거기가 아니지. 그는 창자루를 잡아당긴다. 창을 잡고 있던 이가 넘어지는 것을 잡는다. 그의 손아귀가 그의 목을 감아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살이 뚫리는 소리.

그러나 그 모든 소리를 압도하는 자신의 노랫소리,

속에서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일렁이는 불빛이 자신을 감싼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에서 불빛은 더욱 커지다가 마침내 망망한 어둠으로 변한다. 그 어둠에는 하나의 개똥별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저들이 자신을 매장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혈거인이 죽었다.

살아남은 크로마뇽인들이 숨을 헐떡인다.

마지막 혈거인을 죽였다.

싸움을 이끈 추장이 다가와 혈거인의 시체를 내려본다. 털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마치 짐승의 두개골처럼 골격이 울퉁불퉁하다. 불빛을 받아 허옇게 빛나는 이빨을 보며 추장은 다시 몸을 떤다.

누군가가 고함을 지른다. 날붙이를 쥔 젊은이들이 혈거인의 시체를 자르기 시작한다. 젊은이들은 벌써부터 승리에 취해 있다. 오늘 움집과 움집 사이에는 기쁨의 노래가 가득 할 것이다. 추장은 그 기쁨의 노래 사이에서 울려 퍼질 자신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이 숲 속에는 도깨비들이 가득했다.”

눈을 뜬다.

“96분간의 취침 리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면 시간 중 83% 이상이 Non-Rem단계로 매우 양호한 상태의 취침리듬을 보이고 있으며….”

꿈이구나. 수면 패턴 분석 알람을 끈다.

최 응오 구옌. 구옌은 앤드류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수많은 인터뷰에서 그는 ‘구옌이라는 이름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기자라는 직업이 가지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발음이다.’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명함에는 성도 없이, 앤드류라는 가명만 있다.

앤드류, 기자.

그는 ‘마지막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임종을 맞은 노인, 파산을 앞둔 기업, 정권을 잃은 정당 등 ‘마지막’을 앞둔 인간을 프레임에 담고자 노력했다. 그는 ‘아시아의 봄’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던 중에 시민군에게 사로잡힌 지휘관의 사진은 그야말로 구인류를 상징하는 사진이었고, 곧 그 사진이 구인류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앤드류가 생각하기에, 모든 역사적 사건은 이미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마무리를 지은 것만 같았다. 이미

그리고 그는 결국 그 자신의 걸작을 찍었다.

「마지막 호모 사피엔스」

사진은 흑백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사진처럼. 사진의 중앙에는 거대한 흰색의 덩어리가 눈을 끈다. 그 것은 남자의 나신이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남자의 비곗덩어리는 마치 역사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적이나 바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유적은 결코 인류의 유산일 수 없는 유적이다. 마치 구시대의 형무소나 사형장, 또는 독재자의 거대한 무덤처럼.

무덤. 남자는 비만이다. 21세기에만 존재하던 구인류의 질병.

살은 창백하다. 그러나 건강하지 않다. 시들새들한 새싹. 썩은 그루터기에서 자라는 버섯처럼. 부풀어 파리가 꾀기 시작한 개구리 시체. 썩어가는 생선의 눈에 뿌옇게 번져가는 백태.

남자가 있는 공간은 이와 대조적이다. 순흑의 공간은 자연스럽게 실눈을 뜨게 만든다. 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쌓여있는 것은 쓰레기다. 구겨진 포장지. 음식일지 아니면 죽은 무언가일지 썩어가는 유기물들.

남자는 이쪽을 돌아본다. 남자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다. 당혹감, 놀라움, 수치, 분노. 마치 못된 짓을 들킨 아이처럼.

S가 바로 그 남자다.

공동지성이 없는 인류, 과거로 회귀하자는 S가 일으킨 사회운동은 한 장의 사진에 의해 낱낱이 흩어졌다. S의 모습은 구인류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고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스스로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비만. 질병. 오염. 타락. 그 무엇 하나 막지 못한다. 인간의 이성은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했다. 인간의 역사가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행복.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을 물고늘어질 게 그것 뿐이란 말인가.

그는 행복할까.

마치 짐승처럼.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입고 싶은 것을 입는 것이 행복할까.

불쾌하다. 그렇다면 그 자식은 내가 불행하다는 것일까.

“이봐, 지금 날 분석해봐.”

앤드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직한 여자 목소리가 대꾸를 시작했다.

“최 응오 구옌, 앤드류를 분석하겠습니다. 현재 감정 상태….”

“그런 거 말고. 나의 행복도를 분석해봐.”

“오늘 앤드류님의 행복지수는 91입니다. 지난 1년간 앤드류님의 행복지수는 97이며, 행복의 주된 원인은 성취감과 자아실현으로 인한 고차원적인 행복으로 분석되….”

평균 행복지수는 50이다. 공동지성으로 인한 인류의 승리 이후 인류의 행복지수는 월등하게 높아졌다. 사소한 갈등과 마찰이 행복을 좌지우지 한다. 그에 비하면 앤드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앤드류는 자신의 일에서도 감정에서도 놀라운 성적을 받고 있다. 그는 전세계에서 상위 3%안에 들 정도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아까 만났던 그 사피엔스라는 놈은 어떻지?”

침묵

“뭐야.”

“질문의 뜻을 명확히 해주십시오.”

“그놈이 얼마나 행복한지 물었어.”

침묵. 앤드류는 그 침묵이 불쾌했다. 이 침묵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된다. 마치 구역질나는 쓰레기 속에서 냄새를 풍기며, 나트륨과 트랜스지방으로 범벅된 음식을 집어먹고 있는 인간처럼.

“당신은 그 질문의 답을 알기 원하지 않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난 그놈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고 싶다니까.”

“행동 패턴과 무의식 분석결과, 당신은 그 질문의 답을 알기 원하지 않습니다.”

앤드류는 짜증이 났다.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앤드류는 겨우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나는, 그놈이, 얼마나, 나보다, 행복한지, 알고 싶어.”

침묵.

뭐야. 왜 대답하지 않지? 공동지성이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는 거야? 왜 판단한 거지? 왜 이런 답을 하고 있는 거지? 내 행동 패턴과 무의식을 분석했다고? 그게 뭔 소리야? 이 대답을 듣기라도 하면 내가 불행해진다는 건가? 그 말은….

문득 앤드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새끼가 얼마나 행복하냐고!”

침묵이 찾아들었다. 앤드류의 숨소리.

앤드류는 이것을 알 수 있었다. 분노. 이게 분노구나. 오래된 문학에나 나오는 인간의 감정. 앤드류는 분노라는 감정이 혈압을 비롯한 인간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대로라면 오늘 나는 평균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 축에 끼겠군. 불쾌한 생각.

“그의 행복은….”

더 이상 여자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리지 않았다.

“측정할 수 없습니다(Count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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