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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문명

가장 정의롭고 완벽한 우주 문명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by 엽서시

1.

“우리가 당신들의 문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먼저 공표하는 바입니다.”

지성체 L17의 목소리가 UN본회의장을 울렸다. 옅은 보라색의 피부를 가진 지성체는 별도의 기구 없이도 호흡과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지성체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는 각국의 정상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지성체의 말을 해석하느라 분주하였다.

“우리 문명은 전 우주 최고의 문명을 이룩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행성 최고의 문명을 이룩한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사실을 발표하고,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지성체의 말은 12개의 공용어로 번역되었다. 공용어를 쓰는 국가의 정상들은 지성체의 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공용어를 번역하는 역할을 맡은 통역가들은 지성체의 말이 길어질수록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 그들이 번역하는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우주의 문명체들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우주와 차원의 공간에서 약 12차례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을 참담했으나 우리는 그 결과로 전 우주의 문명체가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인 ‘대의(大義)’에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행성 단위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문명은 아직 안타깝게도 이 최초의 우주 문명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는 정도의 문명을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보다 앞선 문명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올바름의 정신인 ‘대의’를 따르고 있으며 그 대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저질렀던 잘못에 속죄하고자 여러분을 찾았습니다.”

인류가 채 인지하지도 못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문명체가 인류에게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정상들은 일순간 긴장하였다.

“여러분들의 주된 시간 개념을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문명이 ‘17세기’라고 부르는 시간에 우리 문명에 속하는 일군의 전함이 이곳의 항성 에너지를 빌려 함체의 주포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행성 전체에 일종의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 이 행성에서 항성 에너지 부족으로 비롯한 생명체의 손실이 약, …정도 있었으며, 이에 비롯한 문명 간의 전쟁이 …가 있었고, 이에서 비롯한 문명의 손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정도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사과드리며, 그 과거 잘못을 견뎌내고, 문명을 유지해온 여러분들에게 보상을 하고자 합니다.”

17세기 소빙하기에 대한 두꺼운 인쇄물가 정상들의 손에서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는 사람은 적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성체가 들어 보인 것은 작은 USB였다. 정상들은 이것이 하나의 농담인지, 또는 어떤 비유를 뜻하는 것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빼앗아간 에너지로 여러분들의 문명이 약 2세기 가량 뒤처졌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들의 문명 수준에서 약 2세기 정도의 문명을 비약시킬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료를, 이 행성 문명체의 핵심이라 믿을 수 있는 여러분들 모두와 동시에 공유할 것입니다.”

정상들은 지성체 L17의 손에 들린 USB를 바라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USB가 사라지고 1시간가량 휴식시간이 있었다. 정상들은 자신들이 건네받은 자료와 동맹국이 건네받은 자료가 모두 일치하는지, 서로 눈치껏 살피는 와중에 저마다 본국의 각 부처와 연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실제로 다시 각국 정상들이 회의실에 모두 착석하기까지는 예정되었던 회의 시작 시간이 2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외계문명과의 만남은 인류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할 선물이오. UN사무총장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 모든 국가에 게 공정하게 알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중국 서기장이었다.

“예, 저희는 저들과 연락하게 된 이후, 모든 국가에게 공평하게…….”

“우리 공안국이 장님으로 보이시오?”

중국 측 대표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중국 인민을 대표하는 주석은 공안국을 통해 지성체들의 우주선이 최초로 착륙한 곳이 카자흐스탄의 어느 숲이라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는 미국 정보부 직원의 메일 주소를 통해 서버를 해킹한 끝에 얻어낸 것이었다. 중국 공안국은 이 정보를 자신들이 알게 된 순서가 첫 번째는커녕, 수차례 뒤로 밀려난 사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장님은 아니지만 그들이 다른 국가의 정보를 훔치는 기생충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정상들은 방금 목소리의 주인이 미국 부통령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강경파로 유명한 미 대통령에 비해 그는 평소 온건파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그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이른바 미국과 대립하는 세력에도 외교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온건함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국 정보부 직원의 메일이 감염된 경로를 파악한 결과, 그 범인은 MIT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계 대학원생으로 밝혀졌다. 부통령은 대통령이 있는 자리에서 32세의 ‘우’의 신상정보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우’는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배후를 밝혔다. ‘우’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그는 텍사스에 위치한 한 교도소의 정신병동으로 수감될 예정이었다. ‘우’를 통해 중국 공안국에 정보를 넘긴 중국인 스파이는 생포를 거부하고 자살하였다. 그가 당긴 방아쇠를 끝으로 미국에 남은 중국의 끄나풀을 찾고자 하는 정보부의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어쨌거나 지성체들과 제일 먼저 소통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지성체들의 모선이 카자흐스탄에 최초 착륙한지 6시간 만에 그들과 최초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고무되었다. 미국 측은 지성체들에게 뉴욕에 위치한 UN본부야말로 인류 문명을 대표할 수 있는 단체임을 설득하기 위해 지난 일주일간 부단히 노력하였다. 실제로 각국 정상들에게 이 사실이 전달된 것은 이틀 전이었다.

각국 정상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지성체 L17이 남기고 간 USB가 업로드를 마쳤다는 신호로 불빛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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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후로 벌어진 것들은, 단편소설과 같았고, 대하소설 같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또 영화 같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건들은 뉴스 같았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한두 줄로 듣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볼리비아의 국민들이, 뉴스에 따르면 84%가 넘는 국민들이 원인모를 바이러스에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다. 뉴스에서 말하는 관계자에 따르면 바이러스들은 ‘공항의 입국 심사대 직원보다도’ 정확하게 볼리비아의 국민들만을 의식불명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현지 뉴스에 따르면 이 바이러스에 걸려 죽은 시체는 부패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화면에는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아랍에서 일어난 분쟁은 보다 분명했다. 뉴스 화면에 나타난 것은 하얗게 빛나는 얼음판 같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하얗게, 빛나는 얼음판. 사막의 모래가 녹아 생긴 것이었다. 나는 한 때 ‘쿠웨이트였던’ 그 얼음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동남아시아에서도 분쟁이 있었다.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실험이 있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필리핀 어느 섬의 군벌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무기로 정부군들을 죽이고, 그런 무기를 만드는 법을 유튜브를 통해 공유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에서 분쟁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인도는 ‘브라흐마흐스트라’라는 이름의 신무기를 국경에 배치했다고 선전했으며, 중국 공산당은 신형전차 ‘치우(蚩尤)’를 배치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식이었다.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한 군벌이 새로운 무기를 통해 정규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하였다. 그 군벌은 유튜브를 통해 이 신무기 제조법을 공유했고, 동시다발적인 게릴라전을 통해 교전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지식들이, 유튜브와 구글, SNS를 통해 공유되었다. 지식의 출처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 지식이 가진 절대적인 힘이었다. 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조직은 히잡을 쓴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신형 폭탄을 조립하는 영상을 올렸다. 그 신형 폭탄이 에이브람스 전차를 말 그대로 ‘녹여버리는’ 영상과 함께. 당신도 자하드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영상이 끝나기 전 마지막 자막이었다. 드디어 인류는 국경, 인종, 성별을 초월하여 모두가 평등하게 강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식칼을 쥔 어린이집의 아이들 같았다. 도취와 염려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지만-. 남용과 절제는 자석의 양극과 같아서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갔다. 신림동에서 새로운 방식의 마약과 그 제조 장치를 발견한 경찰이 일대 주택가를 수색하였고-따위의 뉴스는 귀로 흘려버리면서 내일도 어제와 같은 하루가 되기를 그저 소망하면서.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서울에 사는 나와 같은 사람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었다. 창문 밖에는 하얀 빛이 나는 구체가 있었다. 그 구체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커지는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언가 폭음 같은 것이 멀리서 들렸다. 창문 밖의 구체는 이제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고, 나는 창문 아래로 엎드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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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덜컹. 트럭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아, 싯팔. 누군가가 작게 읊조렸다. 지명을 비롯한 몇 사람들은 욕설이 들린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누렇게 탈색한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예비군이 철모를 뒤집어썼다. 호로대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철모 쓰라니까.’

지명은 속으로 생각했다. 작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의 예비군들은 지명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트럭이 요동칠 때마다 그들도 함께 흔들렸다. 군대 훈련에서는, 언제나 발령되던, 나중에는 정겹기까지 하던 ‘화스트 페이스’는 발령되지 않았다. 시작부터 ‘카크드 피스톨’이었다.

서울에 신무기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 핵무기가 아니었다. 신무기였다. 서울로 가는 모든 도로가 폐쇄되었다. 서울의 상황이 보도되는 것은 통제되었다. 유튜브에는 온갖, 추측을 담은 영상이나, 일부,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듯한, 그런 영상이 올라왔다. 병력동원소집날, 소속 부대로 가는 길에 지명은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핸드폰으로 ‘신무기’를 검색해보았다.

서울의 도로나 시설은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신무기가 ‘사람’만 골라서 ‘증발’시켰다는 말도 있었다. 심지어 거리의 가로수와, 비둘기들도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먼저 “대한민국을 공격한 어떠한 세력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보복할 것”이며 또한 “허위정보에 대한 모든 의혹을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서울이 공격받고 일주일 후, 병력동원소집이 있었다. 전방에서는 이미 교전 중이라고 했다. 지명은 군복을 꺼내 입었다.

덜컹. 트럭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지명은 물끄러미 호로 밖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여기가 원산이란 말이지. 다시 한 번 코웃음이 나왔다. 원산이라니. 말 그대로 ‘북진(北進)’ 중이었다. 서울 침공 이후 북한은 “서울에 대한 원인불상의 공격의 주체는 우리 공화국이 아니며, 이에 대한 남조선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민족의 평화를 파괴하려는 수작”임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사실 아무 쓸모없는 주장이었다. UN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했다. 사실상, 세계3차대전이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누가 누구를 돕고, 누구의 편을 들 수 없었다.

밖은 허허벌판이었다. 원래 북한이 이런 것인지, 아니면 국군의 공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간혹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가 보였고, 게딱지처럼 납작한 기와집들이 굴곡진 언덕의 그림자 밑에 엎드려 있곤 했다.

“싯팔, 야, 운전 좀 똑바로 안 해?”

다시 호로대에 머리를 부딪친 노란 머리의 예비군이 이번에는 고함을 질렀다. 다른 예비군들도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서로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펑, 무언가가 가까운 곳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명은 재빨리 적재함 밖으로 뛰어내렸다. 사태를 파악한 예비군들도 적재함 밖으로 튀어 나왔다.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에 들린 M16소총을 겨누는 것도 무의미해보였다. 지명이 탄 바로 앞의 트럭은 화염에 휩싸인 채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싯팔……. 좆 됐네.”
누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하늘에서 눈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것들은 비행접시였다. 비행접시의 밑바닥에는 붉은 별과 함께 '조선공화국'이라는 다섯 글자가 익숙한 글씨체체로 적혀있었다.


4.

지구 위의 마지막 유기체가 ‘숨을 거두었다’. 어떤 단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원인은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퍼트린 바이러스였다. ‘누군가’라고 쓴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바이러스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준 지식을 이용하면, 새롭게 바이러스를 창조하고 바이러스에 목적을 입력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악의가 아니었을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이 멸망하고, 누군가가 조금 더 사냥을 쉽게 하겠다는 생각에 만든 바이러스였는지 모른다.

‘인간이 아닌 유기체를 살해하라’는 목적을 가진 바이러스는 인간이 사라진 이후에도 한참을 번성했다. 바이러스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진화시켜나갔다. 가장 최후까지 지구에 남아있었던 유기체는 식물도 아닌, 균사체, 즉 버섯이었다. 축축한 습기가 남아있던 콘크리트 더미의 그늘에서, 마지막으로 버섯이 흩날린 포자는 무의미하게 시멘트 바닥에 내려앉았다. 아무런 의미 없이,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 포자들을 태워버렸다.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에 미친 재앙과 관계없이 태양은 계속 빛과 열을 내뿜었다. 하여 공기의 대류와 해수의 순환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이 행성에 더 이상 그 어떤 생명의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눈치 채고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그 작은 움직임의 정체는 뉴욕 UN본부 대회의장에 지성체 L17이 남기고 간 USB였다. 그것이 빨간 불빛을 몇 번 깜박였다. 그 불빛은 어딘가로 신호를 발신한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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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주선의 차창 밖에서 행성은 온통 보라색으로 보였다. 유기체의 흔적이었다. 예전과 달리, 행성의 유기체들을 행성 표면에서 그대로 유기물로 바꾸는 작업을 먼저 수행했기 때문이다. 행성에 뿌려진 작은 기계들이 스스로를 재생산해가며, 행성 표면에 흩어진 유기체들을 유기물로 바꾸었다. 누구는 이런 작업을 “밭을 통째로 슈퍼마켓으로 바꾸는 일”로 비유했다. 기계의 작업을 거친 유기물들은 푸른 빛이 감도는 보라색이었는데, 그래서 이 작업이 끝난 행성은, 작은 과일처럼 보였다. 이후 유기물들은 인력광선에 의해 채취되어 수송선에 적재되었다.

물론 행성의 유기체를 채취하는 행위는 ‘대의(大義)’가 정하는 기준에 의한 것이어야 했다. 특정 수준 이상의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거나, 행성의 유기체들이 자멸을 택했을 경우 등 기준은 까다로웠다.

“보석 같군.”

지성체 A32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디바이드는 지성체의 의사 표시를 인지했다는 의미로 붉은 빛을 깜박였다.

-보석보다 유용합니다. 저 행성은 합법적인 유기물로 가득하며, 이 우주상에서 합법적으로 채취가 가능한 유기물은 무기물인 보석보다 귀중합니다.

“그럼.”

지성체 A32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은하의 가장자리에서 발견한 이 행성에서 채취한 유기물은 연료로 가공되어 다른 은하에 위치한 지성체들의 모성(母星)으로 옮겨질 것이다. 이미 행성 자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된 모성은 이번 발견을 통해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디바이드는 이 행성의 발견으로 모성의 수명이 약 1억 3천만년 가량 연장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긴 시간이지만, 길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광활한 우주에서 합법적으로 유기물을 채취할 수 있는 행성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들이 스스로 택한 결말이겠지만, 저 유기체들도 어쩌면 우리처럼 문명을 누릴 수 있었을 생명체라고 생각하면.”

지성체 A32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의 순수한 이성으로는 특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한 문명이 그 다음 단계이 이르기 전에 스스로 붕괴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행운은 곧 누군가의 불행이 아닌가 싶군,”

디바이드가 그의 말에 붉은 빛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누군가의 불행은 다른 누구의 행운이 되는 법입니다. 우주 전체를 고려하면, 행복의 총량 역시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겠군, 지성체 A32는 속으로 생각했다. 행성의 전체 유기물 중 50% 이상이 채취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제 생체 리듬을 유지하기 위한 휴식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디바이드는 지성체 A32가 휴식없이 오랫동안 지적 활동에 몰두했음을 간접적으로 경고했다. 지성체 A32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면 프로그램 가동을 승인했다. 눈을 감고 수면에 빠지면서 지성체 A32는, 그가 우주의 여느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완벽한 문명을 누릴 수 있는 생명체로 태어난 것은 참 행운이라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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