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저는 무엇인가
수저에 대한 얘기가 냄비처럼 들끓다가 가라앉았다.
수저는 도구다. 동양인을 쌀을 뜨겁게 쪄서 밥을 짓는다. 그 밥과 뜨거운 국물을 먹는데 밥과 국을 떠먹기 위해 수저라는 도구가 생겼다. 『시경』에도 수저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 동양인은 누구나 수저로 밥을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의 수저는 청동으로 만든 것이었다. 지배계급의 도구였을 것이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수저는 이어 놋쇠로, 백동으로, 은으로 바뀐다. 서양에서는 이 은수저가 부(富)의 상징이 되니,‘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은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 다는 말과 같이 쓰였다.
오늘날 우리는 수저를 가지고 한바탕 다투었다.
은수저 위에는 금수저가 있었고, 그 위에는 다이아수저가 있었다. 은수저 밑에는 동수저가 있고 그 밑에는 흙수저가 있었다. 흙수저는 한동안 우리를 지칭하던 ‘서민’이라는 말보다 적나라하고 자조적인 말이다. 그러나 누구는 흙수저가 되기 위해 다투었다. 심지어 국회의원 후보자가 스스로 흙수저라 부르는 일도 있었다. 진짜 흙수저를 가리는 일은 금을 가리는 일보다 난해했다. 화장실에 비데가 있으면 될 수 없고, 바닥이 장판이 아니면 될 수 없었다. 흙수저라 하면 빚이 있어야 했고, 가족 중 누구 하나가 아파야했고, 학비를 내지 못한 경험이 있어야만 했다.
누가 내게 너는 무슨 수저냐고 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무슨 수저인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가난하니 금수저도 은수저는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해보면 흙수저라 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다. 아마 나의 수저는 식당에서 보이는 스테인리스, 아니, 스뎅일 것이다. 때로는 천박하게까지 들리는 말이 진실에 가까운 법인데 스뎅도 그 중 하나다.
스뎅은 말 그대로 녹이 슬지 않는다. 공장에서 찍어내니 가격도 싸다. 스뎅끼리 있으면 제법 반짝이는 게 보기에 께름칙할 일은 없다. 그러나 은수저 옆에만 있어도 금방 그 싼 티가 난다.
훈련소에서 나는 수저도 포크도 아닌 스뎅으로 된 식기 하나를 받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포카락이라 불렀다. 그것은 사람도 군인도 아닌 우리와도 같은 처지였던 셈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를 감시하는 도구였다. 훈련생에게 젓가락을 쥐어주면 자해를 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찌르기도 하니 아예 삼킬 수도 누군가를 찌르지도 못하게 포카락을 준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들 스물이 넘은 장정들이었지만 젓가락을 쓰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 포카락으로 밥과 국을 떠먹고 김치를 찢어먹고 반찬을 갈라먹었다.
포카락은 훈련생 한 명에게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감히 잊어버리면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 볼 수도 없을만큼 자명한 것이었다.
다른 훈련소 기억은 가물하지만 이 포카락만이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각개전투 때의 일이다. 우리는 땀과 빗물에 젖어 7월의 논산 흙바닥을 박박 기어 다녀야 했다. 국가가 2년 동안 우리에게 준 군복은 단 두 벌 뿐이기에, 이런 훈련을 할 때에는 CS복이라는 것을 따로 주었다. 이 CS복은 군복 중에서도 낡고 낡아 말 그대로 옷의 노릇만 할 뿐, 몸에 걸치고 겉에서 보면 피부가 드러나지 않는다 뿐이다. 빛은 허옇게 바래고 주머니와 실밥이 다 터지고 찢긴 옷을 입고 우리는 빛이 바래도록 바닥을 기어 다녔다.
각개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중대에서도 가장 끝 번호로, 교관의 말에 따라 악, 외치고 바닥을 기었다. 그때 훈련장 여기저기에서 무언가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바로 포카락이었다. 나보다 앞선 동기들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포카락이었는데, 내가 돌아다니며 주운 것이 네 개였다. 적어도 네 명의 동기는 그날 수저없이 주린 배를 채웠을 것이다.
아마 내가 쥔 수저도 그 때의 포카락과 같을 것이다.
오늘 밥을 먹지만, 그 뿐이다. 잃어버리면 남은 건 맨 손 뿐이다.
나는 오늘 수저를 쥐고 밥을 먹었다. 그러나 이 사실에 감사해야하는지, 감사하다면 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 알 수 없다. 내일도 수저로 밥을 떠먹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