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라보는 나

긴 밤과 긴 낮

by 엽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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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끔 잠이 들지 않는 밤에

나는 뒤집어진 벌레처럼

등에 바닥을 대고 발랑 누운 채

들숨과 날숨으로 긴 밤을 샌다

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아침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버티는 것인지

허비하는 것인지 버리는 것인지

남들이 하나씩 무엇을 이루고

(예를 들면 번듯하거나 또는 건실한 직장이라거나…)

남들이 하나씩 무엇이 되어

(예를 들면 대리가 된다거나 누구의 남편 또는 아버지와 같은)

나가고 있는데

나는 발랑 뒤집어진 채 벌레가 되어

눈물도 나지 않는 눈으로 또 긴 밤을 샌다

버틴다 버린다


<2>

미륵이 내게 말했다

너는 전생에 길에 버려진 늙은 개였다

지나는 길손들의 발목을 물고 늘어진 죄로

너는 발목이 잡힌 채로 이번 생을 살아야 한다

어린 날 빈 교실에 남아

친구들이 하하호호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것을

햇볕이 누렇게 바래 교실 귀퉁이를 채우다 사라지는 것을

하루가 뉘엿뉘엿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나머지 공부를 하던 기억을 전생처럼 추억한다

내 발목을 물고 있는 나의 주둥이를 쥐었다가

물끄러미, 내려놓고 바라다 본다

나는 그저 나의 잔등을 몇 번 쓸어낸다 비듬처럼 날리는 개털

이번 생의 작은 파편들이 흩어진다 어디론가 귀퉁이로 사라진다

누런 햇볕이 귀퉁이를 채우는 사무실

인조가죽의 모퉁이가 갈라진 낡은 의자 위에 앉아

긴 낮을 새며,

나를 바라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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