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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서시 Nov 08. 2022

이규보의 경설에 부치다: 신경설(新鏡說)

거울과 사진에 대하여

  임금의 화상을 어진(御眞)이라 한다. 이때의 ‘진’은 참을 뜻하는 글자로, 사진(寫眞)의 ‘진’도 이 글자를 쓴다. ‘사’는 베끼고 본뜨는 것을 의미하니 ‘사진’은 참 것을 베끼고 본떠 그대로 옮겨놓은 것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 사람을 그리는 것을 ‘사(寫)’라 하였는데, 그 원칙은 전신사조(傳神寫照)였다. 이때의 ‘사’는 앞서 말한 베끼고 본뜬다는 의미의 글자이고, ‘조(照)’는 사물의 모습을 뜻한다. 따라서 ‘전신사조’는 사물의 모습을 베끼어, 마침내는 그 속의 정신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하여 일호일발(一毫一髮)이라 하였으니, 머리카락 하나 털 오라기 하나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성종실록』에서는 이르기를, ‘사람이 부모를 그릴 때에 털 오라기 하나라도 닮지 않거든 그것은 부모의 그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털 오라기를 그릇되게 그리고자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고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꺼린다. 하여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자신의 모습을 곱게 보이기를 좋아하지, 추하게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림은 사람보다 오래 남아 그 모습을 전하는 도구다. 그러니 털 오라기를 그릇되게 그리고자 하는 마음이 이는 것이다.

  명 태조(太祖)주원장은 대머리에 얼굴이 얽고 코가 뒤집어졌으며, 턱이 주걱처럼 나왔다. 태조가 자신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손문종(孫文宗)이 이를 맡아 그리기를, 태조의 얼굴과 꼭 같이 그렸다. 그러자 태조는 심히 불쾌해하였다. 뒤이어 심희원(沈希遠)이 태조의 화상을 그렸는데, 그는 아름다운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자 태조는 역시 불쾌해하였다. 이어 진원(陳遠)이 태조의 화상을 맡아 그렸는데, 그 얼굴의 윤곽은 태조의 것으로 하되, 그 얼굴은 아름답게 맞추어 고쳤다. 그러자 태조는 크게 만족해하며 진원에게 문연각(文淵閣: 명나라 황실의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벼슬을 내렸다.   

  옛 희랍에 안치고누사(安治古縷史:Antigonus)라는 왕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왼쪽 눈을 잃은 애꾸였다. 어느 날 왕이 자신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화공이 그 왼쪽 눈을 잃은 것과 얼굴의 흉터를 고스란히 그려내자 큰 벌을 내렸다. 다음 화공은 그 왼쪽 눈을 온전하게 그리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 그렸다. 그러나 왕은 “이것은 과인의 얼굴이 아니다.”라며 크게 성을 내고 벌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아파루래사(亞波蔞萊史:Apalles)라는 이가 찾아와, 왕의 얼굴을 그렸는데, 왕의 성한 오른쪽 얼굴만 그려 왕에게 바쳤다. 그러자 왕은 “이것은 성한 얼굴이며, 또 과인의 얼굴이다.”라며 기뻐하였다.

  명 태조와 안치고누사 모두 곱게 꾸미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벌인 일이나, 전신사조의 뜻에서 옳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안치고누사는 절반의 얼굴인 오른쪽 얼굴이라도 전하게 되었으나 태조는 끝내 자신의 얼굴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안치고누사보다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내 일전에 전주(全州)에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본 일이 있었는데, 오른쪽 눈썹 위에 작은 혹이 남아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태조의 어진은 임신년(1872년)에 따라 그린 것인데, 어찌 이 혹이 남아 있는가. 처음 태조를 그린 화공에서부터 어진을 옮겨 그린 화공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얼굴을 그릴 때에도 일호일발의 뜻을 어기지 않은 덕이다. 화공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으나, 내 이 작은 혹을 통해 생각하게 된 바가 많았다.

  오늘날 사진의 기술이 널리 쓰여 이른바 갑남을녀도 자신의 얼굴을 사진으로 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자신의 얼굴을 곱게 담는 것에만 치중하여 사진을 업으로 삼는 이들조차 얼굴을 바꾸는 것을 제 기술로 알고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심지어는 제 얼굴과 다른 얼굴을 제 얼굴로 여기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제 얼굴이 아니라 꺼리는 사람도 있게 되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쏘냐!

  이규보가 「경설」에서 이르기를, “거울이 맑고 깨끗하면 잘생긴 사람은 기뻐하지만, 못생긴 사람은 꺼린다. 그러나 (세상에) 생긴 사람이 적고, 못생긴 사람이 많으며, 못생긴 사람이 거울을 보면 (성내어) 깨뜨려 없애고자 할 것이니,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먼지가 낀 희미한 거울이 더 낫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의 옳음이여!

  내 사진첩을 보니, 나 또한 얼굴의 못난 점을 덮고 다른 얼굴처럼 보이게 하려 드는 구석이 많았다. 내가 만들어낸 다른 얼굴을 나의 진실된 얼굴로 믿는다면, 나의 진실된 얼굴은 누구의 얼굴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퇴계(退溪)께서 이르시기를, 거울은 제 얼굴이 곱고 예쁜 것을 알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똑똑히 알고 돌이켜 보기 위함이라 하셨다. 그 깨달음이 커지게 되면, 성현의 말씀과 자연도 저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하셨으니, 세상 만물이 곧 자신의 거울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는 법을 알기 시작하였으니, 하물며 그 경지는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  

  스스로 경계하고자 이 글을 지어 남긴다.

     

임인년 적다.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명 태조 주원장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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