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소설

조국을 위하여

자신이 자유대한민국의 히어로라 믿는 이들을 위하여

by 엽서시

#1, #3

선생은, 목울대가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손에 힘을 주었지만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목을 찌르는 통증이 격했다. 머리의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두피와 두개골 사이의 핏줄에서 꽉 막힌 피들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집중해야 한다. 선생은 속으로, 다짐했다. 목을 죄는 힘은 여전했다. 그 순간 선생은 씁쓸하게 웃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끝나는가.

선생은 느낄 수 있었다. 목을 죄는 손가락이 살을 파고드는 것을.

선생의 목울대를 쥔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손마디가 보이지 않도록 깊게 파고든 손가락에 담긴 힘이 하나로 고이는 것을, 선생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손이 무언가를 움켜쥔다. 목청, 성대, 핏줄, 아니, 선생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손은 멈추지 않았다. 손은 기계처럼 묵묵히 손아귀에 든 것들을 뜯어냈다.

그리하여 고통은 짧고도 아득했다. 피가 튀었다. 선생은 처음으로 자신의 손이 무력하게 허공을 더듬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와 흐릿한 것과 무력이 범벅된 시야 속에서 미스터리는 헛헛함을 느꼈다. 헛헛하다. 이런 것이로구나. 끝이라는 것을.

선생은 그렇게 운명하였다.



#2

속칭 ‘선생’은, 일부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겉으로는 마뜩찮아 하지 않는 이들마저도 속으로 긍정하듯,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다시 나올 수 없는 불세출의 영웅이며, 민족의 등불이며, 조국의 자존심이요, 그 역사인 인물이지만,

그 시작은 지극히 평범했다.

일부는 선생께서 태어나던 날, 삼태성이 하늘의 그 어떤 별보다도 환히 빛났다고 하며, 누구는 아니다, 그날은 새벽별, 그러니까 금성이 어쩐 일로 해가 지기 전부터 환히 빛나더니, 그날 새벽까지 지지 않았다는 믿기 힘든 황당무계한 말을 지껄이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의 탄생에 신화나 전설과 같은 일화를 자꾸 덧붙이려 드는 것은 현대의 영웅인 선생에게 하는 대우로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선생을 헐뜯고자 하는 자들에게 미끼를 주는 것에 지나지 않다.

나는 언젠가 선생의 삶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TV로 방영되는 꿈을 꾼다. 비록 지금은 선생을 헐뜯는 무리들이 많지만 언젠가 역사는 반드시 선생의 참된 뜻을 전하리라. 그리고 대중들은 이해할 것이다. 드라마 한 화, 한 화가 거듭될수록 시청자들은 선생의 영웅적인 삶에 빠져들리라.

왜냐하면 그는, 참된 대한민국의 영웅이었으며,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영웅인 동시에

자기희생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조선에는 영웅이 나지 않았다. 누구는 그 이유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혈맥에 철봉을 박아넣었기 때문이라 하고 또 어느 누구는 병자호란 때, 만주족들이 태백산 깊은 곳에 오줌을 누고 달아났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전설 같은 일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선에는 영웅이 나지 않았다. 하여 20세기, 근대화된 무기와 초인적인 영웅들을 앞세우고 나타난 세력 앞에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1910년,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1923년 식민지의 폐허에서 태어난 선생은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모른 채 청년으로 자라났다. 다케다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한 지극히 평범했던 이 청년은 1941년, 만주에서 자신에게 깃든 영웅의 힘을 깨닫게 됐다.

그 역사적인 출발이 있었던 도시는 충칭이라는, 어찌 보면 한반도와 지극히 멀리 떨어진 중국의 도시였다. 그 곳에는 중국 공산당원들이 종종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칭에서 다케다, 아니 선생이 비로소 영웅으로 거듭났음을 알아야 한다. 영웅의 힘.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며 결코 패배를 모르는 그 영웅의 힘. 한동안 조선에 맥이 끊겼던 그 힘은 외국의 군대로 끌려간 한 식민지 청년에게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힘은 저 먼 외계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세계 최고의 대국인 미국의 영웅, 슈퍼맨이 그러하듯.

무튼 다케다, 선생은 충칭에서 있었던 한 작은 전투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그 다음 전투에서도 선생은 살아 남았다. 그 다음 전투에서도. 그리고 이러한 생환이 반복되면서 다케다는 자신이야말로, 어쩌면 죽지 않는 불사신, 그러니까, 이른바 영웅의 힘을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실제로 선생은, 훗날 충칭에 있었던 일본 공군의 소이탄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화염으로 가득한 건물 속에서도 혼자 살아남았으며, 중국인 민병대에 둘러싸인 속에서도 그들을 무참히 처치하고 무사히 부대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하여 대동아제국 최고의 언론 중 하나이던 만주일보에는, 내선(內鮮)을 잇는 위대한 야마토의 혼, 이라는 작은 토막기사 아래 선생을 소개하는 기사와 함께 선생의 신상내용이 짤막하게 실리기도 하였으나,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이쯤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1942년, 선생은 일본으로 향한다. 어찌된 일인지 선생은 이때 다시 민간인의 신분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아마 선생 자신이 택한 길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다짜고짜 일본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작은 선박 회사를 차리게 된다.

먼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선생은 충칭에서 있었던 경험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그날 자신은 세계를 뒤흔드는 힘이 무엇인지 보았노라고.

어쩌면 우리는 선생이 일본군에 자원한 것도 이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선생이 대한민국의 힘 그 자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선생은 힘에 끌렸다. 충칭에서 선생은 일본의 힘을 보았고, 그 힘의 원천을 알고자 일본으로 향했다.

아, 이 얼마나 힘든, 열아홉 청년이 택하기에 얼마나 가혹한 가시밭길이었는가.

그러나 선생의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의 회고록을 보면, 선생은 처음 일본땅을 밟던 순간을,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순간 앞으로 조국과 민족만을 위해 살고 있는 내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고 회상한다.

선박회사에서 시작한 선생의 사업은 부지불식간에 커져간다. 선생은 군수업 쪽에 투자를 시작하였으며. 일본인 동업자들과 함께 사업에 대해 공부하고 경영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1945년 무렵 선생은 그 도시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사업자 중 한 사람이었으나,

여름 어느 날 밤, 미군 항공기가 퍼부어대는 네이팜탄으로 선생은 자신의 공장과 재산을 날리고 알거지가 된다. 시련은 약자를 주저앉힌다. 그러나 영웅에게 시련은 밧줄과 같다. 그 밧줄을 잡고 보다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날 자신의 불타는 공장을 보며 선생은 충칭에서 전투를 떠올린다.

그 순간의 감정을 선생은 이렇게 회상했다.

‘온 몸이 터지도록 열심히 달려온 사람에게 길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 순간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땅을 바라보며 한 숨을 쉴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우연히도 나는 그 순간 하늘을 보았다. 그 곳에는 미국의 폭격기가 아직도 하늘을 활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일본이라는 힘을 넘어서는 또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게 충격이었으며, 또 다른 도약의 시작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재산이 불타는 그 날, 선생은 자신이 ‘뛰는 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놈’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패망한 일본에서 선생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계를 살려 낸 선생은 이번에는 생필품을 팔며 재기를 노렸다. 선생은 직원들과 함께 직접 리어카를 끌며 선생의 공장에서 만들어낸 비누와 세제 따위를 팔기도 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배고픔을 모르는 것은, 호랑이가 제 이빨과 발톱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부정하고 그 원인을 외부로 찾지 마십시오. 젊은이의 고통은 운명입니다. 번데기의 등을 찢는 아픔이 있어야 애벌레가 나비로 태어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009년 선생께서 대학생들에게 했던 연설 속에는 선생의 젊은 날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이다.

흔히 선생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1945년부터 9년간의 시간이 선생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한다. 이때 선생은 자신의 첫사랑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첫사랑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숨겨진 것이 많다. 다만 우리는 항상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선생보다 5,6살이 많아보였다는 측근들의 회고에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따라서 많은 전기작가들은 그녀의 나이를 20대 중후반으로 추정한다.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일부 몰지각한 기자들은 그녀의 이름은 미치코(道者)요, 선생과 교제할 당시 26살의 나이였으며, 선생과 결혼할 뜻까지 밝혔었으나, 결국 선생이 그녀의 몸만 취한 후 소문이 날까 저어하여 뒷골목의 세력으로 그녀를 살해하였다는,

참으로 듣기 아찔한 소문을 날조하기도 했다.

그러한 소문이 잡지에 범벅이 되기도 하였으나, 사실 그녀에 대한 선생의 마음은 참으로 애틋했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문학에도 능통하였던 선생은 술에 취하면 고에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여인인 ‘샤롯데’에 자신의 첫사랑을 비유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

선생이 조국, 대한민국의 땅을 다시 밟은 것은 1954년의 일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폐허와 잿더미뿐이었다. 1950년 천인공노할 북한의 비열한 기습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간 이어졌고, 아직 대한민국은 그 전쟁의 여파를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잿더미의 대한민국을 일으키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한 명의 기업인을 초청한다. 일본에서 성공한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던, 그렇다, 바로 선생이었다. 이에 대해 또 일부 시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진의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

선생이 죽기 전 까지 늘 그러하였듯, 선생은 늙지 않는 화안용모로도 유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선생을 부른 것이 조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불로(不老)의 비밀을 얻기 위한 개인적 초빙이 아니었나, 일부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의 일화를 알게되면, 그러한 의문은 사라지고 만다.

부산으로 도착한 선생은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선생의 눈에는 그야말로 참혹한, 조국의 폐허가 펼쳐졌으리라. 분기탱천한 눈물을 씹으며 서울에 도착한 선생은 서투른 한국어로 제계인사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어느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선생은, 또 다른 한 명의 영웅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선생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예언을 하게 되니, 이것이 선생의 일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 뭐 그러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바로,

“선생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영웅이요, 앞으로 대한민국을 덮칠 위험은 선생만이 막을 수 있는 것이네.”

선생은 평생 이 말을 믿었다. 선생은 자신이 특별한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그 한 마디가 선생에게 특별함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오오, 영웅이여.

한 평생을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살아온 영웅의 날갯짓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생의 장년기는 대한민국의 청년기와 일치한다. 선생은 늘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언제나 늘 노련한 장년의 감각으로 기업과 조국을 이끌었다. 알다시피, 선생은 미국이 인정한 아시아의 영웅 중 한 사람이며 한국인 최초의 영웅이다. 선생은 1991년 9월 17일, 대한민국의 UN가입과 동시에 UN에서 인정한 피스 앤 저스티스 리그에 정식으로 등록된다. 선생은 눈물을 흘렸다. 아직도 선생은 UN에 등록된 대한민국의 유일한 영웅이다.

아아, 선생이 영웅이 되기 위하여 선생이 내린 결단은 곧 구국의 결단이었다.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의 구국의 결단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것으로 유명하다. 치부를 원치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소박한 재산이 선생의 품 속에서 그나마 대통령의 품위에 걸맞는 재단으로 거듭났음은 물론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는 그 순간에도 선생은 함께 그 분의 최후를 지켜봤으며, 김재규 중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그 순간, 시바스리갈 병을 들고 있던 것이 바로 선생이었다고 한다. 총성이 울리기가 무섭게 선생은 양주병을 집어던져 김재규 중장을 체포하는 데 혁혁한 공을 거두었으나, 그 현장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음을 부정하였다.

선생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선생은 눈을 감을 때마다 그러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얼마나 많은 ‘종북세력’들이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같지도 않은 시도를 해왔던가.

그럴 때 마다 선생은 늘 함께 있었다. 때로 선생은 미 대사관 방화사건 때에도 선생은 직접 대학생들이 던지는 화염을 뒤집어쓰고 들어가, 그들을 직접 체포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학생들이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고 노조를 결성한다 했을 때에도, 선생은 그들을 직접 불러와 심문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이.

참으로 사실이 아니겠지만,

죽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앞서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았듯, 선생은 고난과 시련이, 슬픔과 좌절이 영웅을 만든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좌절할 일도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 책상을 탁 치니 다른 누군가가 억 하고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좌절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었다.

물론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자리에서도 선생은 태극기를 두른 채 앞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월남의 하늘 아래, 선생은 맹호부대에서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깜란, 호이안, 투이호이아 입으로 내뱉기도 낯선 지역의 정글 위로 날아가는 잠자리 떼 같은 미군의 비행기 아래서 선생은 땀을 흘렸다. 때로 선생은 M16의 개머리판이 너덜거릴 때 까지 총검을 휘둘러 게릴라들의 ‘골통’을 박살내었으며, 적의 소총을 빼앗아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선생이 몸으로 감싸 터뜨린 수류탄이 과연 몇 발이었으며, 선생이 도로 되던져 적을 박살낸 수류탄이 또 몇 발이었던가.

불타는 게릴라들에게 총탄을 뿌리면서 선생은 가끔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 아마 조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과거 충칭에서 죽지 않고 살아났음을 기뻐했다. 비록 월남 주민들과 게릴라들을 분간할 수는 없었으나, 어쨌건 선생은 게릴라, 혹은 게릴라로 의심되는 놈들로부터 주민들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비록 그 노력이 실패하여,

월남 사이공의 궁전은 붕괴하고 그 위에 잔혹무도한 공산의 깃발이 올라서는 것을 보고, 선생은 가슴 한 켠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저러한 일이 우리 자유대한민국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반대의 편에 서서 싸우기로, 헬기에 매달려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늘 적은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선생은 늘 싸웠다.

그러한 적들에게,

선생은 암흑과도 같은 존재였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선생은 곧 철인이었으며, 영웅이었다.

그날은 2015년 8월 14일이었다. 다음날 있을 광복 70주년 건국 67주년을 맞아 벌어지는 행사에 초대받은 선생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자 하였다. 67년. 아, 노인의 나이가 아닌가. 그 파릇파릇하던 대한민국이 이제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부자 노인이 되었다. 이 것이 다 누구의 공인가. 선생은 문득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볼 수 는 없었다. 비록 아직은 야당과 일부 불순세력의 반발로, 아마도 그들은 좌빨임에 틀림없겠지만, 기업이 경영하기 좋은 환경이라 할 수는 없지만 곧, 그러한 규제와 제약들이 모두 풀릴 것이었다. 계약을 통한 자유로운 노동이 있을 것이고, 기업가들이 노력을 통해 얻은 대가를 축적하고 세습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대한민국은 변할 것이었다.

안보의 측면도 물론이다. 일부의 반발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종북세력을 무시하고 대한민국은 더욱 단호하게 북한을 다그쳐, 우리의 번영과 평화를 지켜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을 위해 노력한 장성들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것은 바로 이 조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국인가.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거리가 텅텅 비도록, 청년들을 중동으로 보내라, 고 했을 때 선생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었다. 아마 선생은 월남에서의 기억을 회고했을 것이다. 얼마나 착한 청년들이란 말인가. 이제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도,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여 노조를 조장하는 불순한 학생도 없다. 오로지 일을 배우겠다는 열정으로, 인턴을 한다는 청년들을 생각할 때마다 선생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민족인가.

이러한 선생의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듯, 선생의 방에서 내다보이는 대한민국의 야경은 참으로 밝았으니, 그야말로.

선생이 보기에 참으로 좋았다.

좋았는 것인데,

선생의 소머즈와 같은 귀에 무슨 소란이 들렸다. 누군가,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리라. 선생은 몸을 일으켰다. 이런 복된 날에 하루 정도는 쉬는 것도, 좋을 일이었으나, 선생은 감히 누가 이런 복된 날에 어떤 일로 소란을 일으키는지, 문득 궁금하였던 것이다.

그 소란과 야단과 법석이 일어나는 곳에서 선생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으로 보이는 것이었는데, 놈은 태극기에 감히 라이터를 들이대고 있었다. 경찰 세 명이 그 것을 말리는 것으로 보았으나,

순간에 선생은 날아들어 그 청년을,

집어던지고야 말았다.

청년의 몸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제야 선생은 자신이 자신의 힘을 채 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사실 선생의 힘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책상을 탁 하고 쳐서 그 사람을 억 하고 죽게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늘 조심해야 하는 것을.

경찰 역시 황망한 눈동자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선생은, 그 청년이 아마 길거리에 뿌린 듯한 삐라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아이큐 200이 넘는 선생의 지적구조가 순식간에 그 삐라를 완독하고 이해했다. 그 청년은,

아르바이트 75만을 떼어먹은 사장의 가게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다가 그만 벌금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전단지에는 감히, 선생의 조국을 지옥이니, 이것도 나라냐, 하는 망발이 담겨 있었다.

선생의 이마에 한 줄기 강과 같은 주름이 패었다.

선생은 주위의 대중에게 무어라 몇 마디 말을 던졌다. 전해지지는 않지만, 아마 선생은 젊어서 고생은 당연한 법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소한 고통은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국내가 힘들면 국외에서 국가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등 젊은 세대들에 대한 걱정과 당부의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때 선생의 주위를 둘러싼 대중 중에서,

“신문은 보고 사십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선생은 그 대중의 누군가를 향하여 형형한 눈길을 돌렸으나, 여태 늘 그러하였듯 대중은 답이 없었다. 어떤 새끼야, 괜히 경찰 한 명이 공중에 사자후를 토했고, 다른 경찰들을 선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하십시오, 하고 위로하였다.

그 날 선생은 아직 문을 닫지 않은 편의점을 돌며 신문 몇 장을 샀던 모양이다.

선생의 책상에는 그날의 일간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생은 그 중 하나를 문득 들어보았다. 그렇다. 선생이 곧 대한민국을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선생이야말로 그 뉴스들의 주인 아니겠는가. 소달구지가 흙길을 걸어가던 조선에서, 이제 전 세계가 알 수 있도록 뉴스를 쏘아 올리는 그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그 날 신문에는 이러저러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날의 기사를 살피며, 우리는 선생의 마지막 생각의 족적을 밟아 따르고자 한다.

1면에는 거대한 태극기의 사진과 여러 인물의 사진, 특히 선생은 마치 국부(局部)처럼 소중히 생각하는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었는데, 그 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자, 경제면에는 이러한 소식이 실렸다.

모 대기업 회장이 광복절 건국절 특사로 풀려나왔는데, 그 손에 성경이 들려있는 사진과,

임금 피크제가 실시되어, 고용자들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나, 괘씸한 고용자들은 감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것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노동효율성이 참으로 형편없다는 것, 그러니 야근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야근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노동시간은 전 세계에서 2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과,

대통령의 주문에 힘입어 대기업들이 일제히 청년 일자리를 만들었으니, 청년들이 청년 때 까지만 일할 수 있는 일자리 수가 무려 8만개나 새롭게 증설되었다는 것과,

한 명의 노동자의 배 위로 지게차가 지나갔고, 주위의 노동자들이 119에 신고하여 7분 만에 응급차가 왔으나, 회사가 입구에서, 간단한 찰과상이라고 둘러대어 응급차를 돌려보내고, 30분 거리의 회사 지정 병원의 응급차를 불렀으나, 차가 늦자, 회사 승합차에 환자를 대충 실어 보냈다가, 결국 장 파열과 내출혈로, 노동자는 운명을 달리 하였다는 소식이 토막기사로 실렸으며,

정치면에는,

북한의 목함 지뢰로 발목이 잘린 하사를 위로하기 위해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으며, 대통령이 환히 웃으며 전화로 위로를 전하는 사진과,

대통령의 사촌 형부라는 사람이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함께 실렸으며,

이외에도 을지연습에 참가한 군인이 훈련용 대인지뢰가 든 배낭을 야산에 두고 가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하는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고,

모 야당의원은 국정원이 민간인을 해킹한 것을 확인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여당은 야당의 주장이 요란한 빈수레이니, 국민에게 석고대죄해야 할 것이라 큰 소리 높였으며,

성폭행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는 모 의원에 대한 징계절차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곧 국민의 정서를 반영했다는 소식 외에도, 불철주야, 국사를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의원들의 자녀가 취업특혜를 입거나 하는 작은 기쁨을 맛보았다는 것과,

사회면에는,

소방대원들이 유기견을 죽은 줄 알고 묻었다가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다시 파내었다는 소식과,

함께 재력가 청부살해를 의뢰한 시의원이 무기징역을 확정지었다는 소식과,

죽어도 결혼을 할 수 없어 여자 친구의 낙태 수술비를 대신 내준 30대 청년이 낙태 방조죄로 처벌받았다는 소식,

그리고 잠자리까지 가능한, 시급을 받고 동생 역할을 해주는 아르바이트가 생겼다는 소식과,

10대 여성 가출 청소년들을 유인해 약 1,200여 차례에 걸쳐 성매매를 알선하여 총 1억8천여 만원을 가로챘다는 소식이 함께 실렸으며,

젊은이들의 76.1%가 이민이 가능하면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으며, 그 이유로 기회의 불균형과 부의 불평등을 꼽았다.

자, 선생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건국 67주년을 앞둔 그 날, 혼자 그분이 일간지를 읽으며 무엇을 깨달은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선생의 행동은 단호했다. 선생이 일생을 두고 그러하였듯, 대한민국을 파괴하고자하는 적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선생이 일생을 두고 늘 그리하였듯.

선생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행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선생은 신문을 내팽개쳤다.

선생의 방은 지금도 기념관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누구라도, 삼청동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에서, 선생의 공간을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는 독자를 위해, 선생의 공간을 추려 말해볼까 한다.

작은 방에는 전신 거울이 놓여있다. 방의 한쪽에는 선생이 한 평생을 사용하였던 책상이 단정히 놓여있다. 책상의 위에는 선생이 쓰던 만년필과 종이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선생은 늘, 정리정돈 된 사진의 방에서 하루를 정리하곤 했다.

“기업인의 책상이 기업인의 정신상태를 보여준다.”

선생이 늘 즐겨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의 방을 보는 것으로 선생이 결국 깨달았던, 대한민국의 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해야만 우리는 선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3

선생은, 목울대가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손에 힘을 주었으나,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아직 선생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남아있었다. 목을 찌르는 통증이 격했다. 머리의 핏줄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두피와 두개골 사이의 핏줄에서 꽉 막힌 피들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집중해야 한다. 선생은 속으로, 다짐했다. 목을 죄는 힘을 줄이지 않기 위해. 그 순간 선생은 씁쓸하게 웃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끝나는가.

선생은 느낄 수 있었다. 목을 죄는 손가락이 살을 파고드는 것을.

선생의 목울대를 쥔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손마디가 보이지 않도록 깊게 파고든 손가락에 담긴 힘이 하나로 고이는 것을, 선생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손이 무언가를 움켜쥔다. 목청, 성대, 핏줄, 아니, 선생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손은 멈추지 않았다. 손은 기계처럼 묵묵히 손아귀에 든 것들을 뜯어냈다.

그리하여 고통은 짧고도 아득했다. 피가 튀었다. 선생은 처음으로 자신의 손이 무력하게 허공을 더듬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와 흐릿한 것과 무력이 범벅된 시야 속에서 미스터리는 헛헛함을 느꼈다. 헛헛하다. 이런 것이로구나. 끝이라는 것을.

선생은 그렇게 운명하였다.

우리는 선생이 어째서 자결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선생은 평생을 대한민국의 적과 싸워왔으며,

마침내 그 적을 발견하였고,

그 적과 마지막 혈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였다는 사실을.

바로,

조국을 위하여 말이다.



대한민주주의 공화국 건국 영웅 선생 연보

▶1923년(1세) 의병으로 유명한 경상남도 의령에서 선생 출생하시다. 선생이 태어나는 날 삼태성이 그 출생을 알렸으며, 새벽별이 선생의 출생을 밝혔다. 어둠 속에서 민족의 한 줄기 빛이 될 선생의 운명을 알리는 징조라 할 수 있겠다.

▶1930년(7세) 서당에서 한자를 익히시다. ‘男兒未平國 如場賣狗頭(남아가 천하를 바로잡지 못하면 저자거리에 놓은 개고기와 다를 바 없다.)’란 시구를 지으시다.

▶1939년(16세) 보통학교에 입학하시다. 재학 중 스승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각별한 행동을 보이셨다.

▶1940년(17세) 황국군에 입대하시다. 근대화의 힘을 깨달으시고 현대 문물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다.

▶1941년(18세) 중일전쟁에 참가하시어 충칭전투에 참가하시다. 적의 본부를 급습하던 중 소이탄이 낙하하여 동료를 잃으나 본인 혼자 살아남은 것을 알고 자신의 힘을 처음으로 깨달으시다. 검증할 자료는 없으나 주변의 증언에 의하면 상관에게 누구보다 충성하였으며, 전투에서는 용맹하시어 당할 적이 없으시다. ‘丹心一堂千萬(바른 마음 하나로 천만을 대적한다.)’는 글귀를 지으시다.

▶1942년 일본에 건너가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을 몸소 체험하시다. 일생의 사랑이 될 여인 샤롯데를 만나시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선생의 사업이 크게 성장하시다.

▶1954년 일생의 스승이신 우남 이승만 박사를 만나시다. 선생에게서 불사의 비결을 듣고자 했던 우남 이승만 박사는 선생의 힘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힘써줄 것을 부탁하시다.

▶1960년 부산 유지들과의 술자리에서 처음 박정희 소장을 만나시다. 박정희 소장의 뜻을 알고 지원금을 준비하시다. 부하직원들과의 자리에서 ‘작은 씨앗에서 천년을 갈 나무가 싹튼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다. 4월의 혼란정세를 극복하시고 5.16군사정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시다.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의 뜻을 알고 적극적으로 찬성하시고 한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초석을 세우시다.

▶1966년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와 정부와의 사이에서 조율을 담당, 일본으로부터 싼 값에 물자를 들여와 대중에 보급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시다.

▶1971년 월남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하시다. 선생의 불CIA

▶1975년 월남이 패망하다. 선생은 마지막까지 월남에 남은 한국인으로 기록되시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 1980년 5월 광주에 선생이 있었다는 목격담이 일부 있으나 선생은 침묵하시다. 선생추모기념관에 의하면 선생은 1980년 5월 15일부터 5월 28일까지 휴가 중에 있었으며, 6월에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나시다.

▶1987년 6월 29일, 6.29선언지지 및 민중의 힘을 보여준 대한민국 국민을 치하하시다. 이후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며 “민주화를 이끌어간 민중의 힘이 이제는 자유대한민국의 힘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연설로 기립박수를 받으시다.

▶1991년 남북한 UN동시가입과 함께 국제초인기구(WHO)에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등재되시다.

▶1992년 국내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 발사에 힘을 보태시다.

▶1993년 상록수 부대와 함께 소말리아 평화유지군으로 떠나시다. 금융실명제에 관해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으시다.

▶1997년 IMF 금모으기 운동에 가담하시다. 가지고 있는 모든 금을 내놓아 국민들의 모범이 되시다. 평소와 다른 준엄한 목소리로 IMF의 원인이 되었던 국민들의 사치와 태만을 꾸짖으시다.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국내에도 암중해있는 테러집단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보내시다.

▶2004년 이라크로 파병하시다. 5명의 테러리스트를 제압하시어 미군부대로부터 표창을 받으시다.

▶2005년 APEC 정상화의에서 영웅 대표로 연설을 하시다.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것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시장경제이며, 시장경제 위에 우뚝 선 민주주의가 바로 영웅이다.”라는 연설로 각국 대표들의 기립박수를 받으시다.

▶2007년 태안기름유출사건에서 몸소 기름을 닦으시며 ‘대한민국의 정신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몸소 나서는 의병 정신에 있는 것’이라 말하시며 ‘천만태안해안의병운동’에 앞장서시다.

▶2015년 8월 14일 자택 방에서 조국을 위하여 돌아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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