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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Dec 07. 2019

6년 8개월이 되어서야 찐이가 내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듣는 것, 보는 것, 읽는 것 모두 좋아한다. 그중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내가 웃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따라 웃고, 슬픈 감정선을 담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슬픈 표정을 짓는다. 내 이야기 흐름에 몰입하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내 감정선을 한 발 한 발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지금은 10살인 딸아이가 2돌이 되었을 무렵이다. 난 잠들기 전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둘째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찐이의 등장이다. 큰 아이는 이제 엄마와 함께 잘 수 없다는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뭐... 같이 자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발달장애 뿐만이 아닌 많은 병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 찐이를 보면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다. 찐이는 태어날때부터 존재감이 확실했다. 모두에게 걱정과 근심을 안겨주었다. 하물며 이제 3살이 된 누나에겐 오죽했을까.


난 첫째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아빠는 자기 전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엄마가 아닌 아빠와 함께 잔다. 근래에 보기 드문 빅딜이다. 지금이라면 이런 거래가 아닌 조금 다른 방법을 썼겠지만 그 때는 이게 최이었다.


어쨌든, 일단 성공했다. 첫째는 나와 함께 자기로 했다. 이제 온전히 내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흥미롭고, 재미있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로 아이를 내 옆에 붙어 있게 해야 한다. 이야기가 재미없다면 딸아이는 엄마에게 간다고 다시 울 것이 뻔하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내 인생의 승부였다.


흡입력은 있었다. 내 이야기에는 없었다. 흡입력은 아이에게 있었다. 아이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빨아들였다.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를 쏟아부었다. 전래동화, 이솝우화, 내 어릴 적 이야기까지 모두.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원피스 루피 이야기까지 아이에게 해 주었다. 허리케인 처럼 정말 하얗게 불태웠다. 역시 내 딸이었다. 아이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너무 좋아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는 도무지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 지경까지 왔다. 아이는 나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난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며 졸고 있었다. 이야기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적절한 타이밍에 아이는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졸면서 이야기를 쥐어 짜내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히 이야기 블랙홀 입구에서 극적으로 방향을 돌려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랬던 아이가 10살이 되었다. 이제 내가 아내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면, "엄마... 그러지 말고 아빠 10만 원만 줘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굉장히 원숙한 톤으로 말이다. 해리포터의 마법 이야기와 루피와 동료의 이야기를 해 줄 때 아이의 눈망울은 맑았다.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다음 이야기는 내일 이어집니다!"라고 말했을 때 "아잉~ 아빠 제발요~"라고 날 흔들던 그 손길은 사랑스러웠다. 내가 전해주고 싶은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던 아이의 눈, 코, 입, 손가락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아이는 친구들과 노는 것이 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좋은 나이가 되었다. 아이는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는 내 이야기보다 마인크래프트가 더 좋은 나이가 되었다. 아이는 내 이야기보다 도티의 이야기를 더 좋아 한다.


며칠 전 난 찐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햇님 달님의 이야기였다. 찐이는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다음 이야기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눈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다리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날 쳐다보았다. 호랑이가 엄마를 잡아먹는 부분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고, 오빠가 동생을 위로하는 장면에서는 안도했다. 호랑이의 우스꽝스러운 묘사에서는 집이 떠나갈 듯 웃었다.


난 찐이가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 통할리 없다고 판단해 버렸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지 않기만을 빌고 있었다. 종교도 없는 내가 누구에게 비는 건지도 모르게 그저 빌며 소망만 공허히 되뇌고 있었다.


난 찐이가 발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말로는 찐이가 발전하리라 믿는다고 외쳤지만 내 깊은 곳 어딘가에 찐이의 발전을 믿지 않는 구명조끼가 있었나보다. 그게 있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실망감이라는 바다에서 그게 있어야 뭍으로 나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난 찐이가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아이라 내 멋대로 결정해 버렸다.


그런데 아이는 내 이야기에 집중한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내가 전달하는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온다. 냇가에 징검다리를 건너듯 내 손을 잡고 한발 한발 다음 돌덩이로 발을 옮긴다. 내 눈과, 입을 주시하며 집중한다. 온몸을 다해 나와 소통한다. 내 감정과 삶을 함께 나눈다.


어제는 아기돼지 삼 형제 이야기를 해주었다. 첫째와 둘째가 셋째를 우스꽝 스럽게 놀리자 찐이는 웃었다. 늑대가 나타나자 무서워했다. 첫째와 둘째의 집이 무너져 셋째의 집으로 도망치자 찐이의 눈에 긴박함이 보였다. 늑대가 도망가자 찐이의 눈에서 안도감이 보였다.


찐이는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느끼는 하나의 존재였다. 이 엄청난 존재를 난 내 멋대로 생각했던 거다. 내 멋대로 못할 거라 결정해버리고 판단해 버렸다. 내 스스로 내 아이를 작은 존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결정해 버렸다.


찐이가 태어난 지 6년 8개월이 지난 2019년 12월. 난 다시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줄 기회를 얻었다. 심장이 두근 거린다. 잠들기 전 침대에서 찐이를 만날 시간이 기다려진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감정을 나눌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핑 돈다.


오늘 저녁에는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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