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실한 베짱이 Jan 21. 2020

내가 연말정산 환급금이 많은 이유

연말정산 시즌이다. 연말정산을 하면 난 주변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돌려받는다. 같은 연봉이지만 결정세액에서 꽤 많은 차이가 난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부러워한다.

"연말정산했냐?"
"응."
"받아?"
"응. 한 0백 정도"
"와... 대박. 난 뱉어내는데..."


그리고는 이유를 묻는다. 어떻게 넌 그렇게 많이 받을 수 있냐고. 난 잠시 생각에 잠긴다. 1~2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변을 고민한다.


"우리 둘째가 장애인이잖아. 장애인 공제받으니 그렇지. 그리고 의료비랑 재활 치료비가 겁나 많아!"
이렇게 진지하게 사실대로 말할지...
"번 돈 다 썼다... ㅋㅋ"
이렇게 대충 말하고 끝낼지...
"하하하..."
그냥 웃고 말지...
"알고 싶어? 너는 불가능할 거 같은데... 그런데도 알고 싶으면 모여봐...... 일단...... 장애인 공제가 필요해"
블랙코미디로 받아넘길지...


몇 년 전부터 정부는 나에게 세금을 많이 환급해주기 시작했다. 전기와 가스요금도 할인해 준다. 지하철 요금도 동행 1인은 내지 않는다. 찐이가 장애인임을 정부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혜택들은 고맙다.


근데, 이 혜택 받기 싫다. 이 환급 안 받고 치료비와 교육비로 매년 몇 백, 몇 천 만원을 안 쓰고 싶다. 장애인 공제도 싫다. 장애인 태그는 떼어버리고 공제 안 받았으면 좋겠다. 장애인 혜택이 너무 많다고 떠드는 사람들 보기도 지친다. 사용한 돈, 노력, 시간, 눈물에 비해서는 코딱지 만한 혜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혜택은 찐이의 발달장애 덕분이다. 대부분의 발달장애는 초기에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저 조금 늦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사실 이 생각은 맞다. 단순히 조금 늦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면 부모는 장애를 의심한다. 벌어진 차이를 눈치채는 시기는 케바케다. 통계치를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주변을 보면 3~5세 정도에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병원을 간다. '아니겠지' 50%와 '설마...' 50%를 마음에 담고 의사를 만난다. 아닐 거라 믿고, 아니길 바란다. 이 마음이 조금씩 부서지면서 언어, 인지, 감각통합 등의 교육을 시작한다.

찐이가 만 2세 가까이 되었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걷고 뛰는 건 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런데 머리가 문제야. 지능이 떨어질 가능성이 커."

이 말을 듣고도 난 믿지 않았다. 믿기 싫었다. 더 좋아질 수 있겠지, 설마 장애가 있지는 않겠지, 말이 아직 안 터져서 그렇지 말만 한 번 터지면 잘할 거야. 그럼. 그럴 리가 없지. 그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을 뿐이야.

아무리 기다려도 찐이는 말이 터지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안 터졌다. '말'대신 하나 터진 게 있다면, 아내와 내 '속'이다. 우리 '속'은 여러 번 터졌다.

찐이가 만 3세가 되었을 무렵 장모님이 병원에 함께 가셨다. 찐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찐이가 어떤 상황인지 장모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찐이 걱정을 할 때마다 장모님은 '내가 아는 누구는 5살 때까지 말을 못 했어. 그런데 지금은 잘해'라는 말을 해주시곤 했었다. 장모님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을 거다. 지능이 떨어질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장모님은 충격을 받으셨다. 난 옆에 있지 않았지만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의사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얘 가요? 지능이 떨어진다고요? 정말요?"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셨다. 곧 의심의 눈은 실망의 눈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어렵다. '그래. 당연히 어렵겠지. 얼마나 힘들겠냐.'라고 공감해 주고 이해해줄(?)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다. 뭐야......, 뭐지? 뭐야! 머리엔 이 세 단어가 가득했다. 가슴엔 원망, 분노, 짜증, 화, 무력감, 상실감, 죄책감이 가득했다.

아이가 똑똑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이 터지기만 하면 된다는 경험에 의지한 소문, 혹시 나 때문인가 하는 죄책감,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긴 거냐는 원망, 부모라는 두 글자에 담긴 책임감 등이 비빔밥처럼 마구 뒤섞인다. 여기에 경제적, 육체적인 고통이라는 고추장이 걸쭉하게 한 숟갈 들어가면 사실과 욕망이 뒤엉킨 맵고, 짜고, 맛없는 비빔밥이 탄생한다. 버려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비빔밥은 그냥 비빔밥일 뿐인데, 나와, 아이와, 아내를 비빔밥이라 착각한다. 


부모는 비빔밥을 먹으며 모든 시간을 아이를 위한 음식, 아이를 위한 교육에 투자한다. 부모는 사라진다. 대개의 경우 엄마가 이 역할을 떠맡는다.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한다. 


좋은 부모는 행복한 부부이며, 행복한 부모는 행복한 아이를 기른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장애가 있는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행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와 함께 행복해야만 한다. 아내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할 테니. 그럼 우린 행복한 부부가 되고, 좋은 부모가 되고,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질 거다. 이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데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와 아내의 '속'이야 어떻든, 2020년 연말정산은 남들이 보기엔 성공적이다. 환급받은 돈으로 비빔밥 대신 소고기를 먹으러 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폐아 펭수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