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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Mar 04. 2020

6층 화장실 1번 칸의 비밀

※ 이 글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썼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눈이 따끔거린다. 너무 시려 눈을 감아본다. 아무리 눈을 감고 마사지를 해봐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속도 좋지 않다. 묵직한 돌덩이가 위장에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다. 돌덩이를 위에 품고 있는데 왜 배는 고픈 건지. 소화에 너무 힘을 쏟았나.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한 없이 나른해진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묻혀 있는 느낌이다. 목은 이미 내 목이 아니다. 아교와 톱밥을 버무려 머리 아래에 바르고 어깨 위에 겨우 겨우 올려놓은 느낌이다. 아무리 목을 돌려보고, 주물러봐도 소용없다. 목 관절 사이사이에 모래가 들어있는지 서걱서걱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지만 회사에서는 손가락만 움직이면 큰 문제는 없기에 이렇게 버티고 앉아있다.


***


그가 그 화장실을 알게 된 건 한 달 전이다.


전 날 과음을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장실로 갔다. 1번 칸 문을 열고 핸드폰을 꺼냈다. 날아오르는 비둘기와 함께 그의 기분도 함께 날아올랐다. SNS에서 친구들의 소식, 그들이 공유한 세상을 보았다. 마지막 덩어리를 쥐어 짜내며, 더 볼 게 없는지 피드를 쥐어 짜낸다.


잘 알지 못하는 페친이 공유한 한 링크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법'. 주변이 느려지면 난 빨라지는 건가? 정신과 시간의 방 같은 건가? 흐릿한 호기심에 링크를 눌렀다. 'slow room wifi에 연결하시겠습니까?'라는 팝업창이 떴다. 반사적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이 사소한 반사적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확인 버튼을 누른 이후, 자동으로 애플리케이션이 하나 깔렸다. 동시에 화장실 벽은 도미노 쓰러지듯 순차적으로 쓰러졌다. 앉아 있던 변기를 제외한 땅 위에 솟아 있는 모든 것이 쓰러져 땅 속으로 사라졌다. 바닥은 변기와 같은 순 백색으로 바뀌었고 하늘도 변기 색이 되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던 그는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지를 올리지도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한 참을 서성거렸다. 이미 그의 항문의 잔여물은 휴지로만 닦기엔 어버렸다.

동 실행된 애플리케이션에는 이런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1. 이 방에서의 한 시간은 밖에서의 1분과 같습니다.


2. 하루에 최대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10시간(밖에서의 10분)입니다.


3. 여기에 머무르는 만큼 수명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어쨌든 미래의 시간을 당겨 쓴다고 생각하십시오. 레드불을 마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4. 접속 및 해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 건물 6층 남자 화장실 1번 칸에서 'slow room' 와이파이에 연결한다.

'slow room wifi에 연결하시겠습니까?'라는 팝업 창이 뜬다.

접속하려면 '확인', 접속하지 않고 볼 일을 계속 보려면 '취소'를 누른다.

접속하면 자동으로 애플리케이션이 켜지고, 이 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해당 와이파이 접속을 끊거나 애플리케이션의 '나가기' 버튼을 누르면 다시 화장실로 돌아갈 수 있다.



하늘의 계시인지, 경고 문구인지 모를 이 설명서(?)를 그는 읽고 또 읽었다. 세 번 정도 읽었을 무렵,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제야 바지를 올리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고 바지를 올렸다. 닦는 것을 잊었지만 뭐... 괜찮을 거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변기 물을 내리고 옆을 보았다.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노트북이 하나 있었다. 화면보호기에는 아까 읽은 그 방 사용설명서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진짜 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가봐야 했다.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봤다. 애플리케이션에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이 600분에서 줄어들고 있었고 그 옆에 밖에서의 시간이 반짝이고 있었다. 타이머는 593분을 향해 가고 있었고 밖에서는 7초가 지났음을 알려줬다. 그는 일단 나가기 버튼을 클릭했다.

순간적으로 암전 되더니 그는 다시 화장실로 돌아왔다. 다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는 이 방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 방에서 1시간을 보내고 나왔지만 밖에서는 단지 1분이 지나있을 뿐이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 씻는 것도 잊은 채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모니터의 엑셀 창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팀장이 그를 불렀다.


"마추명! 마 과장!"

팀장이 세 번을 소리 높여 부르자 그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뭘 하느라 러도 모르는 거야?"

"죄송합니다."

"어제 지시한 분석 자료는 다 만들었나?"


아... 젠장. 맞다.

뭔가 잊은 듯했는데 이거였다. 꼭 하기 싫은 일은 나에게 떨어지고 하기 싫으니 하는 걸 잊는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못 했다고 해야 한다. 아직 시작도 못 했다고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드니 팀장님 얼굴이 보였고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예. 한 시간 후면 보고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이거 전무님 보고사항인 거 알고 있지?"


젠장. 못 했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미친놈. 왜 한 시간 후에 된다고 했지? 한 시간은 또 어디서 나온 거야?

진실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죽이고 싶었지만, 팀장의 눈빛은 항상 거짓말을 불러냈다. 자책할 시간도 아까웠다. 족히 하루를 꼬박해야 하는 그 분석을 어떻게 한 시간 안에 끝낸다는 말인가. 분석을 끝내 놓은 상황에서 보고서만 만들기에도 한 시간은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아니다. 이건 불가능하다. 사실을 말하자. 못한다고 말하자. 그래. 그깟 승진이 뭐가 중요하냐. 칭찬 한 번 듣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내일 보고 드린다고 하자.

그러나 상사의 인정만을 목표로 회사 생활을 하는 마추명씨에게 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금 못 한 다고 하면 신뢰를 잃을 거다. 그렇다고 부족한 분석으로 보고하면 능력 부족으로 이번 차장 승진은 물 건너갈 것이 뻔하다. 사실이든 아니든 마추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의 실수도 하지 않기위해 강박적으로 상사의 칭찬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회사인간'들이 그렇듯, 마추명은 상사의 인정에 인생이 세팅되어 있었다. 그의 인생은 인정의 미끼를 물고 낚싯대에 딸려 올라가는 광어일 따름이었다. 광어라도 된다면 다행이지... 꽁치면 잡아도 버릴 텐데...까지 생각이 다다른 순간 마추명은 그 방이 생각났다.

그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오 마이 갓. 사내 망에 연결되어 있었다. 마추명은 다시 밖으로 나가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업무 파일을 클라우드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8분 후, 그는 깔끔한 보고서와 백데이터를 들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뭐... 손에 들고 나온 건 아니었지만. 그는 한 시간 후가 아닌 30분 후에 팀장에게 보고를 할 수 있었다. 꽤나 공들인 분석자료라는 게 티가 났다.

"음... 역시 마 과장이군. 수고했어. 이걸로 보고 드리면 되겠어."

"아닙니다. 팀장님이 말씀 주신대로 그냥 만들었을 뿐입니다."

무릎을 치면 다리가 들리 듯 나오는 반사적인 겸손 멘트로 무사히 보고를 마쳤다.

이 후, 그는 매일 그 방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몇 배가 넘는 일을 하지만 퇴근은 6시에 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효율적으로 일 하면 된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 겸손함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상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을 시키든 제대로 해오는 그에게 더욱 중요한 일을 맡겼다. 차장 승진이 눈 앞에 보였다.

매일매일 그 방에서 10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그 방에서 업무 효율을 위해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방은 마약 같은 거라 상사의 눈에 띄기 위해, 더 완벽한 보고서를 준비하는 시간에 더 많이 투자했다. 더 오랜 시간 분석하고 고민해서 탁월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1년이 흘렀다. 그는 차장으로 승진했고 차기 팀장 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차장 승진 후 그의 부서는 15층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는 여전히 6층 화장실을 주로 사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식을 하나 전해 들었다. 회사 사옥의 리모델링 소식이었다.

30년이 넘은 회사 사옥을 리모델링한다고 했다. 외관을 정리하고 유행하는 공유 오피스 형태로 내부를 바꾼단다. 개방형 회의실과 카페 공간도 추가한다고 한다. 소중한 6층 화장실 1번 칸은 무엇으로 바뀌는지 알아봤다. 그곳은 임원실로 바뀐다. 공유 오피스의 중간 공간은 임원이 함께 모여 일하는 방으로 만들겠다나. 어쨌든 그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릴 터였다.

아... 아직 부족한데. 팀장이라도 달고 그 방이 없어져야 할 텐데... 그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한 동안 물어뜯지 않아 고쳤다고 생각했던 버릇이었다. 한 참을 물어뜯어보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이제 그에게 손오공이 아들과 함께 들어가 '초사이어인'이 되어 나왔던 정신과 시간의 방은 사라졌다.

리모델링 직후 전 세계적인 금융위가 불어닥쳤고, 그의 회사도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전 직원의 20%를 줄이는 전대미문의 구조조정의 칼날을 그는 당연히 피해 갈 줄 알았다. 그러나 회사는 그의 실적을, 그의 능력을 기억하지 못했다. 회사는 마추명의 성공을 바라지 않았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그저 누구라도 한 명 더 자르는 것이 목표였다.

명예퇴직 후 마추명은 다른 일자리를 찾아봤다. 창업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나이도 나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회사일'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회사에서 그는 그의 생각을 없앴다. 상사의 생각에 맞추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사의 지시사항은 빠짐없이 담고, 어떻게 해야 상사가 좋아할 지만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없었다. 그의 인생은 자기 자신의 내용은 없었다. 단지 상사 비위 맞추기, 생각 맞추기 기술만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곧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수명이 줄어든 것이 분명했다. 개인차가 있을 거라 했는데 이거였나... 씁쓸한 액체가 역류했다. 식도가 쓰라렸다. 식도에 염증이 생긴게 분명했다.

마추명은 자꾸만 정신과 시간의 방이 생각났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보석과도 같은 시간을 정말 보석을 만드는 데 썼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똥을 만드는 데 써버렸다. 왜 화장실에 그 방의 입구가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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