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실한 베짱이 Feb 06. 2021

3시간 정종 전복찜 & 굴밥

내가 사는 이유, 찐이가 사는 이유

가끔 조금은 비싼 초밥집을 간다. 점심 오마카세를 먹는다. 비싼 건 15만 원 정도 하지만 난 4만 원짜리를 먹는다. 이것도 나에겐 1년에 2~3번 먹을 수 있는 가격이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무 위키에 따르면 오마카세는 '맡긴다'라는 뜻의 일본어인 'おまかせ'에서 유래됐다. 대접받을 메뉴의 종류 및 그 요리 방식을 셰프에게 모두 맡기는 형식의 식당 또는 메뉴를 말한다. 점심시간에 팀장, 부장의 눈치를 보며 조금 일찍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잰걸음으로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초밥이 몇 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광어, 참치, 성게알 등 좋은 초밥이 줄지어 나온다. 전복 초밥이 나오면 아쉽다. 거의 끝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밥 위에 전복, 전복 위에 아쉬움을 얹어 입에 넣고 나면 아쉬움은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


전복이 너무 맛있어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건지 물어봤다. 주방장은 싱긋 웃으며 "쪄요"라고 간단히 말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그리 간단하진 않았다. 3시간 동안 물이 아닌 정종을 이용해 찐다. 전복 위에는 다시마와 무를 올려놓는다. 아... 그래서 이렇게 부드러웠구나. 잡내도 하나도 없고, 감칠맛까지 돌았구나.


집에서 해보기로 한다. 일요일. 큰 아이와 나가서 정종, 전복을 샀다. 전복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 굴도 조금 샀다. 집으로 돌아와 전복을 깨끗이 씻었다. 교체할 때가 된 내 칫솔을 희생하기로 했다. 찜 솥에 정종을 1리터 붓는다. 센 불로 끓인다. 정종이 끓고 알코올이 날아간다. 코 끝이 찡하다. 깨끗이 씻은 하얀 전복을 올리고, 다시마로 전복을 덮는다. 얇게 썰은 무로 다시마를 덮는다. 불을 줄이고 3시간 타이머를 맞춘다.


굴과 밥을 씻는다. 굴은 소금물을 이용해 씻고 3~4차례 찬 물에 헹군다. 손이 시리지만 참는다. 밥 위에 굴을 올리고 채 썬 무도 올린다. 다시마 조각 2~3장을 밥에 꽂는다. 평소보다 물은 조금 적게. 전복찜이 완성되기 30분 전에 굴밥을 불 위에 올린다.

완성된 전복찜과 굴밥이 상 위에 올라간다. 항상 제일 긴장되는 순간이다.

"음... 맛있긴 한데... 3시간 동안 힘들게 쪄서 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아빠! 이거 더 없어?"
"전복? 그치! 맛있지?"
"아니.. 이거 말고 버터구이 전복!"
"아... 버터구이... 그거 남은 걸로 조금만 한 거야. 더 없어"


반응이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럼 또 어떠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먹는 것만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요리가 즐거웠다. 그걸로 됐다.


둘째 찐이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아산병원 홈페이지에 가면 발달장애를 이렇게 정의해 놓았다.

발달장애란 어느 특정 질환 또는 장애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 의사소통, 인지 발달의 지연과 이상을 특징으로 하고, 제 나이에 맞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를 모두 지칭합니다. 언어, 인지, 운동, 사회성 등이 또래의 성장 속도에 비해 크게 느려서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조 능력이 떨어집니다. 발달장애를 진단하는 데는 사회성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발달 수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고, 또래와 비교하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찐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느린 아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발달장애 소통과 지원연구소 김성남 소장은 페이스 북에 '느린 아이'라는 표현은 '언젠가는 장애가 없는 아이들과 같아지게 될 거라는 기대가 내포된 표현'이다. '그 말속엔 그 발달장애를 그 아이의,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인정하기 싫은 속내가 담겨있다'라고 말한다.


찐이는 찐이 자체만으로 온전한 사람이다. 가끔 이 사실을 잊는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고, 빨리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급하다.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아이를 다그쳐서라도 이 교육, 저 교육 다 받아야 할 것 만 같은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는 내가 이렇게 교육해서, 이 치료를 받아서 아이가 이렇게 '좋아'졌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해봐라라는 조언이 넘친다. 이래서 학교 가서 어떻게 하느냐, 학교 가서 큰일이다, 뭐라도 해야 한다라는 불안감을 조장하는 말들에 더 조급해진다.


내가 3시간 동안 전복찜 만든 건 누가 보기엔 시간낭비요, 누가 보기엔 버터구이보다 가성비 떨어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난 의미 없는 일을 한 건가? 아니다. 난 충분히 즐거웠다. 단지 먹기 위해 요리를 하는 게 아니니까. 찐이도 그렇다. 찐이는 발달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아이의 발달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 삶의 이유가 아니다.


찐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찐이만 알고 있다. 내가 40이 다 되어서야 살아가는 이유를 아주 조금 알 것 같은 것처럼 찐이도 스스로 삶의 이유를 찾는다. 너처럼. 나처럼. 똑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꼬치 어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