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딸은 <옥탑방의 문제아들>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펜트하우스>를 훨씬 더 좋아하긴 하지만. 옥탑방에 모여 문제를 내고 맞추는 프로그램인데, 흥미롭고 의미 있는 문제가 많이 출제된다.
우연히 딸 옆에 앉아 이 프로그램을 보던 중, 한 문제가 가슴에 꽂혔다.
문제) 영국 해리 왕자의 왕자비 '메건 마클'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우리가 공유하는 상실들'이라는 글을 기고해 둘째 아이를 유산한 사실을 고백했는데요. 그녀는 많은 여성이 유산을 겪지만, 그에 대한 대화는 금기하고 수치심 속에 혼자 슬퍼하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며 자신이 유산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 말을 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에건 마클이 치유의 말이라 꼽은 이 말은 무엇일까요?
답) "Are you OK? 너 괜찮니?"입니다. 마클 왕자비는 유산으로 힘들었던 당시 한 기자가 자신에게 "괜찮으세요?"라고 물었고 이 일을 통해 치유의 시작은 먼저 '괜찮은지'물어보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하는데요. "괜찮냐"는 질문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의 질문이라며 정말로 열린 마음으로 "괜찮냐"라고 물어보는 순간 슬픔의 무게는 가벼워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2020년은 너무 많은 상실과 고통이 우리를 괴롭힌 한 해였다며 홀로 아프고 외로워하며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서로 "괜찮은지"물어본다면 "우리는 모두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둘째가 태어나고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 가정은 무너져 내렸다. 주춧돌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생각에 육아휴직을 했고 그 기간 중 나에게 작은 선물을 줬다.
친구들과 속초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친구들은 날 위해서 휴가를 내고, 숙소를 잡고, 맛집을 알아봤다. 이렇게 여행을 계획하던 중 얼굴만 알고 지내는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여행을 함께 가고 싶단다. 친구들은 온전히 나를 위한 여행이니 네가 싫다면 거절하라고 했지만 왠지 거절하면 '쫌생이'가 되는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거절했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쫌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함께 여행을 떠났고 난 즐겁지 않았다. 내가 즐겁지 않은 이유를 잘 몰랐다. 즐겁지 않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난 흥분하지 않았지만 흥분한 척을 했고, 행복하지 않았지만 행복한 척했다.
난 왜 이 고마운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고 싶었나? 술 마시고 미친 듯이 놀고 싶어서? 바다가 보고 싶어서? 헌팅이라도 하려고?
괜찮지 않다고, 힘들다고, 카페나 술집에서 울며 불며 질질 짤 수 없으니 모텔방에서 치킨과 맥주를 앞에 놓고 친구들에게 질질 짜고 싶었던 거다.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거다.
날 휴직하게 만들고, 여행가게 만들고, 힘들다고 질질 짜고 싶게 만들었던 찐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찐이가 적응이 힘든 건지, 내가 적응이 힘든 건지 모르겠지만 힘들다.
찐이는 학교가 끝나면 엄마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지 불안하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불안감을 씻어내기 위해 소리를 지르기도, 조금은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들을 친구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선생님은 제지한다. 불안을 이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제지한다.
그러던 와중에 아빠라는 작자가 찐이의 팔을 잡고 이런 행동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10분이 넘게 이야기했다. 찐이의 학교 적응을 위해서라는 위선적인 이유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다. 내 욕망 때문에 아이는 지옥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16년 전,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에 참여했다. 장준하 선생이 쓰가다 부대(쉬저우)를 탈출하여 중경(충칭) 임시정부를 향해 걸어갔던 6천리(약2,400km)를 따라가는 행사였다. 20대의 흥분과 열정으로 만난 그 사람들과의 인연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단톡방에 살짝 투정을 부렸다.
"아... 요새 걱정이 많아. 찐이가 학교 적응이 영 힘드네... 실무사 선생님을 하교할 때 많이 때리더라고... ㅜㅠ... 찐이 말을 들어보면, 수업시간에 떠드는 걸 하지 말라고 하고, 움직여도 하지 말라고 하고, 다 하지 말라고, 안된다고 하니 화가 많이 났다고 하는 것 같은데... 쉽게 물어볼 수도 없고... 고민이 너무 많다. 다음 주 월요일이 선생님 상담인데... 찐이 때문에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라는 소리 들을까 봐 겁나기도 하고..."
"어떤 말을 들어도 상처받지말긔~~~ 그건 선생님도 찐이가 처음이고 찐이도 교실과 선생님이 처음이니...시간을 두고 천천히 애가 크면서 나아지는것도 있더라..ㅠㅠ"
"넘어야할 산이니 맘 단단히 먹자 00아... 네가 단단해야 찐이도 강해질듯. 찐이가 바라보는 시선은 이러하다고 선생님께 설명도 드리고..찐이 좀 잘 이해해주시고 적응 잘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도 드리고. 내새끼 위해서 뭔들 못하것냐... 00인 원래 말도 진솔하게 잘하니까... 선생님도 이해해주실듯"
"학교가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라기 보다는.. 규칙과 질서를 가르치는 곳이라 생각하셔야 한대요 첨에 그런 과정이 부모님들이 가장 힘들어하신다고..ㅠ 아이가 세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니깐 ㅠㅠ 그걸 가르쳐야하는데 ㅠㅠ 소통이 쉽지않고 그리고 환경이 바뀌어서 더 힘들어 하는거라고"
"적응하는데 아이들마다 속도가 달라요. 천천히 정말 천천히 하는 아이들은 적응을 못하는 것 같지만 나름 자신의 속도대로 적응을 해나가고 있는거에요. 그 과정에서 갈등도 생길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모두 배움이니까 학교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고 00이형도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같은 반 아이들 중에 찐이를 싫어하고 이해 못하는 애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래도 확실한건 찐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이 더 많을 거라는 거"
고맙다고, 덕분에 힘이 난다고 이야기 해야 하는데 그 말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심으로 내 슬픔을 느끼는 그들이 느껴진다. 시야가 흐려져 뿌연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자니 고여있던 슬픔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을 보면 슬픔이 고여있으면 비린내를 풍긴다.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비린 냄새가 났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일 때도 속에 쌓인 슬픔이 찰랑거리며 비린내를 풍겼다.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고여있던 슬픔이 흘러나가는 순간 '허...' 짧은 탄식이 함께 나왔다. 흘러나간 슬픔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코끝이 찡했고 흘려보냈다. 슬픔이 다시 쌓이더라도 이젠 괜찮다.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