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과 파도의 언어

하늘은 유난히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by 박준범

어느 날 밤, 하늘은 유난히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빛은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길 위를 은은하게 적셨다.
나는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밤공기마저 따뜻하게 느껴지는 순간, 아이가 고개를 들어 내게 말했다.

“아빠, 달이 자꾸 따라와.”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달은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인데,
아이 눈에는 꼭 우리를 졸졸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어른이 된 나는 오래전에 잊어버린 감각,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이 그 한마디에 되살아났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였다.
모래 위를 뛰어다니던 아이에게 내가 처음 ‘파도’라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게 파도야.”
아이의 작은 입술이 따라 했다.

“파도…”

그 순간은 대수롭지 않게 흘러갔지만,
아이 마음속에는 깊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며칠 뒤, 오래간만에 외식을 하러 식당에 갔다.
아이와 함께 자리에 앉아, 아이가 좋아하는 찌개를 시켜놓고 끓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이가 갑자기 찌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 여기 파도.”


나는 순간 멍해졌다.
“응? 갑자기? 바다가 생각났어? 또 가고 싶어?”

아이의 눈은 여전히 찌개에서 넘실대는 국물에 머물러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는 찌개의 보글거림을 파도로 보고 있었던 거다.

그때 나는 김춘수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아이가 찌개의 보글거림을 ‘파도’라 불러주는 순간,
그 식탁 위 찌개는 작은 바다가 되었다.

아이가 부르는 순간,
달은 우리를 따라왔고,
찌개는 바다가 되었으며,
파도는 식탁 위에서 일렁였다.


아이는 세상을 아직 서툴게 부르지만,
그 언어는 언제나 새롭고 빛난다.
그 맑은 눈과 상상력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세계를 다시 배운다.

아이가 다시 나를 불렀다.
“아빠.”

아이가 나를 ‘아빠’라 불러주었을 때,
나는 아이에게로 와서 드넓은 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는 또, 아빠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