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매일 주체적 소설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이주일 째, 두 번째 소설책을 끝마쳤다. 엄밀히 말하면 그래픽노블 책이지만! 그래도 내용만큼은 알차다. 대사 하나하나도 굉장히 많다. 역시나 친오빠 방에 있던 책들 중에 재밌어보여서 골라들었다. 책은 닐 게이먼의 장편소설을 그래픽노블로 각색한 것으로서, 총 두 권으로 되어있다. 1권은 주인공 노바디가 아기때부터 열살이 되기까지의 묘지에서의 성장기를 그려놨다면, 2장은 열살이 된 노바디가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악들과 대결구도를 형성하는 내용을 담아냈다.
내용은 한 아이의 성장기라고 보면 된다. 어릴 적 가족을 잃고 시련 속에 던져지지만 운 좋게 주변 조력자들의 도움을 얻는다. 그렇게 성장해나가는 동안 이런 저런 소소한 모험들을 겪으며 성숙해진다. 특정 나이가 되고 드디어 자신을 시련에 빠뜨리게 한 악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간 갈고 닦은 자신의 힘으로 악당들을 물리친 후 원래 있던 곳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나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흥미로웠다. '잭'이라고 불리는 살인자들에 의해 가족을 잃은 한 아기가 집 근처의 오래된 공동묘지로 기어들어가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보호자, 엄마, 아빠, 선생님, 친구, 그리고 이웃들의 역할을 해주는 유령들의 손에 길러진다. 이름은 노바디. 묘지가 마치 제 집인 것처럼 자유롭고 편안한 시간들을 보낸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유령이다보니, 노바디는 일반 사람들이 할 줄 모르는 다양한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기, 벽 통과하기, 어둠 속에서 훤히 내다보기 등등 마치 유령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과 유령은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이다. 살아온 역사도 환경도 문화도 모두 다르고 삶을 영위하는 방식 역시 다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이 점을 확실히 짚었다. 묘지를 떠나기 싫어하는 어린 노바디에게 묘지의 유령들과 보호자(아마도 뱀파이어겠지) 사일러스는 그가 언젠가는 떠나야함을 일깨워줬다. 비록 그들이 노바디를 어릴 때부터 키워주고 사회화를 책임졌다고해도, 노바디와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확실히 존재했다. 서로가 관심을 갖는 것 혹은 관심 갖지 않는 것, 할 수 있는 것 혹은 할 수 없는 것, 알아도 되는 것 혹은 알 필요가 없는 것 등 많은 부분들에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노바디는 묘지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속해야하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떠나는 순간에는 아쉬움과 미련보다는 설렘이 더 컸듯이. 결국 언젠간 세월이 흐르면 그는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올 것이므로, 이별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내용이 전환될 때마다 장이 바꼈으므로 책은 여러장으로 구성되어있다. 흥미로운 점은, 각 장마다 다른 그림작가들이 그렸다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특징은 그대로 유지된 채, 예를 들면 눈이 빨갛고 항상 검은 코트를 걸치고다니는 사일러스처럼, 장마다 그림체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 차이를 보는 것이 재미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이 조금 유쾌하고 가벼운 장에서는 그림체 역시 발랄하고 밝은 톤이다. 반면 어둡고 스릴있는 장면의 그림체는 좀더 그 톤이 낮다. 각각의 작가들이 해석한 노바디와 유령들, 그리고 사일러스를 느껴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만화책들이나 혹은 영화화된 소설들은 내 상상 속 인물들의 모습이 어떻든 이미지 혹은 미디어로 드러난 그 모습 그대로 인물이 확정되어 버린다. 즉, 독자들의 상상이 제한된다. 모든이들이 그 작품의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주입된 모습의 인물들이 함께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마다 다른 작가들이 해석한 인물들의 모습과 풍경을 담아낸 이 책은, 독자로서의 나 역시도 계속해서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굉장한 자유였다. 내 머릿속에서의 노바디는 내가 정해준 모습으로 생생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또 하나의 책을 읽어냈다. 평소에 일상을 살아내는 데에 집중하면서,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관계맺는 대상들이 정해지게 되면서 점점 나만의 시야에 갇히게 된다. 머릿속과 마음이 자꾸 좁아지고 굳어지는 느낌이다. 그럴 때 소설책을 읽는 것은 좁아졌던 시야를 트이게 해주고, 편협해지던 마음에 숨을 훅 불어넣어준다. 나는 다른 종류의 책들보다 소설에서 더욱 이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얻고는 한다.
이제 그 다음 책은 무엇으로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