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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나 Dec 26. 2020

조증도 우울증의 한 종류였다

알아차림

우울과 행복 사이의 널뛰기


  나는 감정의 기복이 굉장한 채로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나. 바로 죽고 싶을 정도로 우울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다시 감정이 위로 솟구치곤 했다. 그럴 땐 마치 우주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무한한 행복감과 충만함을 느꼈다. 그 당시엔 평소의 내가 아무리 우울하고 무기력해도, 이렇게 찾아오는 기쁨의 감정 때문에 살아날 에너지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성인이 되고 깨달았던 것은, 그 당시에 겪었던 우울감이 20살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종류였다는 것(물론 조금 더 온화한 우울감은 여전했다).


일상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교우관계도 원만하고 성적도 잘 나오는 학생이었고 심지어 모범생이었으며 딱히 일탈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고 큰 사고나 사건을 겪어본 적도 없다. 그냥 당시 빈번하던 부모님의 다툼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요소였고, 두 분이 언성을 높일 때마다 불안감에 짓눌려 숨을 죽였을 뿐. 아마도 그것이 내 정서와 우울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매우 감성적이었고, 자유에 대한 갈망이 정말로 컸다. 자유로움. 자유.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다 때려부서뜨리고 싶었다. 나를 마구 망가뜨리고 싶었다. 새벽 1시가 되면,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어 어두운 적막을 깨트리고 현관문을 박차고 거리로 달려나가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가슴을 쥐어짜는 갑갑함. 남들 앞에선 춤도 못추고 노래도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안 부르는 성격이었지만 나 혼자만 있는 방 안에서는 두시간이 넘게 마구잡이로 춤을 추고는 했다. 그래야 속이 풀렸다. 막혀있던 숨이 조금은 트였다. 그렇게 몇 주를 살아갔다.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과 더불어 나를 가장 의아하게 했던 것은 도대체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아마 그 당시의 내 사춘기가 어디로 터지지 못하고 내면을 깊숙하게 관통하여 내 자신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 것 같다. 무한한 우주 속에 먼지보다 작은 내가 왜 굳이 힘들게 공부를 해가면서 버둥대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아무도 그 답을 주지 않았다. 단순히 대학을 가고 잘 살기 위해서, 라는 말은 내게 전혀 다가오지 못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결국에는 죽어버릴 존재로 태어나서 왜 굳이 힘들게 긴 생을 살다가야하는가. 당장 지금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내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게 어려웠다. 내가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좋아하는 문학작품을 접했을 때, 문구를 읽었을 때, 자아실현과 같은 철학적 물음을 접하였을 때, 매력적인 향을 맡았을 때, 해리포터를 읽을 때 등이었다. 그럴 때만 나는 살아있었다. 내가 의미를 발견한 것들은 전부 내게 행복을 안겨다주는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그 때의 나는 내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 라는 인생 철학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살아있음의 감각, 충만함의 감각이 도를 넘어설 때는 오히려 죽고 싶어졌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죽음 이후로 가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에 가장 사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볼 때 때마침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온 몸으로 느낄 때 나는 죽고 싶었다. 다만, 이렇게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있는 시간이 아닐 때의 나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면서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왜 이 아까운 시간들을 나는 이 쓸데없는 것들을 배우기 위해 애써야 하는가. 교과서에서 암기해야하는 모든 것들에는 어떤 깊이도 고민거리도 철학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신기하게도 삶에 어떤 미련조차 없었다. 아, 지금 죽어도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겠구나. 이상할 게 없겠구나, 와 같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기력감. 우울감. 그 당시엔 그게 우울증인지 몰랐지만.


  하지만 우울감이 들다가도 충만함이 찾아오고는 했는데, 이들은 늘 내 온 몸을 불태워버릴 정도의 강렬한 감각이었다. 나는 그 감각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깨닫고, 그것들을 꼭 쥐고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남들보다 우울함도 많지만 대신에 '좋음'의 감정 또한 잘 느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얼마 전에 한 심리학책에서 이 조증 역시 우울증의 연장성이다, 라는 내용을 읽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삶을 지탱해주었던 것이 결국엔 그 우울증과 같은 존재였다니 말이다. 조금 배신감마저 들었다. 흥미롭기도 했다. 사실 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아,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이 둘은 내 몸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요즘의 나는 명상을 배우면서 이 둘이 조금씩 부드럽게 섞여들어가는 느낌을 얻고 있다. 신기하다. 십 년이 넘게 노력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내 감정 다스리기가 명상을 통해 한 순간에 한 단계 나아가다니. 너무 감사하고 놀랍다.


  조만간 명상에 대한 글도 올려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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