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그러니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면 된다
상대방을 좋아할 때 내 감정의 깊이와 정도를 만드는 데에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이성이건 동성이건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감과 끌림은 그가 지닌 속성이 내 마음에 맞았을 때 발생된다. 그래서 그만큼 쉽게 누구를 좋아하지도 않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남이 보면 너무 쉽다고 여겨질정도로 단시간에 누군가에게 강하게 빠져들기도 한다.
그와 보낸 시간은 한 달이었다. 그 중 3주는 소개를 받고 관계를 쌓아가는 시간, 나머지 1주는 사귀기로 하고 만날 시간이 없어 연락만 이어가던 시간. 그런 짧은 시간이었다.
사실 우리가 운명이라고 여겼어. 늘 마음에 차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며 부족한 사랑을 했는데, 이번 만큼은 정말 마음껏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다고? 혹시라도 부서질까봐 소중하게 조심스럽게 앞서가는 마음과 행동을 가라앉혔어. 내 모든 말과 행동이 그리고 생각과 마음이 사뿐거렸고, 모든 순간을 음미하듯이 찬찬히 다가갔어. 아,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이런거구나 싶었어. 정말 잘 해줘야지, 아낌없이 사랑을 줄거야.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었던, 연애를 시작하면 사라지게 될 내 자유와 계발시간들에 대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처음으로 결혼식까지 상상해본 것 같기도 해. 정말 신기하지. 그만큼 정말 내가 만났으면 했던 이상적인 사람 같았고, 올 한해의 흐름의 끝에 이렇게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 정말로 인연 같았어.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지. 진실되게 다정하게 아껴줘야지. 그를 떠올리면 마음이 온통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찼던 것 같아.
내가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멀리 떠나 있던 10일 동안 그는 첫 7일 까지는 내게 매일 꾸준히 문자를 남겼다. 오늘은 일어나서 무얼 했으며 출근해서 무엇을 먹었으며 저녁에는 어떤 일정을 보낼 것이며 하는 소소한 일상들. 운동하는 사진과 음식 사진, 하늘 사진, 첫 눈의 흔적. 다정하고 나를 생각하는 내용들. 그리움의 감정. 기다림 같은 것들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10일이 끝나고 11일이 되고 일요일에 그가 보내온 문자를 읽으면서, 마지막 목요일에 문자가 끊겨 있길래 무슨 일일까 하고 봤더니 이별을 얘기하는 문자였다.
응?
우리는 소개로 만났다. 그리고 내가 떠나있는 10일을 기다렸다가 고백하는게 참기 힘들 것 같다며 가기 전에 마음을 전했던 사람이. 몇날 며칠을 고백하기 어려워서 어떻게 말을 꺼낼까 긴장과 실패의 연속이었다던 사람이. 나를 그렇게나 생각하고 관찰하고 신경쓰고 배려하는 것이 내내 행동으로 느껴지게끔 했던 잔잔한 애정을 주었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갑자기, 그렇다고 문자가 엄청나게 정성스럽지도 않은 것 같고, 목요일 낮 12시에 갑자기.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준비가 안된 것 같다는 말을 한다고?
그가 이전 연애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쏟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올해 초에 헤어졌다는 것도. 그 문자에 머리를 맞고 처음에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철렁하면서 먹던 음식들을 대충 입에 넣고 처음으로 반찬을 남겼다. 퇴실 준비를 하며 청소를 하는 내내 어떤 정신이었을까. 다행이 10일 간의 지독했던 명상 덕분에 울지는 않았다. 마음이 요동치지도 않았다. 그저,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자꾸만 배 안쪽에서부터 심장을 치며 올라왔고 나는 그 감각을 끊임없이 살폈다. 호흡했다. 그렇게 현재에 정신을 붙잡아두었다. 어쩌면 다행이었지.
나를 한 달 동안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설레하고 행복해하는게 눈에 보였던 사람인데, 나중에 소개해준 사람에게 듣기로는 일주일 전만 해도 내 크리스마스 선물을 뭐 해줄지 고민하며 신나했다던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낮 열두시에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두서없는 문자를 던져버리듯 보낸다고? 단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이전 사람을 잊지 못해서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처음에는 그렇다면, 그동안 이 사람이 행동으로 보여준 진심이 정말이었을까, 의심이 들었다가 진심이었던 것 같았다가. 그럼 도대체 왜? 내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나? 내가 오래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라는 자기검열로 갔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둘다 이유는 아닌 것 같아서, 그렇다고 갑자기 변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서, 한가지 가설로 향했다. 아, 전날 밤에 전 애인이 연락이 왔구나. 그래서 이 사람이 마음이 바로 흔들렸고 나에 대한 감정이 저절로 가라앉으면서 그렇게 급작스러운 통보 문자를 자연스럽게 보내버린 거구나.
명상을 통해 나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문자를 받고 세시간 쯤 뒤에 그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전화가 왔고, 미리 준비해두었을 것만 같던 답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고민 상담을 하면서 했을 것만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와 만나기 위해 계획하고 갈 장소를 고르면서 점점 이전 사람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대차게 차이더라도 마지막으로 고백해보고 싶다고. 아직 한 두달 감정 정리가 더 필요한 것 같다고. 나는 궁금했다. 혹시 그 사람에게 연락이 온 건 아니고? 머뭇거리다가 그건 아니라고 했다. 무엇이 진실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 그래. 어쩔 수 없지. 알겠어, 미련 없이, 잘 해봐. 이렇게 끊었다. 정말 내 마음이 그랬다. 아, 저정도로 가감없이 나한테 말을 할 상태면 정말 그 사람에 대한 미련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은 실오라기 같은 거구나. 혼자서 이미 마음 정리를 다 끝낸 것 같았다. 그리고 장문의 문자를 그에게 보내며 나도 마지막 감정 정리를 했다. 아주 다정하고 그동안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행복을 바라는 문자. 맞아,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나는 여전히 그가 좋아서 미움이 안 들었어. 내심 그가 나중에라도 다시 연락이 와서 돌이켜주길 원했을지도 모르지. 아마 그는 절대 몰랐겠지만, 나는 사실 마음이 꽤 깊었으니까.
소개해준 동생에게, 그리고 친한 원장님한테 전화로 얘기를 했다. 나는 걱정하는 그들에게 웃으면서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마음이 그쪽으로 가있다는데 어떻게 해. 내 일에 더 집중해야지.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어. 괜찮아. 생각보다 괜찮아, 마침 명상을 다녀왔기 때문에 오히려 더 괜찮아. 웃었다.
순간 순간 그 사람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언저리부터 아랫배까지 척수를 타고 묵직한 것이 울렁거려왔다. 명상법을 통해 가라앉혔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알아차리고 평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정말 괜찮은가? 잘 모르겠어. 사실 지금의 상황 속에서 내가 정말로 어떤 마음인지, 들여다보기가 겁이 나. 너무 깊게 파헤쳐버리면 꽤 아플 것 같거든. 그 사람에게는 전 5년에 비하면 나는 고작 한 달짜리 사람이었겠지만, 그마저도 사귄 시간은 일주일 남짓이었지만. 그치만 정말로 나는 인생을 걸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한 한 달이었거든. 사실 사실은, 설렌 적은 없었어. 그런데 설렘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그냥 아주 편안함과 안락함과 따뜻함과 사랑을 느꼈어. 내가 보호받는 느낌이었어. 내 편이 생긴 것만 같았어. 진실함과 진심은 이런 거구나 싶었지.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인연처럼 여겨졌어. 운명 같았어.
그래, 그런 사람이 한순간 돌아섰다는 게, 사실 믿기지가 않아. 꿈인가 했어. 그동안 보여준 것들은 무엇이었나? 남자의 다정한 행동은 얼마만큼의 진심이 들어가야 가능한거지? 그리고 그럼 이전 사람에 대한 감정을 느끼면서 나를 만나고 있었던 건가? 그 상태에서 사귀자고 고백했던 건가? 결국 나를 버리고 그 사람에게로 다시 가버린 거야? 내가 부족했던 걸까? 더 진심을 표현했어야했던 걸까? 사실 어떤 강한 후회나 자기 검열이 들지는 않았다. 앞선 이런 생각들은 단지 일순간 떠올랐다가 다시 흩어졌다. 그리곤 남은 감각을 살피며 깨달았다. 가장 크게 나를 건드리고 있고 힘들게 하고있는 감정은 아쉬움이구나. 아, 나는 이 사람을 이제는 못 보는구나.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싶었는데, 우리는 함께 할 수 없겠구나. 나를 좋아했던 감정이 생각보다 깊지는 않았구나. 붙잡고 매여둘 수 없는 인연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안타까웠고 조금 슬펐다. 그 뿐이었다. 엄청나게 좋아하게 된 그 사람을 다시 내 안에서 분리시키고 떼어내야하기 때문에 겪는 진통이었다. 그 외에 그 사람의 선택이나 상황 등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상황은 상황이고, 사람 마음이라는 것도 언제나 바뀌는 것이고, 그 사람의 전 연애가 어땠는지 나는 모를 일이고, 그냥 이제 그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감정의 공백이 아플뿐이었다. 맞아, 아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인 게 다행이지. 연애를 시작하면서 조금 포기하거나 밀어뒀던 것들을 다시 다 해볼 수 있게 된 것에서 묘한 안도감이 일었다. 아침 저녁으로 명상을 하고 싶었는데 통화하거나 연락하느라 못하게 될까 걱정되었던 것들도 해결되었다. 그래, 내 일에 집중해야지. 나는 아무래도 혼자 지내야할 운명인가봐. 어떻게 딱 명상을 마치고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상황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도 생각했다. 분명 의미가 있을 거다. 꽤 강렬한 경험이었으니까. 이러한 사람과 만났던 것, 그리고 명상을 하러 10일 간 들어갔던 것, 그리고 나와서 이별 통보를 받은 것. 이 세개가 함께 섞인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법했다. 그러니 원장님은 내게 그 사람과 관련된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 맞아. 반응하지 말아야지.
내가 할 일들에 집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