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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건, 그리고 반성

여청범죄수사관으로서 첫걸음

by 창순이

여성청소년범죄수사계에 처음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임자가 남겨둔 사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었다.


고소장부터 진술조서까지 사건 서류를 읽으며, 빨리 종결할 수 있는 사건과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건들을 분류해 나갔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사건은, 피해자 조사가 이뤄지기도 전에 고소취소장이 접수된 강제추행 사건이었다.


‘이건 바로 종결할 수 있겠다.’ 순간적으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고소 취소로 인한 각하 사건은 마치 식사만큼이나 자주 접하던 일이었기에, 한 건을 금세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하지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임 수사관으로서, 옆자리에 계신 주임님께 물어봐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타자 소리만이 조용한 사무실을 채우고 있었고, 보고서 작성에 집중 중인 주임님에게 말을 거는 일은 왠지 큰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모름지기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처럼,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용기를 내어 사건 서류를 들고 주임님께 조심스레 여쭈었다.


“주임님, 이거 고소장 들어오고 3일 뒤에 고소취소장이 접수됐는데, 그냥 종결하면 되겠죠?”


다행히도 주임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셨다.

그리고 5분쯤 뒤, 내 책상 위에 한 장의 쪽지가 도착했다.


<성폭력 사건 처리 유의사항>이라는 제목의 공문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성범죄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보복 우려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진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고소취소장이 접수되더라도 되도록 피해자 진술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


“쪽지 보냈으니까 확인해 보고, 고소인 한번 만나서 다시 한 번 취소 의사 확인해 봐.”


주임님의 짧은 설명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저 사건을 ‘빨리 처리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통합수사팀에서는 단순 민사문제나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지만, 여청수사는 달랐다. 사건 하나하나가 사람의 삶과 깊게 맞닿아 있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그들을 향한 시선은 차갑고, 왜 피해자가 피해자가 되어야 했는지를 따지는 대신 ‘왜 그런 상황이 생겼냐’는 비난이 먼저 쏟아진다.

성범죄 기사 댓글을 보다 보면, “여자가 처신을 잘했어야지”라는 비아냥 섞인 말들이 당연하듯 달린다.

피해자가 죄인이 되어버리는,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아직 여성청소년범죄를 수사하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이 부족했다.

이제는 사건을 얼마나 빨리 처리하느냐보다, 어떻게 다루느냐에 집중해야 할 때다.


사건 하나하나에 깃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수사관으로서 책임과 무게를 잊지 말자.

그것이 진짜 ‘수사’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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