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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27. 2018

뻔하디 뻔한 공감 에세이에 지친 이들에게

글쟁이로서의 반성과 의견. 이런 에세이는 어떨까요?

요즘 서점에 가면 ‘○○하지 못하고 사는 당신을 위한 ○○법’ 혹은 ‘나 자신을 긍정하며 살아가기로 했다!’류의 제목이 붙은 소위 ‘공감 에세이’를 쉽게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완전히 내 이야기잖아!”라며 고개 끄덕일 상황을 제시한 후 글쓴이가 겪어보니 이렇더라며 솔루션을 제시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공감 에세이는 마음속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많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지만, 독서마니아 중엔 공감 에세이의 인기에 눈살 찌푸리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주장을 요리조리 방법만 달리 소개한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게 쉽게 해결될 것처럼 써댄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기승전교훈’으로 이어지는 상투적인 에세이

글은 나 역시 아주 싫어한다.


며칠 전 간만에 들른 서점에서 에세이 코너를 훑으며 속으로 욕하던 중 “어라? 그런 글을 지금 내가 쓰고 있잖아? 책으로 묶은 이 글 역시 딱 그런 ‘공감 에세이’가 아닐까?”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일종의 자기 반성이자 자기변명, 그리고 에세이를 음미하는 법에 대해 내가 독자에게 건네는 제안이다.


공감 에세이가 흥하는 이유를 나쁘게 말하면, 책이 독자에게 아부를 하는 탓이다.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처음부터 기획했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품고 사는지 알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직장인으로서의 짜증나는 순간, 결혼해서 행복한 경험 등 온갖 감정은 페이스북과 커뮤니티를 훑어도 쉽게 알 수 있다. 특정 감정을 공유하는 일부에 집중해 그들을 대상으로 글로 풀면 바로 공감 에세이다.


‘소심한 남자’를 화자로 삼는 내 글을 예로 들자. 사람에 치여 힘들다는 현대인들이 많다. 너무 많은 약속, 지칠 정도로 많은 대화.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 주에 최대로 잡을 수 있는 저녁 약속은 두 번. 월수금 3일 약속 잡히면 전주 일요일부터 힘이 든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 이걸 글로 쓰자. ‘굳이 나갈 필요 없다. 방구석에서 혼자 놀아도 즐겁다’는 주제로 글을 쓰면 반응이 좋지 않을까? 마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받는 구조하고도 비슷하다. “불금이지만 난 혼자. 하지만 괜찮아. 내 영원한 친구 스마트폰이 있는걸”이란 글을 금요일 저녁에 게시하면 금요일 저녁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질 하던 지인들이 공감해서 꾹 누르겠지.


그렇다면 독자의 반응을 최우선으로 글 소재를 잡은 자체가 과연 나쁜 일일까? 관점에 따라 다르다. 책을 독서 소비자의 ‘니즈’를 채워주는 ‘상품’이라 본다면, 독자 반응을 신경 안 쓰는 책이 오히려 ‘나쁜’ 책이다. 반면, 책을 작가의 진심만을 온전히 묻어내는 일종의 ‘작품’으로 본다면, 독자 반응에 맞춰 기획한 책은 별로다. 자기 내면으로 긴 여행을 끝내고 유니크한 성찰을 담아 쓰는 책이 더 ‘좋은’ 책이다.


독자들이 “딴소리 마시고 그렇다면 개복치 님의 관점은 무엇인가요? 그저 우리의 공감만을 바라고 글을 쓰셨나요?”라고 내게 묻는다면 “하하하, 무슨 소리를, 전 그냥 제 진심을 담아 썼을 뿐……, (동공지진) 죄송합니다.” 아니라고 쉽게 말할 순 없다. 잡지 에디터와 소셜 에디터 일을 해왔다. 독자 쪽으로 확 기운 글만 쓴 지 언 10년이다. 뭘 쓰든 본능적으로 독자 관심을 떠올린다. 쓸 때마다 누가 곁에 앉아 따지는 상상을 한다.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다시 쓰라고!”


하지만 모든 글이란 독자와 필자 사이 어딘가에서 시작하는 법. 글쟁이 마음속엔 여러 가지 욕심이 충돌한다. 마음속에서 반응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소심이가 있는 한편(줄여서 ‘따봉 소심이’라 부르자), “이 글이 네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야? 어디서 주워들은 번지르르한 말을 갖다 붙인 건 아니냐고” 따지는 진정성 있는 소심이(줄여서 ‘진심 소심이’라 부르자)도 있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내 속에선 따봉 소심이와 진심 소심이가 티격태격댄다.


따봉 소심이와 진심 소심이는 결론적으로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어느 한쪽의 말만 들었을 땐 나쁜 글이 나온다. 진심 소심이 말만 듣고 글 쓴 적은 사실 없고, 따봉 소심이 의견이 우세한 경우는 많은데, 독자의 공감에서 출발하더라도 결론까지 독자에게 아부하려 할 때 글은 조잡해진다.


언젠가 ‘당신 혼자 만으로 충분하다. 사람은 외로울 줄 알아야 한다’라는 멋진 문장을 떠올리곤 그 주제로 글쓰기를 시작했다가 포기했다. 절절히 체감하지 않은 스토리엔 생생함이 없었다. 도리어 혼자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완전히 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에 치여 사는 이들도 외로움을 탄다. 사람이 있어도 힘듦, 없어도 힘듦. 그렇다면 해결책은? 있을 리가. 인생이란 딜레마. 글을 이렇게 쓸 순 없어 폐기했다.


앞선 질문 “그저 독자의 공감만 노리고 글을 썼나요?” 질문에 정확히 답하자면, 그런 글은 안 쓰려고 합니다만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이고 내 안의 ‘따봉 소심이’가 언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에 장담은 못 한다. 만약 내 글 중 식상한 공감글을 발견했다면 따봉 소심이가 이겼다고 여기고 한껏 욕해주길 바란다.


덧붙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는 삶의 미묘한 결이 묻어있는 에세이다. 웃기다가 슬프고, 슬프다가 웃긴, 현실이 소설보다 신기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읽고 나면 설명키 어려운 작은 덩어리가 내 속 어딘가 남은 느낌을 주는 에세이다. 몇 년 사이 내게 그런 덩어리를 남긴 글은 작가가 쓴 책이 아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느 유저가 올린 ‘신림동 신선 썰’, 신림동 에서 고시 공부하던 글쓴이가 자신이 만난 장수생(‘신선’이라 부른다고 한다)들에 대해 쓴 글인데 이야기가 펄떡펄떡 살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림동 신선 썰’로 검색해보시길.


에세이와 스릴러 소설의 공통점은, 둘 모두 결론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손에 땀을 쥐는 추적 과정이 스릴러 소설의 재미이듯, 에세이에선 이야기와 이야기가 자아낸 분위기가 독자에게 남는 무엇이다. 범인만 안다고 스릴러 소설이 재밌지 않듯, 교훈만 암기한다고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에세이와 스릴러 소설의 차이점은, 스릴러는 다시 읽으면 별로지만 에세이는 자꾸 읽어도 재밌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겪은 삶의 경험이 묘하게 나와 겹쳐지는 느낌, 좋은 에세이는 읽을 때마다 포근해진다.


P.S.

이 글을 쓴지 1년 뒤, 그리하여 책이 출간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멸종 위기인 줄도 모르고>라는 제목으로 말입니다. 읽으시면서 큭큭대고, 큭큭대다보면 어느새 사는 게 나쁘지만은 않게 여겨질 수 있는 책이 되길 바랍니다. 선선한 가을 바람 같은 느낌처럼요.


-> YES24는 요기서

-> 교보문고는 요기서

-> 알라딘은 요기서

책이 무려 형광색, 겉장에 쓴 건 출판사 담당자님이 쓴 것.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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