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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Aug 19. 2019

프롤로그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난 개복치들에게

“안녕하세요 작가님. H 출판사의 김보람 에디터입니다. 저희 출판사와 책을 내실 의향이 있으신지 문의드립니다.”


지난해 초 어느 날, 이런 메일을 받았다. 가짜 메일인가 싶어 꼼꼼히 읽어봤더니 세상에! 진짜 출간 제안이었다. 에디터님께서 온라인에 써둔 내 글을 봤고, 좋아하는 독자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소심한 사람들의 작은 마음을 담으면 어떨까 싶어요. 작은 일에 예민하고, 머뭇거리고, 늘 당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요.”


유명세도 없는 필자의 에세이를 누가 읽겠냐 싶었지만, 출판 자체만으로 두고두고 자랑할 거리라 넙죽 제안을 물었다. 어쨌든 난 진짜 소심하고, 머뭇대는 사람 아니던가. ‘평소대로 쓰면 책까지 된다니 글쓰기가 더욱더 즐거워지겠군.’ 동네방네 자랑했다. 집필 활동에 매진할 조용한 카페를 물색했다. 손가락 피로가 덜하다는 기계식 키보드를 마련했다. 그리고, 정작 글은 한 자도 못 썼다. 계약 맺은 지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출판사는 원래 쓰던대로 에세이를 써주길 바랐다. 나 역시 사연에 적당한 교훈만 붙이면 글이 될 줄 알았다. ‘세상엔 나만큼 찌질한 이들도 많을 테니 공감도 사고, 도움도 되겠지.’ 걷는 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면 발

걸음이 꼬인다고 했던가. 독자에게 도움 될 부분을 떠올리자 도통 글이 써지지 않았다.


참고차 에세이를 몇 권 사서 읽었다. 남다른 경험과 긍정적 지혜가 가득했다. 대단하다 싶었으나 그뿐이었다. 난 그렇게 쓸 수 없었다. 잡지 에디터 생활 몇 년 하다가 그만두고 마케팅 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이다. 기억 구석구석을 뒤져도 독자들에게 전할 중요한 깨달음은 없었다. 글 쓰는 ‘재주’는 있지만 글 쓸 ‘내용’이 없는 글쟁이인 셈이다. 내용 없는 삶이라 생각하니 어찌나 슬프던지. ‘리프레시’란 핑계로 컴퓨터 게임에 매진했다. 그러다 결국, 집필 마감이란 최후통첩을 받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에세이는 근본적으로 ‘아무 글’이다. 대단한 메시지가 없더라도, 한 사람분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일상도 누군가에게 읽을거리가 될지 모른다. 적어도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란 타산지석은 되겠지. 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쓰자. 읽는 이를 위해 양념 삼아 재미만 한 숟가락 넣어서.


그리하여 이제부터 여러분이 읽을 글은, 한국 사회에 태어난 미약한 인간이 코리안 스탠더드에 가까워지고자 아등바등하며 사는 이야기다. 때론 포기하고, 때론 정신승리 하는 모습을 담았다. 보편적 통찰은 없으며 설령 독자 당신이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글쓴이 책임은 아니다. 그저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 남자

성우 목소리를 상상하며 구경꾼의 심정으로 읽어주시길. “게으른 인간 남성이 소심한 습성 탓에 쭈뼛대고 있군요. 건기가 오면 말라 죽겠지만 인간 남성은 그 사실을 아직 모르죠.”


마지막으로 이 책에 공감할 사람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아직 책을 사지 않았다면 해당 사항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없다면 구매하지 말아주세요. 흑흑


1. 사소한 사건 하나 잊지 못해 괴로운 예민 보스

2. 주문 음식이 30분째 안 나와도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소심이

3. 타고난 예민함과 소심함 탓에, 여기저기서 치여 살며

4. 감정 소모가 없는 감정의 청정지대를 꿈꿔본 당신


그럼,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별에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난 불운한 영혼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안녕.

-2019년 여름 이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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