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사건 하나에 부들대는 소심이야말로 삶의 디테일을 잡아낼 수 있다
소심한 당신은 훌륭한 글쟁이
지망생 : 잡지 에디터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
나 : 혹시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나요?
지망생 : 네,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해요.
나 :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있으시고요?
지망생 : 물론이죠. 전 저 자신을 믿어요.”
나 : 흠…, 곤란하군요. 글 잘 쓰기 쉽지 않겠어요.
지망생 : 네?
글 쓰는 업을 하다 보니, 종종 글 잘 쓰는 방법을 질문 받곤 했다. 직접 찾아와 묻는 분도 계셨다. 근본적으로 어려운 질문이라 늘 곤란해 한다. 글쓰기에 대한 ‘공인 답변’은 있다. 가장 유명한 ‘다독, 다작, 다상량’. 말할 필요도 없이 쓸모없는 답변이다.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니! 그건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아침 식사 거르지 마시고, 술 담배 끊고,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만큼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 밖에도 문장을 짧게 쓰라느니, 쉬운 말을 사용하라는 조언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웰메이드 글 수준까지만 해당할 뿐, 만약 글 쓰는 창작자로 살아야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많이 읽히고 안 읽히고를 떠나 세상에 유의미한 글이라면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과, 그걸 표현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세상 구석구석의 디테일을 세심하게 빨아들인 후, 자기만의 해석을 덧붙여 글이란 형태로 내뿜는다. 이러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후천적으론 얻기 어려운 성격적 자질이 필요한데 바로 소심함이다. 감히 말하건대 소심함은 좋은 글쟁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어이, 여보시오. 작가 중에 외향적인 사람도 많다고요. 이O진 평론가님 같은 사람도 있잖아요”라고 반론한다면 글쎄. 소심이는 소심이를 감지하는 레이더 비슷한 게 있는데, 이O진 평론가님은 미묘한 꾸부정함(?)과 순간순간 표정에 드러나는 내향성만 봐도 선천적 소심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긴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면 좋은 글쟁이 되기엔 소심함이 꼭 필요하다는 것. 이유를 대자면.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 글을 가지고 놀려면 중고등학생 시절 교과서 이외의 책을 어느 정도 읽어야 한다. 그런데 잘 나가는 중고등학생들은 애초에 책이나 읽기며 유년기를 보내기엔 너무 바쁘다. 공부해야지, 운동하고 친구들이랑 놀러 다녀야지. 시간이 빠듯하다. 반면, 친구도 없고, 갈 때도 없는 집순이 집돌이는 어떨까. 안락한 자기 방에서 텍스트가 선사하는 세계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사소한 사건 하나하나에 부들대는 소심이의 특성 역시 글쓰기에 유리하다. 난 중학교 때 노래방에서 내 목소리가 삑사리 났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김현철 노래였는데 키를 잘못 잡았다. 쓸쓸히 빛나던 노래방 푸른 빛, 키득거리는 친구들의 비웃음, 깔끔히 포기하고 다시 불렀으면 될 것을 일부러 효과 넣은 양 교묘히 음을 바꾸려다가 더 바보처럼 불렀을 때의 황망함, 또다시 키득키득. 지금도 부끄럽다. 운 나쁜 놈은 일이 꼬이면 두 배로 꼬인다는 교훈 아닌 교훈을 주는 삑사리 사건. 생생한 글은 좋은 글이 되기 쉬우며, 생생한 글은 생생한 디테일에서 나온다. 고로 예민한 소심이가 글쓰기에 유리하다.
여러분은 소심한 성격인 탓에 겪는 최악의 경험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낯가림? 불이익? 불이익이야 자주 당하다 보면 정신승리하는 법에 익숙해진다. 낯가림은 매우 괴롭지만 껴안고 살만한 고통이다. 때때로 아니 자주 발생해 소심한 삶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건 자기 의심이다. 상황이 내 맘처럼 되지 않고 (소심이의 일상이 늘 그렇듯) 의도와 달리 흘러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그리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머리를 정리하고자 떠올리는 생각들은 오히려 꼬리를 물고 우리를 생각의 연옥으로 데려간다.
“분명 내 잘못이겠지?”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는 평소의 강박이 오히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혹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스스로마저 속인 거짓으로, 마음 깊은 곳엔 그러길 바라는 욕망이 숨어있던 것일까?”
머릿속엔 과거의 순간을 연거푸 재연하는 ‘작은 극장’이 설치된다. 씬(scene) 제목은 〈내가 왜 그랬지?〉 무대에 등장한 과거의 내가 썩 마음에 들던 여자 사람에게 “너 같은 애는 나를 안 좋아 할 거야”란 유치한 대사를 날린다. 여자 사람은 “아니! 뭐 이런 상큼한 바보가!”라며 떠나간다. 으아~ 부끄러워. 다시! 대사를 조금씩 바꾸며 씬은 수십 수백 번 재연되고, 매번 실패한다. “어떻게 했어도 난 잘못했을 거야.” 자괴감은 커져간다.
하지만 이런 자기 의심이 좋은 글쟁이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좋은 글이란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다. 우리 머리는 간사해 모두들 외치는 생각 중 하나를 골라 내 것인 양 속인다. 우리 마음 역시 간사해 크게 고민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대단한 진리인 양 속이고는 글로 끼적이게 한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아픈 만큼 성숙합니다.’ 온갖 쉬운 주장들. 주장 자체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 주장으로 이끄는 이야기가 요식적이고 뻔하다. 고민 끝에 결론이 나온 게 아니라 남이 내린 결론에 이야기를 갖다 붙여서 그렇다.
소심이는 그렇게 글을 쓰지 않는다. 스스로 내린 결론마저 다시 거둬들여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속에서 갈고 닦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때로 그 이야기의 결론은 “7년간의 치열했던 사랑이 끝났지만, 전 사랑에 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습니다. 사랑이란 매번 상황에 따라 다르더군요”란 허망한 결론일지언정, 그 이야기엔 한 줄 명언으로 설명하기 힘든 결이 있다.
불안한 어린 시절, 주목받지 못하는 일상…, 소심해서 잃는 기나긴 목록 구석엔 짧디짧은 이득 리스트가 있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저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 말했듯 고통은 우리가 무언가를 탐구해야 할 동기가 된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기에 오히려 인생의 결을 알게 되는 천운을 타고났으니 소심이 여러분은 좌절하지 마시길. 불행할지언정 현명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