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

엿같은 회사도 고맙다

by 율무


나는 꿈이 많았고, 계속 바뀌었는데 가장 오래된 꿈은 작가였다. 더 정확히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글 쓰는 것에 딱히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었지만, 출판사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여러 출판사에 지원해 봤지만 다 떨어졌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편집자로 지원한 것부터가 글렀다.

그러다 우연히도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다. 내가 원하던 문학을 다루던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내가 들어간 출판사는 교육 분야의 출판사로, 문제집이 주된 판매 제품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 문제집을 만드는 과정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 직무였지만, 그래도 출판사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게 조금은 뿌듯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었지만,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간 걸 후회하지 않는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아는가?

보통은 '작가가 책을 쓴다 - 디자인 및 편집을 한다 - 인쇄한다 - 서점에서 판매한다' 이 정도?

근데 내가 입사해 보니 저 사이사이에 엄청난 과정과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다.

책을 쓰고 검수하는 사람만 해도 수십 명이고 인쇄부터 서점 사이에는 더 많은 과정들이 있다.

나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신기했고,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책을 제작하는 부서에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그래서 내가 알게 된 책이 만들어지고 판매되는 전체 과정은 놀라웠다.

누군가 원고를 작성하고 디자인한다. 그럼 이걸 제작부서에서 넘겨받아 지시서(발주서)를 작성한다. 용지는 뭘로 해주고, 색은 이걸로 해주고, 윤전인지 매엽인지 이런 것들. 그게 인쇄소로 넘어간다. 그럼 인쇄소에서 기계만 가지고 띡! 찍어내는 게 아니다. 컴퓨터로 만든 색채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조색을 하고, 판을 만들고, 찍어서 말리고, 재단하고, 코팅하고, 제본하고...(재단, 코팅, 제본은 거의 각각 다른 곳에서 한다)

그럼 이제 또 편집자나 디자이너들이 감리를 나가거나 가제본을 뽑아서 검수한다.

색이 제대로 맞게 나왔는지, 잘못 인쇄된 건 없는지. 이상이 없는 책들은 다시 포장되어 물류센터로 넘어가고, 주문에 따라 배송이 나간다. 서점으로 바로 배송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도매처인 총판과 거래하고 총판에서 서점으로 각각 배본한다.


내가 이 책 한 권을 소비자로서 서점이든 인터넷이든 구매한다. 그럼 판매처에서 주문서를 취합하여 회사에 바로 주문을 넣든지, 총판에 주문을 한다. 그렇게 회사로 넘어온 주문을 확인하고 출고 처리한다(이게 내가 회사에서 한 일이었다) 출고 처리하면 물류센터에서 주문을 받고 책의 수량을 확인해서 책을 실어 나르고, 수량에 맞게 배차하고, 시간을 맞춰 배본한다.


그러니까 내가 서점에서 우연히 골라든 15,000원짜리 책 한 권에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시간과 정성과 노력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도 책을 매우 아끼며 보지만, 회사를 다니고부터는 더 소중히 보게 됐다.

그리고 책 맨 뒷장에 있는, 책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먼저 보며 '책 만드느라 고생하셨네요' 하고 보는 것이다.





내가 영업관리팀에서 일하며 배운 건 이런 세상이었다. 책 한 권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들어간다는.

근데 인사팀에서 배운 건 또 다른 세상이었다.


나의 전 회사는 인쇄와 물류를 담당하는 자회사를 두고 있었고, 나는 그 자회사의 업무를 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쇄기계가 굉장히 크고 시끄럽다는 것과 기장, 부기장이라는 직함이 있다는 것과 그들은 한 팀이 되어 일한다는 것, 남들보다 빨리 출근해 남들보다 늦게 퇴근한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매출과 주문만 신경 쓸 때는 몰랐다. 책이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대체 무슨 사고가 또 터진 건지, 인쇄는 왜 이렇게 불량이 많은지, 제본은 왜 이따위로 되었고, 대체 몇 부나 불량이고, 전수조사를 해야 하는지 등등.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관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지, 일손과 시간은 얼마나 부족한지, 기계를 돌리는 과정 중에 사람 손이 얼마나 필요한지, 인쇄 품질에 습도와 온도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각각의 단계마다 얼마나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지.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넓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구나.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런 직업과 작업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책 한 권 가볍게 사서 읽었을 것이다. 종이 한 장, 색깔 하나, 글자 하나에도 수없이 많은 시간을 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엿같은 회사였어도 그 회사에서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쓸모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역시나 그렇다.

그 엿같은 회사가 지금은 이렇게 나의 글이 되어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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