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이 들어오자 내 앞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가 내 팔을 톡톡 두드리셨다. 나는 방향을 물어보시려고 그러나 싶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는데, 그게 아니라 나더러 먼저 타라고 하셨다. 이 승강장은 간격이 넓은데, 캐리어가 있으니 천천히 먼저 타라는 거였다.
뜻밖의 호의에 감사 인사를 하고 안전히 승차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지켜보고 계셨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셔서 감사하다고 또 한 번 인사했다. 나이 많은 어른의 호의는 대체로 세심한 구석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희한하게 어른들의 호의를 종종 받는 편이다. 예전에 한 번은 지하철 문 앞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서 읽으라고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의 호의를 받으면 어쩔 줄 모르겠음과 동시에 마음이 온화해짐을 느낀다.
사실 역을 잘못 내려서 안 해도 될 환승을 하던 차라 짜증이 났었는데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호의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호의를 거절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장면의 배경은 파리의 지하철역이다. 파리는 유럽여행의 두 번째 도시였고, 듣던 대로 지저분하고 사람이 많았다. 런던에서 새벽에 기차를 타고 넘어와 깨끗한 정신이 아닌 데다 불어는 영어보다 구불거렸다. 파리의 지하철에선 절대 한 눈을 팔아선 안 된 댔다. 겉옷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도 순식간에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친구는 몽롱한 정신을 날카롭게 세웠다.
엘리베이터를 찾을 수 없어 별 수 없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어찌나 많으며 간격은 어찌나 좁은지. 마지막 몇 계단을 남기고 지쳐서 낑낑거리고 있는데, 내 옆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흑인 청년이 다시 내려와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데 들을 정신도 없었고,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나는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단호하게 노!!!!! 를 외쳤다. 느낌표가 무려 다섯 개짜리 노였다. 그러면서 캐리어를 내 쪽으로 조금 당겼던 것도 같다. 그러자 흑인청년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아임 쏘 쏘리 라고 했다. 무려 세 번이나. 그리고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물론 그가 나를 도우려 했는지, 내 가방을 훔치려 했는지는 알 수 없기에 그 상황에서 내 가방을 지킨 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간발의 차이로 지하철을 놓치는 걸 보며 좀 더 부드럽게 거절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대가 없는 호의가 되려 상처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의 반응이었으면 좋았겠다고.
대가 없는 호의에는 익숙하지가 않다. 그건 내 타고난 기질에 의심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배신당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보다 어린 나는 대가 없는 호의를 그대로 받고 기뻐했었다. 그게 실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베푼, 호의를 가장한 제안이었음을 알게 되면 적잖이 상처받았다. 1을 받으면 1을, 아니 그 이상을 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머리가 띵했다. 세상이 그런 원리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부터는 호의에 더 냉정해졌던 것 같다.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알려주면 좋겠다. 내가 너에게 호의를 건네는 이유는 이런 것을 원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도 나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줘. 그건 차갑지만 깔끔하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대가가 없어 보이는 호의를 베풀면 나는 그 진의를 확인하고 싶다. 그럴 때 나는 농담을 택한다.
“저한테 왜 잘해주시는 거죠? 원하는 게 뭔지 당장 말해!”
그럼 원하는 게 없다고, 그냥 주고 싶어 주는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은~’하며 속을 내보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의 반응에 확실하게 마음이 놓인다. 그럼 그렇지. 그 순간 호의는 거래로 바뀐다.
내가 대가 없는 호의를 의심하는 이유는 내가 그런 호의를 많이 베풀며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거나 자리를 양보하거나 먼저 타도록 배려하는 것들은 작은 호의지만 분명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거절할 가능성을 무릅쓰고 먼저 다가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호의는 관심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타도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을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할아버지는 거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나는 그날의 배려를 내내 생각하며 하루를 기분 좋게 보냈다. 어떤 대가 없는 호의는 타인의 하루를 바꾸는 힘이 있다.
살다 보면 이렇게 그 이면에 아무런 것도 없는 호의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받은 호의들은 작은 것이었고, 때때로 나는 그러한 호의조차 의심하며 살아왔지만 목숨을 건 호의도 대가 없이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만류해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깊은 물속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생명을 살리겠다는 마음만으로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품는 사람들을 보면 믿을 수 없어 감탄하고 만다. 나는 1을 주면서도 1을 되받지 못하게 될까 봐 망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호의를 베풀기 전에 계산이 앞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호의를 품고 베푸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세상은 어쩌면 그런 호의들이 모여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한 마음으로 타인에게 선뜻 내미는 손길들이 엉망진창인 세상도 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2023. 6. 9.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