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는데 냉난방 공사 중이라 자료실 이용이 불가했다. 얼마 남지 않은 책을 마저 읽고 반납할 생각이었는데 읽을 곳이 없어졌다. 열람실을 이용해도 됐지만, 이상하게 열람실에 가고 싶지는 않아서 밖으로 나왔다. 날씨도 선선하니 도서관 앞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여유롭고 한적하고 낭만적인 오전의 독서가 될 것 같았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책을 읽기 좋을만한 자리를 탐색했다. 한쪽에선 전지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들을 피해 그늘지고 조용해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책을 읽어볼까 할 때, 어떤 중년의 부부가 내 앞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조용한 강아지 한 마리도 함께였다. 아저씨가 아줌마에게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여줬는데 엄청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법한 꼬부라지는 멜로디였다. 아줌마는 이게 그거야? 맞아? 등의 말을 했고, 아저씨는 맞아! 맞다니까! 이런 말을 했다. 저런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어떤 장면일지 심히 궁금해졌다. 둘은 계속해서 그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줌마가 묻고 아저씨가 답하는. 자꾸 대화에 귀가 열려서 옆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책장을 세 장쯤 넘기는데 이번엔 전동 휠체어를 탄 할머니가 슝~하고 오더니 내가 앉은 벤치에 턱 하고 발을 올렸다. 난 원래 잘 놀라는 편이라 조금 놀랐지만 계속 책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할머니는 요양보호사와 함께인 듯했다. 내 앞 벤치에는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아저씨가 앉았는데, 할머니와 요양보호사는 아기를 보며 예쁘다, 잘 웃는다, 그래 그렇게 웃어야 너도 좋고 모두가 좋지 등의 말을 했다. 아기를 밀고 나온 아저씨는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하며 아기도 역시 웃어야 예쁜 것일까, 아기 때부터 잘 웃어야 모두의 사랑을 받는 걸까 따위의 잡생각을 했다. 요양보호사에게 앉아 쉬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억양에 경상도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할머니 권유로 요양보호사는 내 왼쪽 벤치(내가 처음 앉았던 벤치)에 앉았다.
이로서 네 개의 벤치가 가득 찼다. 할머니는 자리를 옮기지 않으시고 요양보호사와 대화를 시작하셨다. 그러니까 나를 사이에 두고 공을 던지듯 말을 주고받으신 건데, 내 머리 위로 말들이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책은 세 장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바꿔 드려야 하나 하던 차에 할머니가 휠체어를 움직이셨다. 요양보호사가 따라나서려 하자 앉아 있으랬다. 멀리 안 나가니까,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쉬고 있으라고. 그들은 서로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였고, 서로를 향한 존중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그도 요양보호사와 이런 우정을 유지했을까. 가끔 공원에 나가 산책도 했을까.
할머니가 떠나고 혼자 앉아 있던 요양보호사도 어디론가 갔다. 다시 조용해져서 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음악이 들렸다. 악기를 잘은 모르지만 심벌즈 소리도 들리고 색소폰 소리도 들렸다. 어디서 들어봄직한 트로트를 관이나 현악기로 연주하는 것 같았는데 현장감이 엄청나서 어디 복지회관 같은 데서 수업을 하나 싶었다. 근데 그게 아니라 누군가 그런 류의 음악을 크게 튼 거였다. 근처를 살펴도 근원지는 알 수 없었는데 스피커가 엄청 큰 것 같았다. 구슬픈 색소폰이 연주하는 트로트가 나쁘지 않아서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었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왼쪽 벤치로 할아버지들이 들어왔다. 처음엔 두 명이었는데 세 명이 되고 네 명이 됐다. 그들은 목소리가 컸다. 돈을 주고받으며 내가 5만 원 줬으니까 네가 2만 원 줘야지, 그래 내가 그때 그거 줬으니까 주는 거지. 이런 말들을 했다. 한 할아버지는 다른 할아버지에게 카메라를 팔고 싶은 듯했다. 황학동이 멀어서, 망원렌즈가 어쩌고 하며 살 거야? 하고 물었다. 판매대상이 된 할아버지는 물건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사냐고 했다. 그러자 판매주체 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지금 집에 가서 가져온 댔다. 30분이면 되니까 카메라 사고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그러니까 판매대상 할아버지는 만류하며 일단 점심부터 먹고 저녁에 연락할 테니 저녁에 보자 했다. 판매자 할아버지는 “야! 저녁까지 살아있을지 어떨지 어떻게 아냐? 생각났을 때 해야지.” 했다.
그 말에 갑자기 옆구리를 찔린 듯 짧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농담은 죽음과 가까워진 사람들이 할 때 더 뾰족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일단 점심을 먹고 카메라 거래는 저녁에 하기로 한 모양이었지만 계속해서 카메라 얘기를 했다. 캐논과 니콘의 차이점에 대해, 망원렌즈와 그 밖의 렌즈에 대해. 카메라에 취미를 가지신 분들이구나 싶으면서 내가 책에는 하나도 집중하지 못하고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다가 오늘 반납 못하겠다 싶어서 얼른 책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에는 젊은 엄마 여럿이 유모차를 줄줄이 밀고 지나갔다.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기에게 참새를 보라고 하면서 나비야 노래를 불렀다. 엄마의 노래에 아기들이 옹알이를 하는 소리도 들렸다. 평일 오전의 공원은 나이가 아주 많거나 아주 적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처럼 어중간한 사람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등장인물 같았다. 책을 조금만 읽으면 다 읽을 것 같은데 잘 읽히지 않았다. 타인의 내밀함을 담은 글이라 더 그랬다.
갑자기 둥둥 거리는 트로트 음악이 아주 크게 들리며 개를 끌고 온 아저씨가 내 앞 벤치에 앉았다. 그는 둥글고 커다란 스피커를 벤치에 내려놓았다. 저런 스피커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반주에 맞춰 노래도 따라 불렀다. 소리가 커도 너무 커서 귀가 울리고 책에도 진동이 느껴졌다. 저런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으면 귀가 아프지 않을까, 많이 무딘 사람일까 생각했다. 세 곡쯤 그냥 참고 책을 읽어보려 했지만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 미처 읽지 못한 책을 덮고 일어섰다. 조금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륨의 크기도 그러했지만, 나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어쩐지 네 개의 벤치가 놓인 곳이 작은 무대처럼 느껴졌다. 나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역할이고, 그 주변을 여러 사람들이 분주히 등장하고 퇴장한다. 움직이지 않고 책에 집중한 듯한 나는 사실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내가 퇴장해도 연극은 계속된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살아있는 것 같은 연극. 여유롭고 한가하게 책을 읽고 반납할 수 있으리라는 나의 계획은 무참히 깨졌다. 내 기대와 다르게 공원은 시끄럽고 복작거렸다. 책을 읽기보다는 그냥 있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각각의 사람들이 각각의 사정으로 공원에 온다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본질적으로 공원은 시끄러운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 취미와 만남과 우정과 거래가 버무려진 공간. 살아있는 공원을 알게 된 아침이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은 탓인지 배가 고파졌다. 집으로 가서 맛있는 한 끼를 차려서 천천히 먹을 것이다. 그런 다음 든든한 마음으로 무사히 남은 책을 읽을 것이다. 결국 할아버지들의 카메라 거래가 무사히 이루어졌을지 궁금하다.
2023. 6. 12.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