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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Jun 14. 2023

나의 전용미용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미용실에 가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란 긴 머리를 귀밑까지 짧게 자르거나 휘황찬란한 염색을 하는 경우인데, 후자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실컷 해봤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에만 미용실에 간다고 할 수 있다. 머리를 조금 다듬고 싶으면 스스로 가위를 든다. 긴 머리의 끝을 조금 다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고개를 숙이고 뒤에서부터 머리를 전부 모아서 앞으로 끌어온다. 여러 번 빗질해서 머리를 한 번에 잡고 자르고 싶은 만큼 일자로 잘라주면 된다. 숱이 많아서 한 번에 자르는 게 버거우면 두 덩이로 나눠서 잘라도 된다. 다시 고개를 들고 양쪽 대칭을 맞춰 다듬으면 끝이다. 

이렇게 자르면 길이는 거의 변화가 없고 층만 살짝 생긴다. 머리끝이 너무 상했거나 머리가 무거울 때 셀프로 하기 좋다. 이 정도 다듬기에 돈을 쓰는 건 아깝다. 머리에 크게 미련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제멋대로 잘라볼 수 있다. 봐주기 힘들 정도로 망하면 짧게 자르면 되니까. 언젠가는 긴 머리를 단발로 만드는 것도 도전해보고 싶다. 


   내가 미용실을 가지 않고 혼자 머리를 이리저리 해보는 것은 엄마의 영향이 클 것이다. 엄마는 나의 전용미용사로, 내가 원하는 거의 모든 머리를 해줄 수 있다. 내가 열두 살이던 무렵 엄마는 여성 복지회관에서 미용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목수의 딸로 태어나 원체 손으로 하는 대부분을 잘하던 엄마는 언젠가 미용을 꼭 배워보고 싶었다고 했다. 동사무소에 갔다가 복지회관의 수업을 발견하고, 그렇게 ‘생활미용’이라는 과목의 수강생이 되었다. 생활미용은 전문가적인 수준보다는 실생활에서 써먹기 좋을 미용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엄마가 미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내 머리는 휘황찬란한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처음 내 머리카락은 엄마의 실습을 돕기 위한 도구였다. 빨갛게 염색을 하거나 매직을 할 때도 있었고, 안 그래도 꼬불거리는 곱슬머리를 더 꼬불꼬불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엄마가 내 동의 없이 실습을 한 것은 아니지만, 레게머리 땋기를 배우고 와서 내 머리를 반짝이는 줄과 엮을 때는 견디고 앉아있기가 고역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었던 나는 뭐가 멋인지도 모르면서 멋을 추구하던 초딩이었으므로 그때의 머리들이 완전히 맘에 들지는 않았다. 엄마가 내 머리를 망쳐놔서 학교에 못 가겠다고 말했던 적도 있다.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어린이였다면 좋았으련만, 그보다는 남들의 시선이 중요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교칙에 의해 머리에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특히 고등학교는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학교여서 3년 내내 지루한 단발머리를 유지해야 했다. 엄마는 그 기간 동안에도 생활을 위한 미용기술을 열심히 연마하여 반의 에이스가 되었다. 그리고 기술은 가족을 넘어 다른 곳을 향했다. 미용선생님이 하던 미용봉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반 전체가 참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둘이 빠지고 결국엔 선생님도 빠지면서 봉사모임의 회장 직을 엄마에게 물려줬다. 엄마는 갑자기 ‘허브미용’이라는 봉사모임의 장이 되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사할린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머리를 자르거나 볶았다. 그 일을 무려 이십 년 가까이 지속했다. 

   나도 엄마를 따라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주로 방학 때 봉사점수를 받기 위해서였다. 잘린 머리카락을 쓸거나 다 쓴 도구들을 씻는 일을 했다. 엄마가 마는 파마는 잘 풀리지 않고 예쁘다고 소문이 나서 할머니들의 눈치 싸움이 치열했다. 봉사하는 인원이 줄어들면서 모두에게 머리를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파마는 미리 예약을 해야만 했는데 새벽 5시부터 이름을 적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들이 다른 이모들보다 엄마에게 머리를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머리를 하고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간 할머니가 고맙다며 러시아 초콜릿과 과자들을 가져다줄 때, 어린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간혹 할머니들은 러시아어로 대화를 했는데 엄마는 대충 알아듣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이십 년 가까이 귀동냥한 결과였다. 아무리 들어도 욕처럼 들리는 러시아어를 대충이라도 알아듣는 엄마가 빛나 보였다. 


   코로나가 본격화되면서 봉사는 잠정 중단되었다. 조만간 괜찮아져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했던 기대도 점점 흐려졌다. 매주 수요일마다 분주히 서두르던 아침은 사라졌다. 할머니들도 처음 얼마간은 덥수룩한 머리를 참으며 봉사가 재개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엄마가 아니면 머리를 맡기기 싫다고 미용실을 안 간다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 나아져도 연락은 없었다. 엄마는 남아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먼저 전화를 하고 찾아갔다. 허브미용의 마지막 남은 인원은 엄마와 한 명의 이모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봉사 공간은 이미 치워진 지 오래였고, 물품들은 지하 창고로 옮겨져 있었다. 마구잡이로 갖다 박아두었다, 고 엄마는 표현했다. 에센스나 트리트먼트 같은 물품들이 대거 사라져 있기도 했다. 엄마는 화가 나서 담당자에게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일을 지시한 담당자는 이미 다른 부서로 가버렸고 죄 없는 이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릴 순 없었다. 이십 년 봉사의 끝이 너무나 허망했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늘어놓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모두가 처음 겪는 혼란이었고 고통의 시간이었으니 봉사자들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오랜 봉사의 마지막이 그런 모습인 건 못내 아쉬웠다. 지금보다 젊은 엄마 삶의 한 조각이 거기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럼 할머니들은 이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할까? 물었다. 엄마는 이미 고령이던 할머니들이 코로나기간에 많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했다. 이제 할머니들은 몇 남지 않고 그 자식들이 들어와 산다고. 나는 간혹 예약 명단에 내 손으로 썼던 이름들을 떠올렸다. 순자, 명옥, 춘희 같은 이름들. 추운 땅에서 혹독한 세월을 견디고 고국에서 짧은 시간만을 산 이름들. 그리고 그들의 백발성성한 머리를 자르고 말던 엄마의 손을 떠올렸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가. 그 시간 동안 타인을 위해 꾸준히 일하기란 얼마나 쉽지 않은가. 

나는 이제 나의 전용미용사에게 내 머리를 두려움 없이 맡긴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그는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아는 미용사이며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선사해 준다. 긴 시간 동안 남을 위해 일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확연히 다른 손길을 지녔을 것이다. 여전히 능숙하게 파마를 하는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엄마가 다시금 봉사를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23. 6. 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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