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무 Jun 15. 2023

알레르기


  어느 날 갑자기 알레르기가 생겼다. 정확히 말해 알레르기가 생긴 것인지 원래 있던 것을 이제야 자각하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내가 앞으로 뭔가를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때에 따라 증상의 정도는 다르지만 가장 크고 빠른 증상을 보이는 건 토마토와 바나나다. 그 외로 참외, 멜론 등이 있다. 전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라 잘 먹지 않다가 다이어트하면서 많이 먹게 되었는데, 그때 알레르기를 깨달았다.

  숨이 막히거나 발진이 일어나는 치명적인 증상은 아니고 그냥 조금 불편한 정도다. 입천장과 잇몸이 붓고 조금 심하면 입천장 피부가 까지기도 한다. 피부가 까지면서 피 맛이 나기도 하는데 실제로 피가 나진 않는다. 붓기도 조금 지나면 가라앉는 편이라서 딱히 병원에 가보진 않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레르기려니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실험을 진행해 본 결과, 방울토마토는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은 큰 토마토인데 그것도 가열하면 괜찮아서 수프나 소스도 먹을 수 있다. 검색으로 알아낸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의하면, 토마토 안의 물컹한 씨 부분이 파랄수록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진다고 하는데 그건 아직까지 실험해보지 못했다. 햄버거나 샌드위치에 얇게 들어가는 토마토에도 가끔 잇몸이 붓는데 그 정도는 견딜만하다. 그것마저 싫으면 토마토를 빼내고 먹거나 처음부터 빼달라고 요청한다. 원래 토마토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바나나도 마찬가지다. 바나나는 잇몸이 붓는 것을 넘어 맛을 다르게 느낀다. 나에게 바나나는 약간의 탄산감과 함께 신맛이 있는 과일이다.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못 믿지만 정말이다. 탄산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짜릿한 느낌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다. 단맛도 물론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보다는 새콤한 맛이 더 강하다. 심한 경우엔 신맛을 넘어 쇠의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것도 오래된 철봉의 녹슨 쇠 같은 맛이다. (생각해 보니 그 맛을 왜 아는가 싶지만 너무 정확히 아는 걸 보니 어릴 때 먹어본 것 같다) 

나는 바나나의 맛을 그렇게 알고 자랐다. 바나나가 탄산감 없는 달콤한 맛이라는 걸 비교적 최근에 알았다. 누군가는 만화 ‘검정고무신’에서 기영이가 바나나 먹는 장면 못 봤냐는 얘기도 했다. 나는 그게 만화적 표현인 줄 알았다. 귀한 것을 먹은 첫 느낌을 그렇게 표현한 줄 알았지, 정말로 그렇게 달콤한 맛일 줄이야. 

평생 내가 안다고 생각하며 살던 것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조금 아찔했다. 내 안에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지금 내가 안다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거였다. 


  나름대로 공부를 잘하며 모범적인 유년기를 지나왔고, 그 시기로 만들어진 자존심의 벽이 두꺼운 편이다. 안다고 주장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얼마나 쌓였을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제대로 모르고 흘러왔을까. 지나고 보니 제대로 아는 게 아니었던 수없이 많은 과거의 나들이 현재의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부터라도 그런 순간들을 안 만들고 싶은데, 또 얼마나 아는 척을 하며 잘난 듯이 살아갈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다툼은 거기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만. 연인이나 친구나 가족에게도 그런 자만을 넘치도록 부리며 살아온 것 같다. 실상 제대로 아는 것은 내 알레르기만큼도 없으면서.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도 있으며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가져보려 한다. 당연한 걸 이제야 알게 됐지만 인생이 원래 이렇게 배워 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이제는 확실하게 바나나가 달콤하다는 걸 안다. 내가 직접 느껴볼 수는 없지만, 그렇게 알게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2023. 6. 15. 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