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개팅이 허무하게 끝나고(소개팅 에피소드 1 참고), ‘역시 소개팅은 나하고 안 맞아’라고 생각하던 차에 또 소개팅을 하게 됐다.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근무하다 친해진 E의 소개였다. E와 나는 관심사가 비슷해 대화가 잘 통했고, 그러다 보니 학교 밖에서 만나는 일도 잦았다. 동아리의 괜찮은 오빠를 소개해준 댔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나와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첫 소개팅은 메신저로 대화하다 미리 지쳤다면, 두 번째 소개팅은 너무 대화가 없었다. 그는 인사와 만날 날짜 및 장소만 정하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소개팅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너무 연락하는 것도 만나기 전 설렘을 지워버리고, 그렇다고 아예 연락을 안 하니 설렘이 생기지도 않았다.
이름과 직업만 알고서 그를 만났다. 그는 졸업하고 회사에 막 취직한 사회 초년생이었는데, 대기업에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도 취업에 무신경한 학생이었으므로 그의 직업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쇼핑센터 고층에 위치한 파스타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소개팅에선 어떤 질문을 하는 게 좋은가? 우선 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전공과 관련한 일인지, 일은 어떤지, 야근도 많이 하시는지. 그는 내 전공에 대해 들었다며 인생책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그런 질문이 어렵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나 최근에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수월한데, 인생에서 책 하나를 꼽으라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꽤 고민하는 중에 파스타가 나왔다. 우선 먹으면서 고민하는 시간을 벌어보고 있었는데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일 년에 책 몇 권이나 읽으세요?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작가는요? 나는 파스타를 대충 삼키고서 글쎄요, 세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많이 읽지는 못 해요, 저는 소설이나 수필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작가가 많은데 최근엔 김영하 작가님의 책을 재밌게 읽었어요, 등의 답을 했다. 그는 최근 어떤 책의 주인공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읽다 말았다고 했다. 나는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 ‘좀 더 읽으시면 주인공이 왜 그런 성격인지 이유가 나오는데, 아쉽네요.’라고 했는데 ‘저는 그런 성격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읽다가 좀 아니면 그냥 관둬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책을 시작하면 재미가 없어도 끝까지 억지로 읽는 편이라서 그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그는 파스타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번엔 주제가 영화였다. 나는 당시에 일본영화에 빠져 있었고, 그는 SF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규모가 크고 과학적인 내용이 많으면 좀 어렵다고 했더니, 어떤 영화를 꼭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걸 안 보셨다고요? 진짜 재밌어요, 꼭 보셔야 해요!’ 만약 이 사람과 데이트를 이어 나가 영화를 보러 가게 된다면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영화를 보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취향이 너무 달라서 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파스타를 너무 안 먹길래 안 좋아하시냐고 물었는데 배탈이 나서 한동안 못 먹었더니 위가 줄었다고 했다. 배탈이 난 이유를 물으니 친구들과 여행 가서 낚시를 했는데, 회를 먹고 탈이 났단다. 취미가 낚시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고, 어디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여행을 가도 호텔에 가만히 누워서 쉬는 게 제일 좋다고. 여행 가면 하루에 기본으로 2만 보는 채우는 나였기 때문에 이 주제도 금방 끝났다.
그때쯤 파스타를 다 먹고 일어났다. 음식 남기기를 싫어해서 앞사람이 먹지 않아도 꿋꿋하게 접시를 비웠다. 다음 주제는 음주. 이십 대의 나는 주량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다. 그만큼 술을 많이 마셨고 또 좋아했다. 그는 맥주 한 잔 마시면 취한 댔다. 이런, 이건 좀 문제가 크다. 나는 늘 나와 같이 끝까지 술을 마시는 남자를 원했다. 내가 좀 취해도 그는 멀쩡해서 나의 투정을 받아줄 수 있는 나보다 주량이 센 남자. 맥주 한 잔은 좀 심한데? 이 주제도 금방 끝났다. 술을 별로 마시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낭패인 기분으로 카페에 갔는데 그는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술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료가 커피였는데, 커피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카페에선 무슨 대화를 이어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말을 놓으라고 해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지하철을 같이 타고 오다가 내가 먼저 내렸는데 거의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 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제 한 번 봤으니까 말 놓을게. 조심히 들어가~ 다음에 또 언제 만날까?’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이제 한 번 봤으니까’는 두 번째 만남에서 할법한 말이 아닌가. E와 동갑이니 말을 놓으라고 해도 끝까지 깍듯한 인사를 했던 사람이 30분 만에 메시지로 말을 놓는 것이 어색했다. 두 시간여 동안 대화가 통하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여행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아니요. 저는 그냥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라고 했고,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전 사실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라는 답을 받았다. 시종일관 대화는 툭툭 끊겼고, 주제는 이리저리 튀었다. 서로가 맞지 않음을 내내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연스럽게 다음 만남을 언급했고, 나는 E와 함께 만나자고 에둘러 거절했다. 의미는 없고 힘만 빼는 만남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한 번 만남을 제안했고, 결국 E가 중재해 상황을 종료시켰다.
나중에 듣기로 그는 나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회사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나이도 많고, 칙칙하고, 삶에 찌들어있는데 나는 어리고 밝은 기운을 풍겼기 때문이랬다. 좋게 봐준 것은 고마웠지만 이유를 들으니 그와 더 만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칙칙한 사람보다 밝은 사람이 좋지만, 나도 언젠가는 나이를 먹고 회사에 들어가 삶에 찌들어갈 것이었다. 나는 그가 칙칙해도 상관없었고, 그저 대화가 즐거웠으면 했다. 자연스러운 만남이 아니기에 외적인 조건을 무시하진 못하지만 나에게 소개팅은 대화였다. 상대가 누구 건 어떤 조건과 외형을 가졌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운 대화가 가장 중요했다. 즐거운 대화는 닫혔던 마음도 열고, 굳은 세포들도 깨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거나 생각지 못했던 지점을 날카롭게 짚을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반하고 만다. 나는 그때의 그가 말했던 대로 나이를 먹고 칙칙하게 삶에 찌들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열고 세포를 깨우는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다. 즐거운 대화만 가능하다면 이대로 칙칙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2023. 6. 28.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