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알람을 끄고 잠깐 멍을 때린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5분쯤 필요하다. 창문이 침대 바로 옆에 있어서 누운 채로 손을 뻗어 커튼을 걷는다. 날씨와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해 본다. 잠은 깼는데 침대에서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으면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최소한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인터넷 기사에라도 의존한다.
전년 대비 물가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알 수 있고, 전기세가 올라서 난리인 것도 알 수 있고, 그래서 ‘거지방’이라는 유행현상이 생겼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몇 십억 짜리 건물을 현금으로 매입하고, 누군가는 당장의 월세를 내기도 빠듯하다. 그런 현실에 조금 씁쓸해하다 보면 씁쓸함을 넘어서는 기사들을 마주친다. 아들이 아빠를 죽이고, 엄마가 아기를 죽이고, 학생들이 동급생을 집단으로 때리고, 마주친 여자를 뒤따라가 때리고 강간하고,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죽이고. 분명히 읽고 있으면서 쓰인 글자들을 믿을 수 없다. 기사는 너무 명료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아서 오히려 분노가 차오른다. 왜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죽어야 하는가. 기사 속 피해자들은 대체로 노인 혹은 어린아이이거나 여자들이다. 그들은 약하다. 그래서 타깃이 된 걸까. 약한 자들은 언제든 이유 모를 억울한 죽음을 대비해야 하는 것일까. 약자라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너무 끔찍하고 억울하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어쩔 수 없이 피해자에게 이입하게 된다. 언젠가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 잘 알아서 두렵다. 계속되는 사건 사고들을 마주하다 보면 망상에 시달릴 때도 있다. 누군가 나를 보면서 걸어오면 저 품속에서 흉기를 꺼내 달려들 것만 같다. 싸한 기분이 들면 통화하는 척하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지 않는다. 밤에는 이어폰을 끼지 않고 최대한 빨리 걸으며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경계한다. 과하게 미리 방어해도 두려움은 잘 씻기지 않는다.
잘 아는 혹은 모르는 사람을 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해본 적이 있다. 내가 미운 대상에게 바란 것은, 유행하는 전염병에 걸려 아프거나 일을 그르쳐 상사에게 혼나거나 하는 것이었다. 죽도록 밉다고 해서 실제로 죽이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미워도 그 사람이 죽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즘의 가해자들은 밀도 높은 미움 없이도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 엄청난 미움을 품고도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데, 어떻게 그저 재미와 호기심으로 혹은 욕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의 용서할 수 없는 심리와 행위에도 놀라고,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는다는 것에도 매번 놀란다.
놀라움은 기사로 끝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때리거나 죽였다는 기사의 아래에서 댓글들은 싸운다. 누가 잘못했고, 누구의 문제인지를 따져 나눈다. 살면서 인터넷 기사에 댓글을 달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귀찮기 때문이다. 로그인을 해서 내 의견을 열린 공간에 게재하고, 누가 반박하면 거기에 신경 쓰며 다시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귀찮다. 그래서 장문의 댓글을 보면 일종의 감탄이 먼저 나온다. 그런 귀찮음을 무릅쓰고 선연하게 공개된 혐오를 보면 아득해진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정말 괜찮은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곳곳에 혐오가 만연한 세상은 확실히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다른 성을 혐오하고, 같은 성도 혐오하고, 부모가 자식을 혐오하고, 직원이 사장을 혐오하고, 청년이 노인을 혐오하고, 내가 너를 네가 나를 혐오한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고 분화되었다가 뭉쳤다가 하며 결국은 다양하고 더 큰 혐오를 만들어낸다. 나 또한 나이를 먹고 사회를 경험하며 사람들을 만날수록 혐오의 대상과 기준이 점점 늘어나고 세밀해진다. 좋은 마음만으로는 견뎌지지 않는 사람과 일들이 많음을 알아간다.
혐오의 세상을 살면서 좋은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똑바로 잘 걸어보려고 해도 길가의 돌처럼 혐오가 발에 차인다. 그때마다 휘청이거나 넘어진다. 작은 혐오도 얼마든지 사람을 넘어지고 다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다치면 또 다른 혐오를 다른 사람에게 던지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걸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나아간다. 어두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만드는 건 이런 사람들의 꼿꼿한 발걸음이다. 선한 사람들은 언제나 작은 힘을 가졌지만 결국은 승리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을 때면 깜깜한 밤하늘에서 작은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처럼 세상이 조금 살만해지는 걸 느낀다. 그럴 때면 나도 내 안에 그득한 혐오를 하나씩 지워본다. 살만한 세상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두려운 마음으로 인터넷 기사를 열어본다. 오늘은 또 누가 누구로 인해 다쳤을까, 누가 누구를 죽였을까, 누가 누구를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할까. 그런 두려운 호기심 대신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났나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아침을 맞고 싶다. 내 안의 혐오부터 내려놓기 시작하면 살만한 아침도 그리 먼 일은 아닐 것이다.
2023. 7. 7.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