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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Jul 17. 2023

그의 항로


  공항의 공기는 분명히 정체되어 있지만 마음에 바람을 일으킨다. 들어서는 순간 어딘가 들뜨게 만드는 잔잔한 바람.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이는 곳. 휴양지에 가는 듯 밀짚모자와 긴 드레스로 멋을 낸 여자, 피곤에 찌들었지만 양손 가득 선물을 든 외국인, 자기 덩치만 한 캐리어를 끌며 부모를 힘겹게 따르는 꼬마, 커다란 이민가방을 끌고 가족들과 인사하는 청년, 멋진 유니폼을 차려입은 승무원, 카트를 밀며 곳곳을 청소하는 미화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휴양지에 놀러 가는 사람? 아니면 공부하러 가는 학생?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앞서 나는 정말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일까? 공항에서 확실한 목적이 없는 사람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같이 떠나게 된 후배들이 도착했고 곧 수속을 밟았다. 이상하게 잠이 안 오고 불안해서 매우 피곤한 비행이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도 잘 못하는 내가 큰 결정을 순식간에 해버리는 순간이 있다. 지나고 보면 ‘내가 왜 그랬지?’ 싶은 순간들. 학교에서 진행하는 해외지역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는 결정도 그렇게 순식간에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지원 기간에 급하게 결정해 지원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합격하자 곧 후회가 밀려왔다. 단기연수지역인 ‘괌’은 미국령이지만 동남아에 가까운 위치였고, 사계절 뜨거운 날씨인 휴양지였다, 하필이면 가는 기간이 우기였다. 더위에 약한 나는 한국의 여름도 힘든데 괌의 날씨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엄마는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기꺼이 지원해 주셨지만, 안 그래도 어려운 집안 형편에 내 욕심만 챙긴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한 달 동안 영어실력이 엄청나게 늘 것 같지도 않은데 큰돈을 쓰는 건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프로그램 이름처럼 어학연수라기보다는 그저 여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떠나기 전 기말고사 기간은 대학생활 중 가장 빡빡해서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영어공부를 조금이라도 하고 가야겠다는 다짐은 옷가지들과 함께 가방에 꾹 눌러 담고, 나머지 공간엔 불안과 걱정을 채우고 떠났다.     

 

  입국심사가 철저하다고 해서 걱정스러웠고,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멍청한 표정으로 ‘sorry?'만 반복했다. 다행히 준비해 간 서류를 심사관들이 알아서 봐준 덕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입국심사 때 필요한 영어문장이라도 공부해 갈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새벽 3시, 괌 공항에 내던져진 우리를 반겨준 건 기숙사에서 데리러 와 준 스텝들이었다. 공용 차량의 운전을 책임지던 D와 기숙사의 실질적인 일을 처리하는 실장님. 영어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나는 그들이 건넨 한국어에 마음이 놓였다. 다른 학생들보다 며칠 먼저 도착한 우리는 그들과 매우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10년간 군인으로, 정확히는 헬기 조종사로 살았던 실장님은 적성에 잘 맞았던 군 생활을 그만두고 파일럿으로의 이직을 위해 쉬던 차에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오랜 군 생활 때문인지 자기 관리가 철저했는데, 특히 새벽시간에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밤잠이 없는 나는 늦게까지 놀다가 그와 산책을 나섰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와 대화하며 괌의 조용한 동네를 걷는 것이 좋았다. 우리의 산책길에 대화가 끊기던 순간은 비행기가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기숙사는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자동차만큼 큰 비행기들이 지나다녔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요란스럽게 지나가고 나면 새벽의 정적이 아주 잠깐 우리 사이를 메웠다. 실장님이 지나간 비행기를 보며 말했다. 

 

  “좌적, 우청, 미백”

 

  무슨 소린가 해서 멀뚱하게 쳐다보니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비행기의 날개는 항상 왼쪽이 빨간색, 오른쪽이 초록색, 꼬리가 백색이야. 그래야 비행기끼리 서로 부딪히지 않고 운항할 수 있거든. 좌적, 우청, 미백. 비행기의 약속이지.”

 

  그 뒤로 나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제일 먼저 주문 같은 그 단어들을 떠올렸다. 사람들도 그렇게 정직하게 불을 밝히고 다가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언뜻 했던 것 같다. 우리의 대화는 주로 나의 질문과 그의 답변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궁금했던 것은 왜 파일럿이 되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나는 헬기 조종사나 파일럿이나 비슷해 보였기 때문인데, 그 질문은 미루다가 헤어지기 직전에서야 물어볼 수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산책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해져 있는 하늘 길을 다니는 게 짜릿하다고 했다. 비행 내내 긴장하며 밥도 제대로 못 먹지만, 착륙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새로운 곳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 작전상의 비행이라 그 기분은 오래갈 수 없었지만, 내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의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고. 늘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하는 비행이 아니라, 설렘을 가진 사람들을 새로운 세상에 데려다줄 수 있는 비행이라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가 오래 입어 잘 길들여진 군복을 벗은 이유는 예상보다 간단했다. 내가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군인을 관둔 게 잘 한 건지, 파일럿이 될 수나 있을지. 근데 어차피 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래서 그냥 지금 행복한 일을 해보려고. 군인이 된 것도, 군인을 관둔 것도 별 대단한 이유는 없었고… 그냥 그때 그러고 싶었어. 나도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보니 인생이라는 게 별거 없더라고.”

  

  군인이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보다 특수한 사명감을 가져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오래 해온 안정적인 일을 관둔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그냥 군인이 되고 싶어 군인이 되었고, 군인이 아닌 다른 것을 하고 싶어서 관뒀다. 나는 인생의 큰 결정에 조금은 드라마틱한 이유가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에 허무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살아온 그의 인생이 더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일을 거창한 이유로 선택하며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혹은 ‘하고 싶어서’로 선택하는 것. 정신 차리고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는 내 선택의 순간들도 그런 이유들이었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괌이라는 나라에 와서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산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그냥’ 혹은 ‘가고 싶어서’때문이었지 않을까.     

 


  나는 이제 비행기를 보면 좌적, 우청, 미백 같은 단어와 함께 그를 떠올린다. 정해진 항로를 따라 불을 밝히며 운항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길을 가는, 착실한 듯 자유로운 비행기. 뚜렷한 목적지가 있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비행기가 그의 삶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파일럿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은 엄청난 순항이 아니었다. 새롭게 바뀐 토익은 어려웠고, 비행사 교육을 위한 비용 마련도 버거웠으며 오랜 군 생활로 소홀했던 가정에도 충실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정해진 항로는 없었다. 하늘 길은 여러 방향으로 열려있었고, 빠른 직선 길이 아니더라도 목적지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려 애썼다. 마지막 연락에서 그가 원하던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뒤로 메신저 프로필을 통해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걸 알았다. 사진 속의 그는 괌에서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자신만의 항로를 개척해 마침내 길을 이루어낸 그를 보며 나의 항로는 어떤 모양일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2023. 7. 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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