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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Oct 27. 2024

집밥의 정의

집 밥. 이 말은 참 정겹지만 어쩐지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두부, 감자, 애호박 등이 보글보글 끓으며 구수한 향을 풍기는 된장찌개. 참기름 듬뿍 넣어 무친 시금치와 콩나물. 맛깔스러워 보이는 제육볶음이나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생선 구이.

우리가 ‘집 밥’이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아닐까?     


그런데 이 한상을 1인 가구 입장에서 차려보자.

우선 쌀! 쌀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계속 집 밥을 해 먹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5kg 정도 사볼까? 음...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네? 3kg 정도로 타협한다. 쌀을 뽀득뽀득 씻어서 전기밥솥에 안친다. (밥솥이 없다면 냄비 밥을 해야 하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다)

그다음 된장찌개를 끓여보자. 필요한 재료가... 된장, 두부, 감자, 양파, 애호박... (잠깐 먹지 말까 생각하고) 두부랑 양파만 넣는 걸로 타협한다.

코인육수(이건 정말 천재적 발명품)로 육수를 만들고 된장을 푼 뒤, 두부와 양파를 넣는다. 어쩐지 색감이 부족해 맹숭맹숭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시금치? 콩나물? (이때 이미 1시간을 넘어가며 지치기 시작한다) 시금치 한 단을 깨끗하게 씻어 다듬는다. 콩나물은 껍질만 걸러지도록 씻어둔다. 끓는 물에 콩나물을 먼저 데치고, 소금을 넣은 후 시금치도 데친다. 소금, 참기름, 깨를 팍팍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처음엔 분명 많아 보였는데 무치고 보니 한 주먹도 안 된다. 콩나물엔 살짝 변주를 줘서 고춧가루를 첨가한다. 왠지 한 큐에 두 요리를 끝낸 것 같아 기뻐하기엔 이르다. 메인메뉴가 남았으니까...     


중간중간 생략한 과정이 많은데도 벅차다.

물론, 재료가 모두 갖추어져 있고 손이 빠르고 익숙하면 모든 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겠지만, 나는 일단 1인 가구로, 모든 재료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장을 보는 것부터 숙제다.

저렇게 한상을 차리려면 예능 프로그램 삼시 세 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볼 수 있다. 밥 차리는 데 하루를 다 쓰는.     


그래서 나는 집 밥을 이렇게 정의한다.

‘집에서 먹는 밥’ 일단 집에서 먹기만 하면 된다. 레토르트든 인스턴트든 상관없다. 내 수고가 조금이라도 들어갔고, 집에서 먹는다면 집밥으로 친다.(배달 음식을 집에서 먹는 건 포함되지 않는다)

햇반을 돌리고, 레토르트 된장찌개에 두부만 썰어 넣어도 집밥이다.

샤부샤부 밀키트에 재료를 썰어 추가해도 집밥이다. (여기 죽까지 직접 만들어 먹으면 완전한 집밥으로 인정)

냉동 떡볶이에 라면 사리를 추가해서 끓이고, 냉동 만두를 구워 먹어도 집밥이다. 심지어 컵라면을 먹어도 주먹밥을 내가 만들어 같이 먹으면 집밥이다.


우선, 집밥이라는 단어를 어려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집에서 먹는 습관을 들이고, 집밥을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면, 언젠가 3첩 반상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차려내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게 오늘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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