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의 진입장벽은 사실 장 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특히 1인 가구라면 재료의 양을 가늠할 수 없어 큰맘 먹고 샀다가 어느 날 열어본 냉장고에서 정체불명의 무엇과 마주치게 될 수....
그런데 또 1인용으로 포장된 것들은 대용량에 비해 비싸다. 양은 거의 두 배 차이인데 가격은 얼마 차이가 안 나니, 돈 좀 더 주고 많이 사는 게 이득 아닌가?라는 딜레마에 늘 빠진다.
나는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계획성이 1%도 없는 대문자P형 인간이지만, 식재료를 살 때는 소문자 j 정도는 된다. 엄청난 즉흥적 인간도 장 볼 때는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냉장고에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그래서 장을 보기 전에는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해 먹을 음식을 생각하고 그에 맞는 재료들을 쭉 나열한다. 예를 들어 카레를 만들어 먹고 싶다면? 카레(가루든 고체든), 감자, 양파, 고기, 당근 이렇게 적는다. 그리고 카레를 한 번 만들어 먹고 남은 재료들로 어떤 다른 음식을 만들지 생각한다. 남은 고기와 양파로 제육볶음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재료들은 통과다. 남은 당근을 처리할 요리가 없다면 당근은 과감하게 리스트에서 삭제한다.
이런 식으로 장보기 목록을 작성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장을 볼 수 있다. 내 식단에서 당근은 정말 쓸 일이 많지 않아서, 한 번 사면 계속 그걸 처리하는 데 급급했다. 그런 재료는 애초에 사지 않는 게 현명하다.
이렇게 목록을 작성하고 가도 뭐 그렇게 순탄한 편은 아니다. 생각보다 양파가 너무 비싸다던가, 시식한 냉동만두가 맛있다던가, 할인 스티커가 붙은 콩나물을 발견한다던가...
그럼, 카레 말고 콩나물 국밥을 해 먹을까? 냉동만두는 어차피 냉동이니까 사두면 좋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합리화를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의 목록을 끝까지 밀고 나가라거나 융통성 있게 방향을 바꾸라거나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이건 사람마다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카레를 만들 때 양파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른 재료 다 없어도 양파와 감자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양파가 아무리 봐도 너무 비싸면? 카레는 포기한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카레에 양파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 양파 없는 카레를 먹을 수도 있는 거다.
결국 장보기도 나를 잘 알아야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중요하게 여기는지. 고기를 좋아하면 정육 코너를 유심히 볼 것이고, 채소가 필수적이라면 채소 코너에서 신중을 기할 것이다. 가격이 최우선이라면 가격을 따져가며 장을 볼 것이고, 신선도가 생명이라면 재료의 상태를 유심히 살필 것이다.
잘 모르겠다면 넉넉한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러 나가보자. 대형 마트도 좋고, 동네 작은 슈퍼마켓도 괜찮고, 시장이면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언제 지갑을 열고 물건을 사는지 알아보자. 그렇게 장보기로 나를 좀 더 알게 되고, 집밥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