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다 버린 글

근황 (25.01.13)

by 취생몽사

아침 출근 길에 잠시 눈발을 조우했다. 땅에 닿자마자 녹아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구슬픈 생각이 들었다. 조금 일찍 나오거나 조금 늦게 나왔다면 마주하지 못했을 테다. 편지함에 놓인 신문을 외투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고 연구실로 왔다. 지난주 진행했던 모델링이 여전한 에러와 함께 놓여있고, 새로 찾은 lo-fi 음악을 들으며 신문을 읽었다. 이상돈 전 의원의 칼럼이 눈에 들어왔는데, 닉슨의 하야를 이야기하며 “그렇게 세상이 정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탄했다. 아침 눈발에서 마주한 심상의 그림자가 마지막 문장에 겹쳐 보였다. 이런 감상을 이상돈의 글에서 조우하는 게 맞을까. 구슬픈 생각이 다시 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디딘 땅 자체가 흔들거리면 어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너도 나도 다들 변한다. 본인들은 여전하다는 착각과 함께 나름의 물이 든다. 하지만 세상 전체가 험한 방향으로 미끄러져 갈 때의 불안감은 몇몇 관계의 어색함에 비할 것이 아니다. 돈 따지는 친구들은 그나마 순수하다. 세상이 비탈길에 놓이자 개인보다 더 거대한 것들이 타락한 언어를 뒤집어 썼다. 셈 잘하는 사람들, 혹은 그 옆에 붙어서 셈하는 것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정치란 이런 것이다 이야기하니 나는 정치를 잘 모르겠다. 신념은 치기와의 분별이 사라졌고, 신념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모두가 하나되어 신념을 깎아내리기 바쁘다. 미학은 삶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닌 삶을 장식하는 소품으로 전락했고, 비애와 경탄, 장엄함과 수더분함이 취향에 따라 가격표가 붙어 전시되기 시작했다.


정치는 공동체의 재화를 어떻게 나눌 지 결정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신념이란 유약한 인간 끝에 매달린 이슬이 아니라 이 숲을 둘러싼 안개와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미학의 선결조건은 스스로의 언어를 갖고 가꾸는 일이 아니었던가. 사람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만 사용한다. 그것은 입력과 출력이 같은 비극적인 폐루프 시스템이다. 자신의 삶 바깥에서 상대의 존재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는 이들이 점점 적어진다. 이런 세상에 엔지니어링이 다 무슨 의미인지 답답하고 분한 마음이 울컥거린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 글을 쓰던 시절을 생각해본다. 서툰 글이었지만 분명한 동기와 방향성은 있었다. 미학적 열정과 정치적 목적이었다. 내가 조우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그리하여 이 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밀고가야 하는지에 대해 썼다. 하지만 이제 적는 글은 물이 새는 천장 아래 받쳐둔 양동이를 비우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환멸에도 환멸이 나서 눅눅해진 냉소 끝 떨어지는 물이 마음을 어지럽힐세라. 얼른 글을 써서 내다 버린다. 문득 세상이 나를 내다버렸나 생각하다가, 내가 세상을 내다버리고 말 것이라 다짐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보니 눈발은 온데 간데 없다. 아침의 구슬픈 설경이 꿈결같다. 김치찌개를 먹고 담배를 태우며 이 글을 어떻게 써보겠다는 가닥을 잡았다. 내가 내다 버린 세상에 또 문장을 한줌 내다버렸다. 시뮬레이션의 에러는 여전했고, lo-fi 음악 대신 쇼팽을 듣기로 했다. 말소리 나지 않는 음악을 들어야 일이 손에 잡힌다. 한 줌 글의 무게를 가늠하고는, 세상만큼 내다버리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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