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17.07.10)
술을 털어 넣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반쯤 무너진 카페를 마주했다. 머물러 있는 골목인 줄 알았는데 나를 둘러싼 것들은 또 하루 무너져간다. 물론 그것은 나와 일절 상관이 없다. 사실 나의 존재와 상관이 있는 세상사는 전무하다고 해도 좋다. 그런 것은 잘난 녀석들의 영역이다. 모두의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똑똑하거나, 좌중을 휘어잡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거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비록 그 쇠락하는 모습이 닮았다 해도, 내일 아침 자취방 골목 어귀의 전봇대가 쓰러질세라 움찔하는 나 같은 이의 일상은 별개의 누추함일 뿐이다.
그래도 아끼는 카페가 문을 닫는다는 사실은 날 퍽 어둡게 한다. 이제 내가 몸을 맡길 장소는 없다고 해도 좋다. 내게 맥주를 시켜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는 '모퉁이'와 '102 tree'뿐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다. 여름의 수심은 깊어져 간다. 愁心이 아니다. 水深이 맞다. 자취방 침대에 눕는 그 순간까지 나는 무너진 '102 tree'를 떠올리며 허우적대기 때문이다. 더 숨을 참지 못하고 폐부 깊숙한 곳까지 여름의 우울함이 밀려들면, 나는 4시간 남짓 눈을 감게 된다. 꿈은 어김없이 내게 괴로웠던 시절을 보여주고, 깨어난 나는 그 기억을 한 줌씩 미화하고 만다.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언젠가 이 방을 나서며 그냥 나들이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해왔던 일은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퍼뜨리는 일이었으나, 나는 그닥 잘 해내진 못했다. 실존하지 않는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종종 자기기만을 요하는 일이었고, 나는 열정을 불사르거나 냉소로 일관하거나 뭐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다. 다만, 무너지는 건물 밑에 머물러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 골목길에 생을 의탁한 많은 것들이 그렇듯 하루에 한 줌씩 환멸을 주워 담았다. 여름을 수월하게 나는 법은 언제쯤 배울 수 있을까.
가을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보라는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 사실 그 말을 며칠씩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가을 같은 곳이 있다 해도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를 짓누르는 무엇인가도 없지만 나를 부르는 바람도 없다. 이 골목길 어귀에서 출렁이는 여름 사이로 철없는 치기와 가로등만이 점멸하고 있다. 무너진 카페를 뒤로하고, 건축법 위반이 분명한 자취방에 돌아왔다. 좁기는 해도 그저 누워있을 침대만큼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늑하다. 좁고 편집된 경험세계에 살아간다 하여 삶의 순리를 모르겠는가. 자기서사에 갇힌 인간이라 하여 타인의 맥락을 모르겠는가. 그들이 머무르는 이유는 아늑하기 때문이다. 바깥은 시끄럽고 귀찮은 곳일 뿐이다. 나는 도망갈 생각도 없다. 그냥 여기 머무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