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F, 페미니즘 아닌 페미니즘 컬트

‘진정한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by 취생몽사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잡문집 중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논리적인 왜곡을 거쳐 어떻게 젊은 세대를 광신적 종교 집단(컬트)에 빠지게 만들었는지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실제로 지금 우리를 에워싼 현실은 각종 정보와 선택지로 넘쳐나 그 가운데 자기에게 유효한 가설을 적절히 골라내어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들을 무제한으로 무질서하게 체내에 받아들여 자가중독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그녀를 이끌어줄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 현실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선행한 세대가 축적한 경험이 샘플로서 유효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따금 강력한 외부자가 나타난다. 그 외부자는 몇 가지 가설을 알기 쉬운 세트메뉴로 만들어 그들에게 건네준다.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깔끔한 패키지로 완비되어 있다. 지금까지 혼란스럽던 '현실A'는 온갖 제약과 부대조건과 모순을 떨쳐버리고 더 단순하고 '클린'한 다른 '현실B'로 바뀐다. 그곳에는 선택지의 수가 한정되고, 모든 질문에 논리 정연한 해답이 마련된다. 상대성은 밀려나고 절대성이 그 자리를 꿰찬다. 그 새로운 현실에서는 그/그녀가 맡을 역할이 더없이 명확하게 드러나며, 해야 할 일이 상세한 일정표로 준비된다. 노력은 필요하지만, 그 달성 수준은 숫자로 계측되고 도표로 그려진다. '현실B'에 있는 자기는 '프리pre 자기'와 '포스트post 자기' 사이에 끼어버리기 때문에 정당한 존재 의미와 전후성을 획득한 자기이며, 그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매우 이해하기 쉽다. 그 이상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을 손에 넣기 위해 그/그녀가 상대에게 내놓아야 하는 것은 과거의 현실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진부한 현실 속에서 늘 허둥대며 고투했던 볼썽사나운 자아뿐이다.”

하루키 씨의 통찰을 몇몇 광신적 종교집단만의 특질로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종교는 포교에 있어 강력한 외부자를 제시하며, 인간이 겪는 현실의 어려움을 조금 단순하게 만들고 그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부여한다. 다만 사회 보편적 판단을 내릴 적에, 종교가 개인을 소비하는가 혹은 개인이 종교를 소비하는가의 물음이야말로 종교와 컬트를 가르는 기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종교를 소비하는 양태는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반적 신앙생활의 그것이다. 모임에 참석하기, 일상을 유지한 가능에서 일정량의 금전을 내기, 밥을 먹는다거나 하는 등의 일상 속에서 신을 생각하기 등. 다만 종교가 개인을 소비하는 양태는 어떠한가. 컬트 집단에 대해 우리가 흔히 가지는 생각처럼, 컬트가 개인을 소비하는 방식은 교주가 신도의 재산과 육신을 착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루키 씨의 통찰은 명백한 폭력의 선전성에 의해 가려진 지점을 건조하게 지적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속칭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라 불리는 사람의 글을 읽으며, 하루키 씨의 통찰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들에 따르면, 트랜스 여성은 전통적으로 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습, 혹은 사회적 여성성을 취하려 하는 XY 염색체의 육체(간성이나 다른 성염색체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자)일 뿐, 결코 여성이 아니다.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읽었던 글 하나는, 자신이 청소년기 FTM 성향이 있었다는 것을 반성하며 트랜지션은 치료가 아닌 병의 악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내게 ‘TERF’의 주장에 대한 논박은 지동설이 맞느냐 천동설이 맞느냐 수준의 것으로 여겨지므로 생략하려 한다. 다만, ‘메갈리아’에서 ‘워마드’로의 분화과정을 지켜본 사람 입장에서도, 페미니즘의 언어로 동성애 전환치료를 이야기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의 말을 체험하는 것은 실로 허탈하다. 그리고 많은 여초 커뮤니티와 넷 페미니즘 지형에서 ‘TERF’의 주장이 비슷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라 불리는 메르스 갤러리와 강남역 살인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슬로건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일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폭력, 차별, 억압 등이 우르르 터져 나올 수 있게 하는 마중물이 되어주었고, 넷은 여전히 서로의 피해 서사를 공유하는 ‘여성혐오’의 서사로 가득하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들을 저항하는 정치적 주체로 호명하게 해주었고, 그에 따라 무례함과 불쾌함의 서사를 피해와 가해의 서사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나 역시 ‘잘 모르는 가해자’로서 내가 지난날 행했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여전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선언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지만, 조금 덜 무례한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편이다. 내게 페미니즘은 일종의 선글라스와 같아서,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도구와 같다. 누군가를 괴물로 치환하기 전에 그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와 공동체의 구조적인 특성을 따져 묻는 도구이다. 나는 지금 부러 페미니즘을 도구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내가 페미니즘을 일정 부분 소비하고 있을 뿐 그에 복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나는 지정 성별 남성으로서, 여성들이 겪었을 피해의 서사에 대해 무지하며, 인간과 인간을 잇는 정념을 이동시키는 USB가 있지 않은 이상 그를 온전히 경험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피해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어떻게 작용했을지 가늠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이토록 열광을 받는 상황 속에서, ‘어떤’ 페미니즘은 일종의 강력한 외부자 역할을 했으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어떤’ 페미니즘은 개인의 일상 속 차별, 억압, 폭력을 피해로 호명하며, 그 가해자를 지목한다. 물론 개인과 개인이 맺는 관계 속에서 젠더만이 유일한 변수는 아니겠지만, ‘어떤’ 페미니즘은 그 가능성에 대해 침묵하거나 혹은 교묘하게 배제한다. 지금까지 괴로웠던 ‘현실A’는 온갖 고민과 사유가 사라진 채로 더 단순하고 ‘클린’한 ‘현실T’로 바뀐다. 상대성은 밀려나고 절대성이 그 자리를 꿰찬다. 그 새로운 현실을 손에 넣기 위해 그가 상대에게 내놓아야 하는 것은 과거의 현실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진부한 현실 속에서 늘 허둥대며 고투했던 볼썽사나운 자아뿐이다. 물론 ‘어떤’ 페미니즘이라고 하여 개인을 ‘현실T’ 밖 사람들과 격리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의 접점 속에서 ‘현실T’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모순이 발견된다면, 개인의 선택지는 두 가지로 나뉜다. ‘현실T’를 벗어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F’로 나아갈 것인지, 혹은 ‘현실T’가 설명하고 제시했던 것들에 안주하며 ‘현실F’의 사람들을 배척할 것인지. 다들 눈치챘겠지만, 내게 ‘TERF’는 ‘현실T’에 머물러 ‘현실F’를 배척하려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를 페미니즘이 아닌 페미니즘 컬트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페미니즘 컬트의 등장에는 수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우리 시대의 반지성적 경향이 전제된다. 페미니즘이라 하여 그러한 시대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 정확한 설명과 개념보다는 ‘입이 트이는 것’에 집중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나 역시 이런 문장을 적을 만큼 지성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 않았느냐 한다면 걱정스럽다. 다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볼 때, 일베가 성장한 배경부터 시작하여 최근 벌어지는 수많은 개념어의 오용(반성폭력의 경우, 2차 피해/가해, 피해자 중심주의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까지 시대가 지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특히 이러한 나의 의심은 ‘TERF’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그들에 동조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를 ‘엘리트 페미니스트’라 호명하는 것을 지켜보며 굳어지게 되었다.

반지성적 경향은 전문가를 향한 불신 혹은 전문가 권위의 추락과도 직결된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많은 연구자는 개인적인 피해 경험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비판적인 정치의식이 담보된다고 믿는 시각에 대해 비판을 진행해왔다. 그것은 벨 훅스가 1984년에 이야기한 대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자신을 발견해가는 긴 여정에서 중요한 단계이긴 하지만 단지 첫 단계일 뿐”이라는 지적과 일맥상통했다. 국내 연구자 중에서도 권김현영 씨는 위에서 언급한 2차 피해와 피해자 중심주의가 오용되는 사례를 경계하며, “우리가 피해자와 연대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지속되지 않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약속과 실천이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권김현영 씨의 이 빼어난 문장이 얼마나 대중에게 가닿았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반지성적 경향이 부분적 정치화를 통해 빚어내는 참극(이를테면, 트럼프)은 다양하며, 우리 사회 넷 페미니즘 역시 자유롭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 컬트의 또 다른 성장 배경 하나는, 페미니스트, 안티 페미니스트를 막론하고 넷 전반에 형성된 배타성일 것이다. 특히 넷을 중심으로 형성된 ‘TERF’를 비롯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의제에서 더욱 활발히 이뤄지며, 그 대표적인 것 하나가 대중문화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평이다. 문화 예술의 자유를 옹호하는 내게, 처음 페미니즘 담론이 사회 전반적으로 재유통되면서 가장 우려스러웠던 지점 역시 이 지점이었다. 페미니즘의 시선을 취하는 비평은 대부분 낙인과 단죄로 이어진다. 어느 정도 페미니즘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보유한 지금이야,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다지만 ‘여혐 콘텐츠가 여혐을 조장한다.’는 문장이 내게는 조금 괴상하게 들렸다. 그것은 ‘폭력적인 게임이 아이를 망친다.’는 구호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대중이 문화예술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이 문법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영화를 ‘알탕 영화’로 지목하는 것, 어떤 음악을 ‘한남 힙합’으로 지목하는 것은 얼마나 유효한가? 누군가를 ‘한남’으로 지목하는 것에서 끝나버리는 인종주의적 페미니즘은 결코 냉소와 혐오의 시대를 저지하지 못한다. (어쩌면 냉소는 혐오의 하위문화일지 모른다. 냉소는 폐쇄적인 유머로 결코 순환하지 못하기에, 순간의 자기만족에 그칠 뿐 상대와 함께 호흡할 수 없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자신과 다른 상대에 대해 일단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 뒤, 과학의 영역을 무시한 신앙의 영역으로 페미니즘을 몰고 가, 게이 혐오와 트랜스 젠더 혐오를 일삼고 있다. 이는 이미 철학, 운동, 실존 그 무엇도 아니다.

광신적 종교 집단과 대중을 유리시키는 방법 하나는 계몽이다. 다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계몽이 거창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반지성적 경향과 배타성을 부정하며, 공존의 언어를 모색하는 것이 절실할 뿐이다. 그것은 현재 넷 페미니즘 지형에 누적된 폐쇄성을 해소하고, 더 많은 현실과 호흡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을 긋고 싶은 욕망과 싸워나가며, 언제고 페미니즘이 세상과 호흡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진정한 페미니즘에 대해 나는 모르나, 그것이 선을 긋는 방식은 점점 더 넓어질 뿐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것은 틀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결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과의 계속성을 폐쇄하지 않은 채로, 여성 및 다른 모든 소수자 존재의 존엄과 평등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것은 ‘뻐끔’ 열려 있는 채면 충분하다.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로 돌아가 본다. 하루키 씨는 앞서 인용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간단히 말해 이렇다. 나의 테두리는 열려 있다. 뻐끔 열려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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