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17.12.06)
그 형들은 아마 거짓말을 했다, 고 생각했다. K가 밖에 눈이 온다며 힘주어 이야기하길래 얼마나 오는가 창문을 내다보고 말았다. 그래서 눈발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괜히 K를 책망하는 것을 보니, “(군대)갔다 오니까 그냥 다 쓰레기로 보인다.” 하고 젠체하던 형들은 아마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군역의 지긋지긋함을 대표할 상징은 갈퀴나 디스 플러스면 충분하다. 애꿎은 눈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따뜻한 캔커피가 있으면 좋고, 담배마저 있다면 더 좋다. 언젠가 중학생들에게 빙정설을 가르칠 적에, “이 땅에 내리는 모든 비는 사실 눈이 될 수 있었어. 하지만 날씨가 춥지 않아서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을 뿐이야.” 하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을 한 적도 있다. 물론 XX중학교 기말고사에는 ‘온대지방에서 빙정설로 인해 과냉각된 얼음 알갱이와 사교육 보조교사의 표정에 관해 논하라.’는 문제는 출제되지 않아서 굳이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뒤숭숭하니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갈 테다. 아버지 안 입어 내가 입는 코트가 유난히 무겁다. 새로 산 목도리에서 싸구려 원단 냄새가 역하다. 밤이 늦었고 빨래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마를 것 같지 않아 찔끔거린다. 내일 아침 자취방 골목 어귀의 전봇대가 내린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세라 움찔한다. 나는 전봇대에 깔리는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고등학교 때 발명대회 제출했던 비닐하우스 위 눈치우는 기계를 떠올릴까. 너저분한 감정이 서로 이어지고 곧 세계는 거대한 먹구름이 되어버린다. 먹구름 속에 손을 넣어봤자 손만 얼어붙는다. 말했지 않는가, 과냉각된 얼음알갱이라고.
담배를 태우고 있자니 눈발이 보인다. 그래, 눈이 온다. 잔설(殘雪)을 이야기했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첫눈이 온 지는 조금 되었고 이 겨울 제법 매서울 것이라며 12월의 초입부터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괜히 서글픈 음악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았기에 UMC를 듣는다. 창공을 가르던 눈송이가 행인의 발 밑 으깨지는 생각을 하면, 무력한 인털리겐치아를 떠올리고 만다. 물론 인텔리는커녕 고등 교육으로부터 배운 것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사람인지라, 무력함으로 좌절할 일은 별로 없다. 그래도 뭐랄까. 사랑, 재채기, 가난 말고도 숨길 수 없는 것 목록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돌리기 늦은 건 아닐까 했지만 돌아서기 싫은 표정쯤 될까. 그냥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좆같음이 있을 뿐이다. UMC랑 같이 노래 부르자. 다 좆이구나! 다 좆이구나! 다! 다 좆이구나! 다 좆이구나! 다! 다 좆이구나! 다 좆같구나!
어쩌면 그 때 그 형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지금의 나보다는 더 우아한 것 아닌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