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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담긴 힘을 믿습니다.

학내 페미니즘의 게토화를 경계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이 말한 지성의 편집증의 형식이라고 본다. 세즈윅은 신자유주의를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합병적 조절 레짐으로 기술하는 맑시스트를 이 개념으로 비판한 바 있다. 깁슨-그레엄의 재구성에 따르면 편집증적 지성은 모든 것을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여 설명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이 목적에 따라 흘러간다고 기술하는 '강한' 이론을 갖는다. 편집증적 주체는 자신을 자본주의의 피해자로 고수한다. 여기서 피해자는 놀람에 대비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한다. 이러한 태도를 갖는 지성은 전체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여 설명하면서 이 원리에 따라 어떻게 모든 것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편집증적 주체는 전체 세계에 대해 과도하게 깨어있는 시선을 취하며, 모든 위치와 사건을 똑같은 두려운 질서에 정렬시키면서 예측 가능한 것의 영역을 확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이론가는 이 원리가 실패하거나 놓칠 수 있는 요소들은 보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분노하는 편집증적 주체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데 집중하는 가운데 세상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며, 이로써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구멍, 피해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을 보는 데는 실패한다."

여/성이론 37호, '페미니즘 트러블: 도시 상상계와 편집증적 주체의 탄생', 이현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주년 학술대회에 다녀온 이후로, 짬이 날 때마다 이현재 선생님의 글을 반복해서 읽었다. 명쾌한 글이었으나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도시 상상계는 읽고 있던 김민하 작가의 '냉소사회'를 떠올리게 했고, '편집증적 주체'는 페미니즘 컬트에 대한 내 평소 생각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아직 '냉소사회'는 다 읽지 못하여 생각을 정리해볼 수 없겠으나, '편집증적 주체'와 페미니즘 컬트에 대한 생각은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적는다.

 임기 시작한 직후부터 하여 쉬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물음이 있었으나, 굳이 긴장과 갈등을 가져갈 이유가 없어 말을 아낀 것들이 있다. 혹자는 비겁하다 할 것이나, 함께 할 수 있는 것들 하기에도 바쁜데 논쟁 벌여가며 일하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고 항변하련다. 이제서야 직책을 내려놓았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이 들어 말을 꺼내자면,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전개되는 양상은, 학우 대중을 일찌감치 포기한 책임감 없는 학생회와 맞물려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페미니즘은 정말 언젠가 승리하는 무엇일 수 있을까? 그 낙관에 기대어 그저 페미니즘을 말하고 행하면 되는 것일까? 글쎄, 눈치를 보던 대의원들도 하나둘씩 안티페미니즘 경향을 보이는지라, 마냥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고파스로 대표되는 익명 커뮤니티는 대놓고 안티페미니즘을 표방한다. 워마드 호주국자 등 휘발성 강한 사건들로 인해 페미니즘은 이런저런 누명마저 쓰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세이프존을 추구하기에 급급한 고려대학교 학생사회 속 페미니즘은 종종 왜곡되거나 그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페미니즘의 게토화가 시작되고 있다. 학생사회 속 페미니즘이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 몇 안 되는 위안거리일까. 그러나 지금의 움직임들은 과연 그 문법에 있어 정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언젠가 나는 TERF 논쟁을 바라보며 어쭙잖지만 이런 글(https://brunch.co.kr/@mungkop/58)을 쓴 적이 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여 강력한 외부자 역할을 하는 페미니즘 컬트에 대해 썼다. 이현재 선생님이 지적하시는 '편집증적 주체'를 양산하는 흐름이 이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xx라는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여 설명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이 목적에 따라 흘러간다고 기술하는 '강한' 이론"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날 적에, 반지성과 배타성의 마차를 타고 가뿐하게 혐오로 나아간다. 고려대학교 학생사회가 혐오로 나아간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점점 대중과 유리되어 붕 뜬 의제로만 남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의제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행동하는 주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대중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법은 정말 괜찮은가?

 먼저 개념의 남용 혹은 다층적인 모순을 한 가지로 환원하는 등 반지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몇몇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나는 해당 세미나를 두고 '학교 명예 실추' 등의 추상적이고 동의할 수도 없는 가치를 내세우는 잡배들을 매우 불쾌하게 여김을 밝힌다. 특히 학생이 학교 공간 대여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황은 모두의 교육권을 한 발 물리는 상황임에도, '학교 명예 실추' 운운하며 전화 걸었노라 자랑하는 빈곤한 사유는 역겹기까지 하다. 또한 그런과정 속에서도 꿋꿋이 세미나를 진행한 관련 담당자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다만, 세미나의 내용에 대해선 조금 할 말이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개념의 무분별한 확장이다. 고려대학교의 '강간문화'와 고려대학교의 남성 중심적 문화는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겠으나, 그 둘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발제는 고려대학교 강간문화를 논증하며, 사발식으로 대표되는 마초적인 술자리, 총학생회장 중 여성 회장단이 적은 것과 정기전 종목에 여성이 참여하는 종목은 부재한 것 등을 이야기했다. 나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예시로 든 문화들이 남성 중심적이며,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강간문화로 지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다. 이러한 무분별한 확장은 위험하다. 게다가 상기된 참여자들은 고파스를 언급하며, 사이트의 안티페미니즘 경향 역시 강간문화라고 주장하였다. 이 역시 무분별한 확장이다. 나는 의구심을 넘어 당혹스러움마저 느끼고 말았는데, 고파스 익명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어떤 글들을 강간문화로 지목하는 것과 해당 행사에 대한 안티페미니즘 경향의 반응들은 별개의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예시로 든 사례 말고도 고려대학교 강간문화를 입증하는 사례들은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발생했던 성 인권 침해 사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경대 호안비언소 종이에 적힌 피드백 등도 충분한 사례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그 속에서 '강간문화'라는 낱말 속에도 지목효과가 내포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페미니즘을 하나의 학문으로 다루는 학회라면, 그 학문에 접근하는 태도 역시 학구적으로 가다듬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강간문화'라는 단어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페미니즘 전반이 투쟁해야 할 구조와 문화를 지적하는 흐름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말하려는 바를 위해 억지로 설정된 근거는 논파 당할 경우 더 큰 반동으로 돌아온다. 이를테면, 이별을 고할 때 담배를 태운 것이 성폭력의 가해로 지목되는 상황이다. 지난여름 반성폭력 연석회의체는 '성폭력'과 '성 차별적 언행'을 분리하여 자치규약을 작성한 바 있다. 당시 개정된 사항을 중앙운영위원회에 이를 설명하며 "누군가를 김치녀라고 부르는 것도 성폭력으로 볼 수 있겠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특정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과 특정 행위를 가해로 지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중을 상대로 기획된 오픈 세미나라지만, 학회에서 열리는 세미나가 개념을 무분별하게 확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이 반지성의 징조는 아닌가. 후기를 이야기하며 한 참가자가 연대의식과 감동을 느낀다고 말했을 적에, 내가 속으로 신음을 삼켜야 했던 이유다.

 비슷한 시기 학내 모 간담회에서는 유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반복되는 자의식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로 유아인을 오직 무례한 타자로 만드는 것에 집중되었다. 유아인과 대중 학우 일반을 비교할 적에, 대중 학우 일반이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유아인보다 나은 젠더감수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여성인권에 대한 카드뉴스를 제작하면, 군인권에 대한 카드뉴스도 제작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학내 인권 담론의 지형이다. 아마 나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주체들도 그를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대중 사업을 하는 것은 가끔 넌더리가 나고 자존심마저 상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잘 모르는 가해자를 계속해 가르치며 외연을 확장했다는 그 말이 맞는다면 우리가 그래도 걸어야 할 길은 명확하다. 다만, 점점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 될세라.

 특정 단위를 지목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단위들은 대중 사업을 아예 진행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받았다. 대중 사업을 역설했던 내게 수세적인 사업밖에 진행할 수 없다는 답변이 인상적이었는데, 내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기에 그렇다. 학생회비로 사업을 운영하며 책임감을 갖고 운동을 만들어나가야 할 주체들이 대중 사업의 난망함을 항변하는 꼴은 우습다. 오히려 공세적인 사업들이 안티페미니즘 진영의 진영 논리만을 강화하며, 점점 영영 타협할 수 없는 타자로 서로를 빚어내고 있는 지경 아닌가.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전복적인 발화를 통해 충격요법을 선사하는 것도 당연히 고려해봄 직하다. 다만, 그것만으로 누군가를 설득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단위에 소속되어 있는 개인들이 어떤 피해 서사를 살아냈는지, 가끔은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여전히 자신이 학생사회 속 무슨 감투를 썼네 거들먹거리며 진보연하는 인간들은, 소수자 담론에 발맞춰 페미니즘을 뇌까리곤 한다. 나 역시 그런 인간들이 특히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가끔씩 전부 부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재발방지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속으로 되뇌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구조와 문화를 바꿔나가기 위해 설득해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이현재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대신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 속에서 서로의 차이에 좀 더 익숙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제 나는 학내 페미니즘에 대한 시선을 거두려 한다. 당연히 학내 페미니즘의 게토화를 우려하던 시선도 거두려다, 못내 아쉬워 한마디 남기고 간다. 그렇게 이 글은 어쩌면 버벌진트 가사 인용해서 끄적인 퇴임 인사보다 훨씬 더 퇴임사에 가까운 글이 되어버렸다. 인수인계서에도 첨부할 생각이기에, 내 후임자가 성실한 독자라면 이 글은 그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막연한 낙관에 대고 소금을 뿌리는 글이다. 학내 페미니즘의 게토화를 운운하면서 훈훈할 수야 없지 않은가.

 나는 올해 내내 인권연대국의 슬로건으로 "이야기에 담긴 힘을 믿습니다."하고 지껄여 왔다. 사실 그 힘은 너무 미약했기에, "이야기에 담긴 힘을 믿습니다."라는 말은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문장은 힘이 아니라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부드러움 속에서도 단단함을 찾는 이야기. 반지성을 경계하고 타자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담긴 이야기.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채비를 마친 채로, 즉 다시 말해 상처를 입을 준비가 된 채로, 문법을 돌아보고 청자들의 선한 의지에 기대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무엇 말이다. 이야기의 힘, 그것이 내가 가졌던 막연한 낙관이었는지 모른다. 이 글을 적으며 나 역시 지난 임기 동안 인권연대국이 해온 사업들에 대해 점검하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합격점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상향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고 자평하기엔 머쓱하고, 제대로 된 제도나 문화를 정립하는 것에선 미미한 변화만을 이뤄냈을 뿐이다. 마주해야 하는 현안들을 간신히 해결해왔다만, 앞으로 나아갈 청사진을 그리는 것에 있어 미숙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다만 염치없게도, 이러한 고민과 노력이 다음 대에 전달되어 더 나은 사업과 운동을 펼쳐나갈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완숙의 단계까지 함께 하지 못했으나, 누군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책임을 전가(轉嫁)하기에 전임자는 아닐 것이나, 지난 1년 그랬듯이 이야기에 담긴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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