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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패터슨>을 봤다. 느린 문법의 영화를 곧잘 감상하는 편임에도, 이 영화의 '소소함' 그 자체에 약간의 지루함을 느꼈음을  고백해야겠다. '웅장함'이나 '긴박함'이 완전히 멸종되어버린 듯한 세계. 그 동안 항상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일상 속의 행복이라 떠들었는데, <패터슨>의 리듬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 급한 성미가 내 일상을 계속해 잠식해왔구나. 이를테면, 입술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이 그랬다. 아, 그래. 입술에 난 상처를 더 이상 손으로 잡아뜯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반복과 변주, 예술이 일상과 공존하는  삶. 이 영화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는 명백했으나, 다만, 내가 그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얼마나 쫓겨가듯 살고 있는지. 요즘 들어 자꾸 취직과 돈 얘기에 예민해지는 마음자리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도, "패터슨과  로라는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고 있을까?"하는 질문이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맞아요, Tiger JK. "머릿 속 반 이상은 계산기와 재산, 멀어지는 천국의 계단!"

내게 글은 뭘까. '나를 담아내는 그릇이요, 자아의 반영이요.'같은 시덥잖은 말 말고 뭐라고 해야 할까. 최근 글을 쓰며 먹고 사는 직업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굳어지긴 했다. 나는 결코 내가 원하는 만큼 특출난 글을 쓰지도 못할 것이며, 그렇다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글을 쓸 수도 없을 것 같다. 때떄로 정치적인 글쓰기를 할 것이나,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글은 쓰고 싶지 않다. 이야기에 담긴 힘을 믿고 있으나, 내 이야기에 담긴 힘이 그리 크지 않음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글은 그냥 손빨래 같은 것은 아닌가. 이렇게 침전하여 글을 쓰고 있노라면, 여기 저기 묻은 먼지와 때를 손으로 직접 문지르고 있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래도 평생에 걸쳐 글을 쓸 적에, 스스로를 둘러싼 일상 반경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 때는 그것을 조금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아니, 사실 최근까지도 그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삶의 의미를 삶 바깥에서 찾기 위해 분주했었다. 패터슨 시의 버스 기사 패터슨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가. 나는 작고 수줍은 삶의 미소를 팽개치고 자꾸만 웅장한 것들을 찾아 방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기계적인 삶의 반대편에서 예술을 찾기 위해 스마트폰과 SNS를 중단할 수야 없겠지만, 내 삶의 균형과 리듬을 찾아야 할 것도 같다.



삶은 결국 흐르는 법이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삶의 운율은 삶을 어떻게 흘려내느냐에 따라 그냥 흩어지기도 할 테고, 빛을 발하기도 할 테다. 군역 시절 낡은 수첩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낭만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 하나라고 썼었다. 모두의 삶에는 빛나는 운율이 있다. 그것을 이어내기 위해 나는 삶을 조금 더 가슴 가까이 껴안아야 하는지 모른다. 영화관을 나설 적보다, 다시 삶으로 돌아온 지금에야 영화의 운율이 조금 더 따스히 느껴진다. <패터슨>을 이렇게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빨래를 했다. 입술은 더 이상 뜯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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