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초인간』, 김중혁, 2020
어린 시절부터 책이랑은 담쌓고 살았던 나를 소설의 세계로 인도해 준 건 김중혁의 단편집이었다. 처음으로 만난 그의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 속 재치 넘치는 대화와 신선한 소재를 다룬 이야기들은 소설 읽는 맛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단번에 그의 팬이 되었다.
이후로 소설집 『1F/B1』, 『가짜 팔로 하는 포옹』뿐만 아니라 장편소설 『펭귄뉴스』,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당신들의 그림자는 월요일』, 『나는 농담이다』 에세이집 『모든 게 노래』, 『대책 없이 해피엔딩』, 『메이드 인 공장』, 『뭐라도 되겠지』, 『바디무빙』 『무엇이든 쓰게 된다』까지 에세이 한두 권 빼고는 거의 다 읽었다. 책은 꼭 사서 읽었다. 단편집과 에세이집은 여러 권 사서 주변에 선물로도 많이 줬다. 혹 누군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김중혁을 말하곤 했다.
(사족:『악기들의 도서관』은 여태까지 한 4-5권 정도 내 손을 거쳐갔다. 길 가다 근처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으면 들어가서 책을 찾곤 했다. 혹시나 사인본이 있을까 하고. 그러다가 친필 사인본을 구했는데, 무려 '강정'이란 이름을 가진 이에게 해준 사인본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사하면서 그 책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강정이 시인 강정이었을까? 궁금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톡톡 튀었던 김중혁의 신선함과 경쾌함은 지루함으로 바뀌어갔다. 어느 책을 읽으나 똑같은 등장인물들이 이름만 바꾸고 나오는 것 같았다. 인물들의 기시감이 비단 김중혁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 정도가 좀 심했다. 인물들은 대체로 입체감이 없었고, 진중한 이야기를 다루는 소질도 부족해 보였다. 김중혁의 소설은 탄산음료 같아서 읽을 때면 청량감과 상쾌함을 느끼곤 했지만 그것만 마시며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김중혁의 최고의 성취는 『악기들의 도서관』이나 『1F/B1』, 「요요」라고 생각한다. 지금 읽어도 훌륭하고 짙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가 많다. 장편은 단편에 비해서는 좀 떨어지는 편인데, 『나는 농담이다』를 읽고서는 여기까지가 김중혁의 한계구나,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 이야기야말로 김중혁이 소설을 쓰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가 이 지점에 머문다면 더 이상 좋아할 이유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한동안 김중혁의 책을 찾진 않았는데, 김중혁도 그 후로는 작품 활동보다는 방송활동에 더 주력해서 책도 많이 내지 않았나 보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김중혁의 책을 집어 들었다. 2020년 여름에 나온 최신간 『내일은 초인간』이다. 딱 김중혁 표 소설이었다. 그의 책에 늘 등장하는 인물들, 농담 따먹기를 좋아하고, YOLO를 인생 표어로 삼아 가볍고 경쾌한 리듬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러나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김중혁의 글쓰기 에세이집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는 동료 작가들의 글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글이 나온다. 한 편의 글에 담긴 노고를 알기에 쉽사리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공감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작가나 글에 대해서는 되도록 비판을 삼가는 편인데, 이 책은 정말 참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야기는 대강 이러하다. 평범한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초인간들이 모여 클랜을 만든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하고(1권), 곤경에 처한 클랜원을 구한다(2권).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의기투합한다는 점에서 X맨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특별한 사람들도 결국 서로 이해하고 함께해 줄 사람들이 필요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란 점과 그 연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설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사실 우린 전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맡고 있어. 초능력자들인데 무능력자들이고, 무능력자들인데 초능력이 있어. 세상에는 자신들이 정말 중요한 사람인 줄 아는 무존재들이 많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서, 우린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아. 그래서 특별해졌어. 서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특별하게 생각해. 우린 어쩌면 조금씩 다 아픈 사람들이고, 아파서 서로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고,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야. 모자란 걸 아니까 채워주고 싶어서 함께 있어."
하지만 전반적으로 대화는 유치하고, 인물들은 산만하고 깊이가 없다. 소설을 이끄는 중심 사건은 허접하고 설득력이 부족하며, 핍진성은 부실하여 별다른 정서를 자아내지 못한다. 그의 장점이던 경쾌함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느껴진다. 주특기인 뼈 있고 위트 있는 농담은 거의 실패한다. 간혹 인용되어 소설 속 분위기를 형성하는 히치콕의 영화나 여러 팝송은 최악이다. 소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못하고, 다른 창작물에 기댈 때 이야기는 얼마나 시시해지는가?
책 편집도 최악이다. 이렇게 글자 크고 행간도 길게 편집한 책은 거의 보지 못했다. 한 권으로도 충분히 나올 만한 책을 억지로 2권으로 부풀렸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2권을 동시에 빌렸는데, 어느 것이 1권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요즘 나오는 책은 앞에 1,2 표시가 표지에 적혀 있지만 내가 빌린 건 표지 뒤편에 조그맣게 '첫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라고 적혀있어서 알기 힘들었다. 게다가 두 책 모두 (너무 썰렁한) '작가의 말'이 목차에 나와 있어서 독립된 이야기인가 오해하게 만든다. 무엇이 1권인지 한참 책을 뒤지다가 결국 뒷면의 표시를 못 보고 아무거나 골랐는데, 그게 2권이어서 좀 곤란했다.
아직 내 책장엔 김중혁의 단편집들이 다 꽂혀있다. 이제 그것 말고는 더 이상 김중혁의 책을 늘리진 않을 것 같다. 훗날 김중혁이 자기 한계를 넘은 걸작을 썼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모를까. 혹시나 김중혁이 인터넷 바다를 항해하다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오래 좋아했던 독자의 애정 어린 쓴소리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굿바이 김중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