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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Jun 16. 2022

어디선가 비거스렁이가 오고

가뭇없게 / 비거스렁이


요전 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온종일 노곤함 속에 허덕이며 지냈다. 출근하자마자 잠이 쏟아져 겨우 커피로 각성했는데, 하필 회사 일도 빡빡했다. 퇴근할 때까지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을 했다. 다행히 칼퇴는 지킬 수 있었지만 퇴근길 지하철은 늘 그렇듯 사람들이 가득했고 나를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꾸만 스르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비벼가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오자마자 옆지기와 고양이에게 생존신고를 하곤 바로 거실에 드러누웠다. 흡사 시체가 됐달까. 옆지기가 무어라 말을 걸든 말든 고양이가 인사를 하든 말든 누워서 눈을 감았다. 잠이 막 쏟아지진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감으면 어딘가 숨어 있던 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몇 방울씩 손을 때렸던 비는 이내 쏴아아- 소리를 내며 내리기 시작했고, 빗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순간 올해 강우량이 역대급으로 적다는 뉴스와 텃밭을 하는 주변 이웃들이 걱정하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한 바퀴 돌고 퇴장할 때쯤 내 의식도 가뭇없게 자취를 감췄다.


빗소리 덕분인지 잠이 더 잘 왔다. 한 이십분쯤 눈을 붙였으려나. 감긴 눈이 번뜩 뜨였는데, 빗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비거스렁이가 왔는지 찬 바람에 몸이 서늘해졌다. 환기한다고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바람이 솔솔 들어오고 있었다. 옆에 같이 따라 누운 고양이처럼 모로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아봤지만 이미 빼앗긴 체온을 다시 찾아올 순 없었다. 낮에 불었으면 반가웠을 바람이 비거스렁이로 오니 불청객이 되었구나 싶었다.


결국 삼분 정도 저항하고는 백기를 들었다.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는데, 마음은 불편했지만 비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을 생각하며 잠을 깨운 찬 바람도 반갑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이 서늘했던 순간을 잘 간직했다가 한여름 뙤약볕에 써먹어볼까나.




가뭇-없다 [형용사] 보이던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찾을 곳이 감감하다.


비-거스렁이 [명사]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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