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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Jul 28. 2022

과거를 온전히 그러안기

『인생』, 위화


종종 할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땐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왜 몰랐을까, 하는 쓸모없는 생각들. 때론 이불킥하게 되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렇게 후회한들 무엇하랴.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는걸 말이다. 그렇게 옛 생각에 잠겨 후회로 시간을 채우는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일들에 집중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일 테지만... 사람 마음이 어찌 쉽게 바뀌겠는가. 로봇도 아니고.


위화의 소설 『인생』에는 아마 나보다 몇 백만 배는 더 인생을 수정하고 싶을 주인공, 어쩌면 세상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1993년에 출간된 위화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으로 이듬해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80년대 위화의 초기 아방가르드하고 폭력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문학적 사실주의로의 전환기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과연 노인 푸구이의 이야기에는 국공내전과 토지개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소설은 시골에서 민요를 수집하는 화자가 촌구석을 돌아다니다가 노인 푸구이를 만나며 시작된다. 푸구이는 마침 게으름을 피우는 소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참이었다. “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 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가 자기만 밭을 가는 줄 알까 봐 이름을 여러 개 불러서 속이는 거란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이름들이 아니었다. 노인은 이제 그 이름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푸구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다. 푸구이는 그에게 시집온 '자전'과 함께 낳은 딸 '펑샤', 뱃속에 있는 아들 '유칭'을 생각하며 겨우 마음을 고쳐먹는데, 하필 국민군에게 강제징집되어 어쩔 수 없이 군생활을 한다. 전장에서 죽다 살아온 푸구이는 딸 펑샤가 벙어리란 사실을 알게 되고, 넷은 이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들 유칭이 공산당 간부의 아내를 위해 수혈하다 죽고, 아내 자전은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다 죽는다. 딸 펑샤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얼시'에게 시집을 가지만 아들 '쿠건'을 낳다가 죽고, 얼시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푸구이와 쿠건은 삼 년을 같이 살았는데 쿠건이 병이 나 죽는다. 깊은 절망 속에 잠겨있던 푸구이는 소시장을 지나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살을 기다리던 늙은 소를 사서 '푸구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한 사람이 다 겪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비극을 몇 번이나 겪었지만 푸구이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텐데, 푸구이는 오히려 화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살며시 미소 짓는다. 그에게 과거는 슬픔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의 시간이 물러가고 나서 푸구이는 생각한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 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하루 고되게 일을 하고 겨우 잠을 청하는 일상이 반복됐을 푸구이에게 고통에만 잠겨 있는 건 사치스러웠을 게다. 그렇기에 견뎌낼 수 있었겠지만 훗날 누군가에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려줄 삶의 여유가 그냥 생기진 않았을 게다. 과거의 좋은 점만 취하려 했다거나, 후회와 고통에만 잠겼다면 저런 넉넉한 여유가 생길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인데,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과거와 끊임없이 화해하고 지난 시간들을 온전히 그러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후회에 잠겨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 쯤은 살포시 웃으며 넘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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