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크 Sep 11. 2019

제발 한 마디만 할게요

통곡의 벽!  홈쇼핑 심의에 대하여

"아니 국가공인기관으로부터 인증을 받았다니까요?"

"그래도 고객들이 오인할 소지가 있어요. 방송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걸로 해요"


"정말 수량이 지금 몇 개 없는데 고객들에게 매진 예상 안내를 하면 안 되나요?"

"고객들에게 구매 충동을 유발할 수 있어서 안됩니다"


아마 홈쇼핑 PD들이 방송을 하면서 가장 의견 충돌이 많은 부서가 심의팀일 것이다. 시청자들에게 상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구매 욕구를 적절히 자극하고 싶은 PD와 방송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장치와 표현들이 문제 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의팀은 늘 팽팽히 맞서고 있다.

 

보통 방송을 준비하면 PD는 방송에 내보낼 자막과 방송에서 하는 시연, 멘트 등을 정리해서 심의팀에 넘긴다. 그러면 심의팀에서는 방송통신위원회의 규정과 회사 내부의 규정, 현재의 이슈 등을 고려하여 적절하지 않거나 고객들이 보았을 때 오해를 하거나 문제가 생길만한 사항들을 수정하는데 이때 하나라도 더 고객들에게 말하고 보여주고 싶은 PD와 규정에 의거하여 어떻게든 순화된 표현과 멘트를 권장하는 심의팀 사이에 실랑이가 자주 벌어진다.


입사 후 심의팀과 가장 마찰이 많았을 때가 보험 방송을 할 때였다. 보험 상품은 그 기준이 매우 엄격하여 사실상 보험에 대한 안내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PD로서 적어도 고객들에게 이 보험상품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어서 해당 보험상품이 보장하는 질병에 대한 내용을 방송에 포함하고 싶었는데 고객들에게 불필요한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심의팀의 입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제 질병에 관련된 논문과 발표자료, 신문기사까지 모두 제출해봤지만 그중에서 방송에 쓸 수 있는 자료와 표현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팩트에 근거한 안내인데 왜 안되냐는 나와 규정상 절대 안 된다는 심의팀이 팽팽히 맞섰고 규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나의 말에 우리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달았다.

보험뿐만 아니라 화장품이나 건강식품의 경우도 효능이나 효과에 대한 표현 기준이 엄격하여 자주 의견 충돌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방송 전에 심의를 받고 방송에 문제없음을 확인받아도 끝이 아니다. 생방송 역시 심의팀에서 실시간 모니터링을 하며 즉석에서 나오는 호스트의 멘트와 시연 등이 심의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지 체크하며 만약 심의 규정에 어긋나면 그 즉시 호스트로 하여금 정정멘트를 하게 한다. PD 입장에서 크게 문제없는 멘트도 심의팀에서 걸고넘어져 호스트를 위축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그것 역시 심의팀과 옥신각신할 때가 많다. 


PD 입장에서 심의팀에게 서운한 게 많지만 막상 심의가 없으면 크게 문제 될 일도 많다. 실제 심의가 허술하게 통과된 방송이 회사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과일의 풍부한 과즙을 보여주기 위해 과일을 짜는 시연을 하는데 시청자들이 볼 수 없는 카메라 밖에서 과즙을 인위적으로 더 붓다가 딱 걸린 모 홈쇼핑사의 방송이라던가 방송 때만 급히 상품을 백화점에 입점시켜놓고 그 상품을 백화점 동일 모델이라고 방송을 해서 문제가 된 방송들이 대표적이다.


나는 심의를 충실히 받지 않은 탓에 회사 내부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한 번은 심의가 완료된 자막을 내가 임의대로 수정을 했다. 보통 심의가 완료된 자막은 절대 수정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어차피 말이 안 통하는 심의팀이니 그냥 내가 바꾸자 하는 마음에 내가 생각하기에 문제는 안되지만 고객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표현들을 마구 넣어 자막을 완성했다. 심의팀 너희들이 그렇게 걱정했지만 나는 문제도 되지 않고 오히려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여 더 잘 팔았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하필 실수로 판매 가격을 쓸 때 0을 하나 빠뜨려서 실제 가격의 10분의 1 수준으로 자막을 만들어버렸다. 실수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당당히 방송에 들어간 나는 방송이 시작되자마다 심의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판매 가격 표시를 잘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급하게 정상 가격으로 수정을 했지만 이미 방송을 본 고객들이 많았고 실제 구매 페이지에서야 가격이 제대로 세팅이 되어있었지만 방송에서 가격을 보고 주문하려 했다고 항의하는 고객들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오래된 일이라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는 않지만 아마 백번 사죄드리고 적립금 등을 지급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방송 직후 프로세스를 어긴 죄(?)로 큰 문책을 받았다.


PD들은 늘 상품을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까 고민을 한다. 심의팀은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방송을 보고 구매했을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PD들은 심의팀이 너무 규정만 앞세우며 어떨 때는 자의적인 기준으로 지나치게 타이트하게 심의를 본다고 서운해하고 심의팀은 그저 규정대로 하는 것이고 방송이 문제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왜 PD들이 자꾸 억지를 부리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회사에서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PD팀과 심의팀이지만 사실 PD들이 가장 의지하는 것도 심의팀이다.  PD들이 잘못 기입한 상품 정보를 일일이 찾아내어 수정하고 규정은 물론 현재의 이슈 등까지 모두 인지하여 방송에 문제가 없게 조치하는 것도 심의팀이다. 방송이 시청자를 만날 때 잘못되지 않도록 신경 쓰는 최후의 보루인셈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심의팀 덕에 대형사고를 미리 수습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끔 심의팀에서 미안한 말투로 이것저것 수정을 요청하면 괜히 그들의 잘못도 아닌데 그러는 거 같아서 내가 미안할 때도 있다. 어찌 되었건 한 회 사 내에서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가진 두 팀이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PD가 표현하고 싶은 것과 심의팀에서 규제하고 싶은 것의 중간쯤 그 어딘가를 찾기 위해 오늘도 나는 심의팀을 만나러 간다. 


이전 05화 몰랐지?? 홈쇼핑 회사 다니니까 좋더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